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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레 Oct 03. 2024

300km를 달려 도착한 곳

San Vito Lo Capo, Sicilia

  체팔루를 떠나 우리는 다시 황량한 해변들을 지나갔다. 체팔루만 빼곤 아무 것도 볼 게 없는 북쪽 해안에서 시칠리아까지 온 보람 없이 고생만 하는 중이었다. 우리는 이미 북쪽해안을 따라 서쪽으로 반 이상 왔기 때문에 이제 와서 남쪽해안으로 내려가서 반대쪽으로 돌지 않은 것을 후회한들, 그저 계속 앞으로 나아가는 수밖에 없었다. 우리는 이대로 북서쪽 끝에 있는 산 비토 로 카포까지 쭉 달리기로 했다. 중간에 해변에서 멀지 않은 캠핑장이 있어 캠핑카 물도 갈고 샤워도 할 겸 하루 묵었다. 해변은 역시 실망스러웠지만 마음을 이미 비운 우리는 적당히 앉아 바다를 보다가 캠핑카로 돌아왔다. 샤워를 하고 마트에서 산 시칠리아 와인을 마시면서 저물어가는 노을을 바라봤다.


  가장 기대하고 온 시칠리아인데, 나는 지금까지 느껴 본 적 없는 심한 현타를 느끼고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캠핑카를 타고 시칠리아까지 와서 며칠 동안 고속도로만 달리고 또 달리고, 장을 보고 요리하고 먹고 치우고 자고, 찝찝한 몸을 견디다 샤워 한 번 하고.. 내내 그러고 있으니 말이다. 황량한 해변들에 거듭 실망하다가 겨우 만난 아름다운 곳은 제대로 즐기지도 못하고. 불평하고 싶지 않지만 볼멘소리가 터져 나올 수밖에 없지 않은가.


  에라 모르겠다. 나는 와인을 한잔 더 따랐다. 이탈리아는 2~3유로짜리 싼 와인도 허투루 만들지 않아서 꽤 마실 만하기 때문에 이탈리아에 있으면 아무래도 와인을 물처럼 마시게 된다. 그리고 노을을 보면서 와인을 홀짝이고 있으면 웬만한 일은 다 대수롭지 않게 느껴진다는 사실.



  다음 날, 점심을 먹고 캠핑장을 출발해 쉼 없이 달렸다. 그리고 드디어, 어둠이 내릴 무렵에 산 비토 로 카포(San Vito Lo Capo)에 도착해 마을 외곽의 주차장에 차를 세울 수 있었다. 배를 타고 메시나에 도착한 후 시칠리아 동쪽 끝에서부터 거의 서쪽 끝까지 북쪽 해안을 따라 300km를 넘게 달린 것이다. 그리고 그걸 해 본 사람으로서 진지하게 말하는데 시칠리아 북쪽 해안은 정말로 이쪽 끝에서부터 저쪽 끝까지 볼 만한 게 거의 없다. 아주 형편없을 지경으로. 그 중간에 있는 체팔루만이 사막의 오아시스 수준이고, 서쪽으로 가까워지면 팔레르모가 있고 우리가 이제 막 도착한 산 비토 로 카포도 있지만 메시나에서 팔레르모까지는 체팔루 외에는 아무 것도 없다고 보면 된다. 이 경로로 로드 트립은 절대로 하지 마시기를.

  우리가 도착한 산 비토 로 카포 외곽에 있는 이 주차장은 가족이 운영하는 곳인데 주인 할머니께서 환영한다며 시칠리아 마르살라의 전통 술인 마르살라를 한 잔씩 주셨다. 마르살라는 포르투갈의 포트와인처럼, 이탈리아를 대표하는 포티파이드 와인(Fortified Wine; 주정강화 와인)이다. 포티파이드 와인은 발효 과정 중 알코올을 추가하여 도수를 높이고 와인의 보존력을 강화한 와인을 말한다. 진하고 다채로운 풍미로 시칠리아 섬의 황금이라고 불리는 마르살라. 한 번 마셔 보고 싶었는데 이렇게 마셔 볼 수 있어서 기뻤다. 게다가 할머니께서 직접 담그신 거라고 하니 더 귀한 한 잔이다. 마르살라는 도수가 18도 이상으로 높은 술이라 조심스럽게 마셔 봤는데 녹진하니 달고 향긋하면서 알콜향이 강하고 맛이 굉장히 진했다. 내가 처음으로 포티파이드 와인의 매력을 알게 된 순간이었다.


  맛있는 술과 이탈리아 할머니의 정에 마음이 훈훈해졌지만 이곳은 주차장이라 샤워는 물론이고 문이나 창문을 열 수도 없는 것이 못내 아쉬웠다. 산 비토 로 카포에 캠핑장이 한 곳이 있기는 하지만 너무 비싸서 이곳으로 왔는데, 남편이 사용하는 앱의 후기를 보면 얼마 전까지만 해도 이곳은 오토 캠핑장이었던 것 같았다. 남편이 주인 아저씨께 여쭤 보니, 이 마을의 캠핑장 사장이 시장에게 뇌물을 줘서 주변 오토캠핑장들의 숙박 허가를 다 취소해 버렸단다. 그래서 울며 겨자먹기로 주차장으로 바꿔 운영할 수밖에 없다고. 세상에.. 그 말을 듣고 보니 그 단 한 곳 있는 캠핑장의 가격이 그렇게 비쌌던 것이 이해되었다. 이곳은 여름 휴가지로 본토에서도 인기 있는 곳인데, 캠핑카를 타고 여기까지 온 사람들의 선택지를 다 없애 버리고 비싼 가격에 자기네 캠핑장에서 잘 수밖에 없도록 한 것이다. 우리가 여기까지 오는 동안 사람들이 별로 오지도 않는 북쪽 해안의 주차장이나 공터에 캠핑 금지 표지판이 그렇게 많았던 것도 비슷한 맥락으로 이해할 수 있는 거겠지. 시장이 대놓고 뇌물을 받고 이래도 되는 건가 싶었다가 우리가 마피아의 고장 시칠리아에 있다는 것을 새삼 실감했다.


  주차장에서 자고 다음 날 아침, 주인 아저씨가 우리를 마을까지 태워다 주셨다. 아직 오전인데도 날이 너무 더워 걷고 싶지 않았지만 외부에서 차가 들어오지 못하게 차단 봉이 박혀 있어서 마을 입구에서 내려야 했다. 5시에 입구에서 다시 만나기로 하고 거리로 들어섰다. 산 비토 로 카포는 아랍의 영향을 받아 거리 모습이 여느 이탈리아 마을과는 확연히 달랐다. 눈이 부시게 하얀 색으로 칠한 상자 모양 집과 휑하니 넓은 거리 분위기는 마치 다른 나라에 온 것처럼 신기하고 생소했다.



  그늘 없이 뜨거운 햇볕이 내리쬐는 거리를 걸어 해변으로 갔다. 햇빛이 너무 강해 눈이 멀 것 같았지만 녹색에 가까운 에메랄드빛 바다와 해변 옆으로 놀라울 정도로 높이 솟아오른 바위산이 아름다워 선글라스를 쓰고 싶지 않았다. 눈을 최대한 가늘게 뜨고 눈앞의 풍경을 바라봤다. 인기가 많은 곳이라 그런지 아직 성수기가 아님에도 해변은 색색깔의 파라솔과 선베드로 빼곡했고, 수많은 사람들이 해변을 즐기고 있었다. 눈앞에 솟아오른 바위 산이 너무 거대해서 넓은 해변에 가득한 사람들이 모두 개미 같아 보였다. 우리는 해변 이쪽 저쪽을 둘러보다 파라솔과 선베드가 없는 해변 끝 무료 해변에 우리가 가져온 파라솔을 꽂고 비치 타월을 깔았다. 시칠리아에 와서 무려 300km를 넘게 달린 후에야 드디어 시칠리아다운 아름다운 해변에 자리를 깔고 누운 것이다. 드디어!!


  산 비토 로 카포의 해변은 멀리까지 걸어나가도 깊이가 허리 정도까지밖에 되지 않고 파도가 거의 없어 수영하기 좋았다. 해변에 누워서 바라보는 풍경도 아름답고, 해변이 넓고 산이 보여 거대한 자연의 품에 안겨 있는 느낌이었다. 사람이 많은데도 평화로웠다. 평온함에 살짝 잠이 들려던 찰나 어디선가 "Cocco bello~ Cocco bello~(콕코 벨로~)"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 나라마다 해변에서 파는 특별한 먹거리가 있을 텐데, 이탈리아 해변은 바로 이것이다. 어느 해변에서나 "콕코 벨로~"를 외치는 소리를 들을 수 있다.

  특별한 건 아니고 생 코코넛 과육을 파는 건데 이곳의 코코넛 아저씨는 코코넛 모양 모자까지 갖춰 쓰고 있어서 쳐다본 순간 웃음이 터지고 말았다. 안 사 먹을 수가 없었다. 아저씨를 불러 하나 달라고 했더니 2유로에 작은 코코넛 반개를 껍질을 까고 탁탁 쪼개서 약간의 코코넛 워터와 함께 플라스틱 용기에 담아 줬다. 딱딱한 과육에 별 맛은 없는데 왠지 해변과 어울리는 맛.


  오후가 되니 슬슬 화장실도 가고 싶고 배도 고파서 해변을 떠나 거리를 구경하면서 마을 입구쪽에 있는 작은 바(bar)로 갔다. 해변 근처 레스토랑에서 제대로 사 먹으면 비싸니까 일부러 해변에서 멀리 떨어진 바를 찾아온 거였다. 화장실에 다녀와서 멸치와 비슷한 생선인 앤초비 튀김과 오징어 튀김, 차가운 병 맥주를 주문했다. 크게 기대하지 않았는데 갓 튀겨내 뜨겁고 바삭하고 감칠맛 있는 튀김과 차가운 맥주의 조화가 훌륭했다. 즐겁게 튀김과 맥주를 해치우고 나니 약속 시간까지는 애매하게 시간이 남아 다시 해변으로 돌아가기도 그렇고 날이 너무 더워 지치기도 해서 우리는 그만 주차장으로 돌아가기로 했다. 주인 아저씨께 전화해서 일찍 데리러 와 달라고 하려고 했는데 이게 웬일, 남편의 휴대폰 신호가 잡히지 않았다. 휴대폰 문제인가 했는데 내 것도 마찬가지였다. 문자는 커녕 인터넷도 되지 않았다. 당황한 우리는 바의 사장님께 여쭤 봤는데 사장님도 당황스럽다며 좀 전에 갑자기 이 지역의 통신이 다 끊겼다고 하셨다. 안테나 문제인 것 같은데 그 때문에 카드 결제도 안 된다고. 우리는 가지고 있던 현금을 다 꺼내서 계산을 하고 다시 테이블에 앉아서 주인 아저씨가 오실 때까지 한 시간 넘게 기다릴 수밖에 없게 됐다. 아.. 이럴 줄 알았으면 해변에 좀 더 있는 건데!


  아무리 여행 중에는 예상 못 한 일들이 일어난다지만 하필 이 타이밍에 온마을의 다 통신이 끊기다니 황당했다. 어떻게 이렇게 되는 일이 없지, 푸념을 하려다 입에서 나오는 말을 바꾼다. "Così è la vita!(꼬지 엘라 비타!)" 남편도 어깨를 으쓱하며  ‘그러게’ 하는 표정을 지어 보인다. "Così è la vita!"는 우리가 여행을 하면서 예상치 못한 일로 실망하거나 속상할 때 가볍게 넘기기 위해서 내뱉는 말이다. '이런 게 인생이지, 인생이 다 그렇지~'라는 의미의 이탈리아어인데, 이럴 때 소리내어 내뱉으면 마음을 진정시키는 데 꽤 효과가 있다. 어쩐지 별일이 아닌 것처럼 느껴진다. 인생은 원래 그런 거니까. 그러고 생각하니 그나마 약속 시간을 미리 정해서 다행인 거다. 그러니 인생이 마음대로 풀리지 않을 때, 섣불리 좌절하거나 푸념하기보다 어깨를 으쓱하며 말해 보자. 별일 아니라는 듯이.


 "Così è la vita!(꼬지 엘라 비타!)"





https://tumblbug.com/chomare_italia


오랜만에 다시 글을 써요. 여행기 앞으로도 꾸준히 올리려고 합니다. 기다려 주셔서 감사해요!

그리고 첫 번째 브런치북 <낡은 캠핑카로 이탈리아를>을 다듬어 전자책을 제작했어요. 텀블벅에서 10월 27일까지 펀딩 중이니 많은 관심 부탁드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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