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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서로

기억의 강물

첫 번째 교환독서: 마쓰이에 마사시, <가라앉는 프랜시스>

by 밤비



옥대장님께.


편지 잘 받았어요. 기꺼이, 행복한 마음으로 옥대장님의 초대를 받아들이고 싶어 졌답니다. 그 시절의 옥대장님을 만난다면 우리는 어떤 모습으로 무엇을 주고받을 수 있을까요.


조금 전 책의 마지막 장을 덮었습니다. 읽는 내내 하고 싶은 이야기들이 화수분처럼 쏟아져 정신이 아득했는데 막상 마지막을 마주한 지금, 저는 소리를 잃고야 말았습니다. 침묵 같은 숨결만이 외로이 새어 나옵니다. 키이라 나이틀리와 샘 워싱턴 주연의 영화 <라스트 나잇>의 엔딩 앞에서 느꼈던 것과 비슷한 감정이 저를 잠식합니다. (이 영화, 언제고 꼭 같이 한 번 보아요.)


최근 읽었던 책들 중 가장 감각적인 연애소설이 아니었나 싶어요. 동시에 온몸을 훑고 지나간, 쓰나미 같은 그 서사는 그저 '연애'만은 아니었을지 모른다는 생각도 해 봅니다. 읽는 내내 풋풋하고 가벼운 설렘보다는 어둡고 무거운 불안을 더 강렬하게 느꼈습니다. 그 슬픈 감정의 소용돌이에 잠식당하곤 했지요. 깊은 심해로 가라앉을 거라는 결론을 훤히 알면서도 끝없이 항해할 수밖에 없는 한 척의 배가 된 기분이었어요.



"형태가 있는 것은 언젠가 사라져 버리지만, 사라진 것은 형태를 잃음으로써 언제까지고 남지요. 나한테 보이는 것은 그런 거예요. (...) 여기는요, 그러니까 누구한테도 목적지가 아닌 셈입니다. 태곳적부터." p. 101



사라짐으로써, 형태를 잃음과 동시에 비로소 존재할 수 있는 것들에 대해 떠올리는 시간이 더없이 좋았습니다. 결국은 '기억'이라는 소실점으로 귀결되고야 마네요. 우리의 몸에 아로새겨진 무수한 기억의 흔적들을 톺아보게 됩니다. 각자가 지나온 모든 순간들에 대해 구구절절 설명하지 않아도, 직접 바라보지 않아도 느낄 수밖에 없는 감정들이 거친 강물이 되어 흘러넘치는 걸 느낍니다. 어쩌면 우리는 첫 만남에서부터 서로의 그 강물을 또렷하게 읽어냈던 건지도 모릅니다.



이 빛이 있는 동안은 절대로 절망할 필요가 없어. 빛에서 오는 음을 듣는 귀를 잃지만 않으면 가즈히코와 나는 살아갈 수 있어. 게이코는 그렇게 믿었다. p. 190



서로의 강물을 바라보고 어루만질 수 있는 온기를 잃지만 않는다면, 우리는 계속해서 함께일 수 있다고 굳게 믿어요. 저는 결코 그 언젠가의 옥대장님 곁에 가 닿을 수 없겠지만 지금 제 곁의 옥대장님과 나란히 서 있을 수는 있지요. 같은 곳을 바라보고 함께 서 있는 우리에게는 이미 흘러버린 과거와 앞으로 흘러들어올 미래가 다시끔 길게 펼쳐질 겁니다. 그 아득하고도 슬픈 풍경을 저는 오래토록 간직하고 싶습니다.


오늘도 옥대장님 몰래, 애정 어린 마음 한 스푼을 흘려보냅니다. 옥대장님 기억의 강물에 작디작은 파동이 전해지리라 믿으면서요. 입 밖으로 꺼내는 순간 휘발되고 말 것 같은 말들을 애써 삼킵니다. 기나긴 말 대신 침묵 같은 여운을 조용히 보내봅니다. 서로의 온기에 기대어 잠시 멈추고 싶습니다.


다시 또 함께 펼치게 될 책과 편지들을 기다릴게요. 우리는 또, 고요하게 서로를 마주할 겁니다.


밤비 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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