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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밤비 Oct 18. 2023

일단, 어디로든 출발해 볼까요?

8월부터 11월까지, 몹시 길고 여유롭게 즐기는 불꽃 축제

8월에 출발했는데, 여전히 여행 중



출발. 퍽 마음 설레는 단어다. 시작, 설렘, 처음, 기대, 상상 같은 단어들이 동시에 반짝반짝 불이 켜진다.



우리의 기억을 설명하기 위해 제안된 모형들 중 의미 망 모형(semantic network model)이라는 게 있다. 머릿속에 저장되는 개념, 의미, 정보는 하나가 단독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 둘 간의 관계성에 따라 가깝게 혹은 멀게, 진하게 혹은 옅게 얼기설기 엉켜있는 거미줄처럼 올망졸망 맞닿아있는 것이다. 규칙적이고 체계적이어서 심지어 아름답기까지 한 거미줄보다 덜 체계적일 수도, 더 체계적일 수도 있다. 모든 사람들 머릿속에 담긴 이 기억의 거미줄은 제각기 다르다. 그 누구 하나 똑같은 기억의 실타래가 없다. 



어쨌든, 내 머릿속 거미줄에서 '출발'이라는 단어에 불이 켜지면, 그 주변에서 덩달아 같이 반짝이는 것들이 있는데 그게 처음 말한 단어들인 셈이다. 그뿐이랴. 이내 조금 더 멀리 있지만, 그래도 출발과 관련된 다른 정보들도 희미하게 불을 밝히기 시작한다. 그와 같이 저장된 심상, 촉각, 후각, 청각 같은 것들도 함께 들썩인다. 








그런 의미에서 여행을 참 좋아한다. 여행에는 항상 출발이 함께 한다. 출발 없는 여행은 없다. 설레지 않을 수가 없다. 그렇다면 여행에서 출발은 언제를 말하는 걸까. 비행기나 기차, 자동차를 타고 여행지로 나서는 순간? 아니면 집 현관문을 나서는 순간? 그것도 아니면 여행을 가려고 짐을 꾸리는 순간? 



내게 여행의 출발은 여행을 마음에 떠올리는 그 순간부터다. 혼자 여행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이미 나는 그 여행지 어딘가에 서 있다.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고서는 그 출발이 더 풍부해졌다. 예컨대, 아이의 겨울방학에 일주일 정도 세부에서 시간을 보낼까, 고민을 해 보았다고 치자. 이런 내 생각을 아이와 남편에게 전한다. 둘의 마음속에도 몽글몽글 설렘이 피어오른다. 특별한 현실적 제한이 없다면 나의 이 사소한 바람은 본격적으로 현실적인 계획이 된다. 비행기 티켓을 아직 예매도 하기 전인데, 아이는 벌써 세부의 어느 바닷가에서 헤엄을 치고 있다. 남편은 나와 스노클링을 즐겼던 그 예쁜 바다에서 하루 종일 동동 떠다니느라 이미 등이 발갛게 익은 듯한 표정이다. 나는 지난번 세부 여행에서 받았던 달큼하고 노근노근한 마사지를 받고 있다. 우리 세 식구 모두의 마음에 여행이 반짝이고, 제각기 여행의 출발이 시작된다. 








8월쯤이었나. 남편이 다짜고짜 카톡으로 링크 하나를 보내왔다. 복잡한 표와 빼곡히 적인 글씨 사이로 불꽃축제 사진이 큼지막이 박혀있다. 아니나 다를까. 문서 제목에 '제18회 부산 불꽃 축제'가 섞여 있다.



부산에서는 매년 1회, 불꽃 축제가 열린다. 부산에서 오랜 기간 살았어도 단 한 번을 가 보지 않았다. 여름휴가로 굳이 해운대 바닷가에서 해수욕을 하지 않는 것과 같은 원리다. 축제 당일, 복잡한 인파와 교통체증은 물론이요, 제대로 불꽃놀이를 관람하기란 영 쉽지 않음을 알기 때문이다. 그 언젠가, 아무 생각 없이 대학교 건물 옥상에 있다가 거의 파리만 한 크기로 반짝이는 불꽃 축제를 관람한 게 전부니 말 다 했다. 그런데 불꽃 축제라니. 이 사람 제정신인가 싶었다. 



남편이 보내온 것은 일본 여행 프로그램이었다. 찬찬히 내용을 읽어보니 남편의 큰 그림이 무엇인 지 알 것 같아 이내 웃음이 나온다. 부산에서 일본 후쿠오카로 가는 방법은 여러 가지다. 비행기를 타고 갈 수도 있고, 배를 타고 갈 수도 있다. 배 중에는 밤에 승선해서 다음날 아침에 하선하는 것이 있고, 3~4시간 만에 가는 쾌속선이 있다. 남편이 보내온 것은 전자였다. 그런데 부산항에서 배를 타고 일본으로 향해 출발하는 날짜가 11월 4일, 제18회 부산 불꽃 축제 당일이다. 여행사가 몹시 영리한 프로그램을 만든 것이다. 기왕 일본으로 가는 배가 뜨는 김에 불꽃 축제도 관람할 수 있도록 했다. 어차피 부산에서 일본 후쿠오카 항구까지는 금방 간다. 아침, 항구의 세관이 열리는 시간까지 정박한 채로 배 위에서 하룻밤을 보내는 셈인데 바닷가에 조금 더 여유롭게 머물며 불꽃놀이를 관람한다고 해서 문제 될 것은 없다. 



행동파 남편은 좋다는 뜻의 내 이모티콘이 대화창에 뜨자마자 바로 예약을 진행했다. 함께 떠날 여행 메이트 가족도 섭외했다. 그리고 어땠겠는가, 우리 세 식구의 11월 일본 여행은 벌써 출발길에 올랐다. 8월 초부터 말이다.








10월이다. 아직 여행까지는 약 한 달이 남았다. 8월부터 지금까지, 여전히 나는 여행의 연장선에서 자주 설레고, 또 자주 행복하다. 아이도 마찬가지다. 게다가 최근 다녀온 곳이 후쿠오카라 그런지 아이의 머릿속에는 제법 선명하게 후쿠오카 도심의 길거리와 풍경과 음식들이 동동 떠오르는 모양이다. 참으로 길고 긴 여행이다. 정작 정확한 여행 일정은 2박 3일에 불과한데, 우리는 8월부터 11월까지 기나긴 여행을 즐긴다. 



그럼 여행지에 본격적으로 이동을 할 때, 혹은 목적지에 도착했을 때 오히려 김이 새지 않느냐고 물을 수도 있다. 아니다. 그간 머릿속으로만 다녔던 공간에 직접 서 있는데 더 신나고 즐거우면 모를까, 김이 샐 일은 전혀 없다. 오히려 더 풍부하게 일정을 만끽할 수 있다. 심지어 내 평생 첫 불꽃 축제. 지긋지긋하다고 고개를 저었던 부산 사람이지만, 사실 솔직히 내 머리에는 벌써 몇 번이고 불꽃이 펑펑 터졌다. 막상 선상에서 불꽃을 본다고 하니 제법 기뻤다. 








그리고 하나 더. 최근에 얻은 통찰이 있다. 이 출발이 꼭 새로운 곳으로 향할 때만 설렘, 기대 같은 것을 불러일으키는 것이 아니라는 것. 우리 가족은 최대한 여행지에서 현지인처럼 일상을 느긋하게 누리는 것을 선호하는데, 그렇게 일정을 보내다 보면 매우 짧은 기간 안에 어느 정도 현지화되는 묘한 경험을 하게 된다. 이제 그러면 집으로 돌아오는 길이, 집을 향해 출발하는 그 길이 또 다른 여행이 된다. 익숙하고 지겹게만 느껴지던 그곳으로 다시 돌아가는 데, 이상하게 설레고 기다려진다. 그리고 실제로 마주하는 모든 풍경이 익숙한 듯 낯설고, 편안한 듯 불편한 진귀한 경험을 하게 되는 것이다. 여행을 다녀온 후 얼마간은 여행하듯 일상을 살게 된다. 낯선 곳으로 떠나는 짧은 일정 하나에 퍽 오랜 기간 나의 삶은 풍요롭다. 이것이 내가 여행을 사랑하는 이유다. 



이 글을 쓰는 동안 내가 그러했던 것처럼, 이 글을 읽는 그대들의 머릿속에도 거미줄 속 다양한 기억들이 반짝반짝 불을 밝혔으리라 기대해 본다. 그 반짝임이 지친 일상 속에 에너지가 되었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겠다. 그 어디로든 출발해 보기를 바란다. 머릿속 상상과 동시에 기나긴 여행을 즐겨보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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