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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밤비 May 02. 2024

단편소설: 역사(轢死)

우리 모두에게 던지듯 보내는 목소리



오늘만 벌써 다섯 번째. 날카로운 굉음과 함께 스키드 마크(skid mark)를 남기는 경우도 있었고, 주의를 기울이지 않으면 알아차리지 못할 만큼 작고 둔탁한 소리만 허공에 외로이 울리는 경우도 있었다. 직선으로 뻗은 일차선 도로가 가장 잘 보이는 언덕 위, ‘온’은 그 곳에 우두커니 앉아 머리 위로 ‘어째서’라는 물음표를 띄운 채 한동안 자리를 지켰다. 들이마셨던 숨을 천천히 길게 몰아 내쉬자 코끝으로 하얀 김이 새어나왔다. 지금처럼 추운 겨울이면 그 수가 유난히 급격하게 늘었지만, 끝을 모르고 계속해서 영하로 치닫는 기온 덕에 주변에 고약한 냄새를 풍기기까지는 상대적으로 오랜 시간이 걸렸다. 어쨌든 분명히 매 순간 떠나는 이들이 있거늘, 그들을 손수 배웅하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어둠 때문인지, 추위 때문인지, 아니면 무관심 때문인지 이유는 알 수 없었다. 온은 그 공간을 바라보며 아무도 알지 못하는, 흔적조차 없는, 그러나 분명하게 그어진 날카로운 경계가 존재하는 것 같다고 생각했다. 느릿느릿 기지개를 켜곤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저 멀리서부터 천천히 동이 트고 있었다. 집으로 돌아가야 할 시간이었다. 산등성이 너머로 회남색 하늘을 밀어내며 솟아오르는 주황빛이 꼭 노을처럼 보이는 시간이었다.     

 

 

새벽녘, 고독한 외출을 끝마친 온은 조용히 이불을 파고들었다. 그의 움직임을 느낀 미연은 잠결에 미간을 좁히다 말고 금세 온을 가볍게 끌어안았다. 온에게서 푸른 새벽 내음이 가득 풍겼다. “오늘은 또 어딜 다녀 온 거야.” 눈을 감은 채로 깊게 잠긴 목소리로 웅얼거리는 미연의 볼에 머리를 기댔다. 잠이 많은 미연이 일어나기에는 이른 시간이었다. 말없이 가만히 기다리면 이내 깊게 잠들 터였다.      

 

 

이 오랜 산책의 시작은 우연이었다. 지난 달 제주도로 출장을 떠난 미연은 사흘 간 집을 비웠다. 넓은 집 안을 홀로 마음껏 뒹굴 거려 보아도 외로움은 쉬이 지치지 않고 온을 괴롭혔다. 잠들지 못하던 둘 째 날 밤, 막연히 집을 나와 동네를 한 바퀴 돌았다. 미연과 함께 몇 번 걸었던 산책로였는데, 이렇게 늦은 시간에, 그것도 혼자 돌아다니는 것은 처음이었다. 집을 나서면서부터 잔뜩 경계하며 웅크렸던 어깨가 그만 부끄러워져 조심스레 힘을 뺐다. 혼자 하는 산책도 퍽 나쁘지 않았다. 어둠이 세상을 모조리 삼킨 것만 같은 밤이었어도 가로등 불빛만은 홀로 골목 어귀를 환하게 비추는 다정한 고요함이 좋았다. 콧노래를 불러가며 걷다가 그만 제법 멀리까지 나온 걸 알아차렸을 때에는 좁은 일차선 도로가 한 눈에 내다보이는 마을 뒷산 중턱까지 오른 뒤였다. 그리고 그 때 보았다. 얼룩진 도로의 실상을. 그 허망하고 쓸쓸한 흔적들을. 골목 어귀까지 다정하게 비추어 주던 가로등 불빛이 그 곳에는 없었다. 칠흑(漆黑)같은 어둠이 전부였다. 그 뒤로 온은 잠들지 못하는 밤이면 그 곳을 찾았다. 아무도 알아주지 않아도, 마지막 길이 춥고 외로울 그들을 위한 자신만의 작별의식이었다.     

 

 

오늘도 온은 언덕을 올랐다. 이제는 나름 최단거리로 그 자리에 도달하는 온만의 지름길도 생겼다. 그 때였다. 온의 가벼운 발걸음 너머로 다시 또 한 번, 굉음이 울렸다. 유난히 길게 이어지는 소리. 타이어가 도로를 길게 할퀴며 멈추어 섰다. 온은 귀를 발록거렸다. 다시 출발해야 할 자동차 바퀴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달달달, 낡은 엔진 소리가 묵직하게 주변을 에워쌌다. 온은 눈을 가만히 깜빡였다. 오랜 밤 산책 중, 처음 맞닥들이는 광경이었다. 운전석에서 누군가 내렸다. 덩치 큰 남자의 실루엣이 헤드라이트 앞으로 일렁였다. 조수석에서도 문이 열리려는 찰나, 다급히 몸을 돌린 남자가 성큼성큼 차로 돌아갔다. “아무것도 아니야, 잘 못 봤어. 고라니였나봐.”라는 말소리가 들렸다. 차 안에서는 칭얼거리는 아기의 울음소리도 들렸다. 짙게 깔린 고요 너머로 다시 차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몹시 짧은 순간이었지만 작은 희망과 기대로 반짝였던 온의 눈동자에 실망 어린 기운이 길게 드리웠다. 다시 또 어둠만이 내려앉은 골목, 온은 마지막 흔적을 찾아 눈을 재빨리 굴렸다. 거칠고 둔탁한 소리의 원인이 모습을 드러냈다. 도로 가장자리에 하얀 머리칼의 노인이 기이한 형체로 쓰러져 있었다. 신발이 벗겨진 채였다. 그저 우리만의 문제는 아니었던 건가, 온은 알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늘 그랬듯 눈을 느리게 깜빡이며 말없이 묵도(默禱)했다.       

 

 

다음 날, 온과 함께 길을 걷던 미연이 혀를 찼다. 길가에는 지난 밤 사고의 목격자를 찾는다는 플랜카드가 걸려 있었다. 미연은 어떻게 사람을 치고 그냥 달아날 수가 있냐고 볼멘소리를 냈다. 온은 미연의 품에 안겨 아무런 말을 하지 않았다. 헤드라이트 모양이 특이한 하얀색 SUV였다고, 자신이 그 노인의 마지막을 끝까지 배웅해 주었다고 말하고 싶었지만, 미연이 알아들을 리 만무했다. 머리를 쓰다듬는 미연의 손길을 느끼며 온은 다시 또, 새로운 물음표를 하나 더 띄웠다. 나의 친구들은 더 자주, 더 많이 그렇게 떠났는데 왜 아무도 그들을 찾지 않았는지, 왜 아무도 슬퍼하지 않았는지 묻고 싶어졌다. 답을 알 길 없는 외로운 의문이었다. 온은 혀를 내밀어 자신의 앞발을 핥았다. 입 안이 썼다.           

 

 

* 역사(轢死): 차에 치여 죽음. 

* 로드킬(Roadkill): 동물이 도로에 나왔다가 자동차 등에 치여 사망하는 사고(=동물 역사)

* 뺑소니(Hit-and-Run): 자동차 등을 운전하여 사람을 사상하거나 물건을 손괴(= 교통사고)한 자가 구호, 인적사항 제공, 신고, 병원 이송 등의 적절한 조치를 취하지 않고 도주하는 범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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