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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밤비 May 21. 2024

에세이: 어떤 오랜 기다림

나와 당신, 우리 모두에게 남겨진 목소리


그 어떤 매체로도 영상을 잘 보지 않는다. 활자를 더 애정하고, 직접 만지고 볼 수 있는 대상들을 선호하다 보니 영상은 자꾸만 우선순위에서 밀린다. 내게 유튜브는 라디오와 별반 다를 것이 없다. 유튜브를 본다는 것은 곧 '소리'에만 의존하는 시청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물론 듣고 싶은 이야깃거리나 노래를 찾는 시간만큼은 그나마 섬네일은 '눈으로' 본다.)


오늘 새벽이었다. 벌써 2시. 그대로 눈 감고 푹 잠들면 좋겠건만, 습관적으로 유튜브 앱을 열었다. 점점 무거워지는 눈꺼풀 사이로 듣고 싶은 소리들을 찾았다. (기억나지 않는 그 언젠가부터 잠자리의 적막함이 불편하게 느껴졌다. 숙면에 도움이 된다는 백색 소음부터 다양한 연주곡과 노래도 들어봤지만 소용없었다. 다행히 답을 찾았다. 일정한 데시벨로 자분자분 흐르는 사람 말소리를 들어야만 편히, 그리고 금세 잠든다는 걸 알게 됐다.) 즐겨 듣는 유튜버들의 새로운 영상물이 올라온 게 없는지 배회하던 바로 그때였다.


우연처럼, 선물처럼 알고리즘을 타고 낯선 영상 하나를 만났다. 

아니, 내가 만난 것은 어떤 이의 오랜 기다림이었다.





1928년, 프랑스 소르본대학. 구술 아카이브 스튜디오*에 결연한 걸음으로 입장했을 왜소한 동양인 남자. 그가 택한 것은 호화롭고 유유자적한 여행길이 아니었다. 지금의 우리는 감히 상상할 수조차 없는 지난하고 머나먼 여정이었을 터. 고단하고 척박했을 이동이었음에도 그는 품에 안은 단 하나의 목표만을 생각했다. '조선어를 기록해야만 한다. 조선어가 사라지는 한이 있더라도 언젠가, 누군가는 꼭 이 음성을 듣고 기억해 주리라.' 일제의 탄압에 조선의 말, 한글이 사라질지도 모른다는 절박함이 그를 이 곳 스튜디오 작은 마이크 앞으로 이끌었다. 타는 듯 한 긴장 속에 그의 메마른 입술이 열렸다.


"조선 글귀와 조선 말소리."


결연하고 다부진 음성. 또박또박 한 글자, 한 글자에 싣는 뜨거운 애국심과 사명감.


"이제 쓰는 조선 글씨는 조선 임금 세종이 서력 1443년에 대궐 안에 정음궁을 열고 여러 학자로 더불어 연구하신 끝에 온전히 과학적으로 새로 지어진 글씨인데 서력 1446년 안팎에 되었습니다."


한글에 대한 간략한 설명에 이어 자음과 모음 하나하나를 끊어 읽는 소리가 이어진다. 언어학자이자 독립운동가였던 이극로가 머나먼 나라에서 남긴 귀한 목소리. 100년의 시간을 거슬러 그의 염원이 내 귓가에 닿았다. 아니, 심장 가까운 깊숙한 곳에서부터 거대한 진동으로 울려 퍼졌다.






약 4분 10초. 이극로의 음성이 기록된 시간. 긴장으로 얼룩진 미세한 떨림을 누르며 모두에게 호소하듯 기록한 한글. 그 시간만큼은 단 한순간도 눈을 떼지 않고 영상을 응시했다. 시나브로 피어오른 눈물꽃이 베갯잇을 흥건히 적셨다. [2011년 프랑스 국립도서관 아카이브에서 발견된 이 자료는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한국어 음성 자료가 됐다.]는 자막을 마지막으로 영상이 끝나자, 몰아쉬듯 참고 있던 숨을 거칠게 내쉬었다.


두 눈에 빛이 돌았다. 이미 잠이 멀리 달아났지만 상관없었다. 긴 세월의 간극을 뛰어넘어 내게 닿은 누군가의 활자들만을 보석처럼 생각했던 내 세계에 반가운 균열이 생겼다. 그 틈을 비집고 언어학자 이극로의 간절한 음성이 반복해서 흐른다. 누군가의 어떤 오랜 기다림이 오늘 새벽 내 발끝에 사뿐 내려앉았다. 이대로 밤을 지새운다고 해도 관계없을, 충만한 마음이 차오른다. 




* 구술 아카이브 스튜디오: 각국의 언어와 방언, 설화 등을 보존하는 기관


https://youtu.be/hyzvfVuLCLQ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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