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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상연 Jan 24. 2023

데이터로 보는 한국의 민주주의 4

제20대 대선. 투표의 목적과 공약의 의미

자, 이제 정답을 확인해 보자. 여러분의 정답률도 점검해 보기 바란다.     


실현가능한 탄소중립과 원전 최강국 건설 (윤)

어르신, 환자, 장애인, 아동, 영유아 돌봄 국가 책임제를 통한 국민안심 국가 실현 (이)

과학기술 5대 강국 실현과 미래인재 양성, 공교육 내실화를 위한 대전환 (이)

당당한 외교, 튼튼한 안보 (윤)

수요에 부응하는 주택 250만 호 이상 공급 (윤)

과학기술 추격국가에서 원천기술 선도국가로 (윤)

311만 호 주택공급으로 내 집마련 및 주거안정 실현. 함께 잘사는 균형 발전 (이)

지속 가능한 좋은 일자리 창출 (윤)

일하는 사람들의 권리보장과 일자리 대전환으로 성장하는 사회 실현 (이)

청년이 내일을 꿈꾸고 국민이 공감하는 공정한 사회, 여성가족부 폐지 (윤)

스마트 강군 건설, 실용외교로 평화안보 실현 (이)

문화강국 실현과 미디어산업 혁신 성장 (이)     


독자의 정답률은 50%에서 얼마나 먼가. 지난여름 세미나 발표에서 청중에게 같은 질문을 한 적이 있었는데, 정확한 수치를 내지는 않았지만 모두 어려워했던 것을 기억한다. 그렇다면 공약 판별 정확도가 이렇게 낮은 이유는 뭘까.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으나 문제의 근원은 두 갈래로 나눠 생각해 볼 수 있을 것 같다.     


하나는 유권자의 정치적 관심 수준이다. 정치적 관여도가 낮다면 공약의 중요성 자체에 대해서는 알고 있다 하더라도 각각의 공약이 누구의 것인지, 각 공약의 정책적 함의가 무엇인지 잘 모를 수 있다. 이는 고도화된 산업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어찌 보면 매우 당연한 일일 수 있다. 도시화와 분업화로 점점 많은 사람들이 특화된 영역에서 하루하루 바쁘게 살아간다. 나에게 닥친 하루하루를 살아내는 것도 벅찬데, 정책으로의 이행 가능성도 미지수인 추상적 비전들에 대해 일일이 공부할 시간은 없다. 정치인과 행정가들이 전문성과 선의를 가지고 국정 운영을 ‘알아서 잘’ 해줄 것으로 믿는 편이 낫다. 반대의 경우도 결과는 마찬가지다. 양당 모두 적당히 무능력하고 적당히 부패해 있으니, 어느 후보가 대통령이 되든 내 삶에 큰 변화는 없을 것이라는, 다소 현실적이고 냉소적인 믿음이 그것이다. 13대(노태우, 1987년), 14대(김영삼, 1992년), 그리고 15대(김대중, 1997년)에 걸쳐 항상 80%를 상회하던 투표율이 14대(노무현, 2002년)를 기점으로 70%대로 하락한 것이 이러한 민의를 반증하는 것일 수도 있다. 물론 이 민의의 방향을 확인할 만한 데이터는 가지고 있지 않다. 다만 변화에 대한 기대감과 우리가 체감하는 정치적 영향력이 점차 약해지고 있음은 확실해 보인다. 나는 투표율이 곧 50% 미만이 되길 바란다. 정치인의 약속에 기대지 않고 자신의 삶을 독립적으로 영위할 수 있는, 개인이 승리하는 안정되고 차분한 시대가 열리길 희망한다.     


다른 하나는 공약의 정체성과 거기서 오는 차별성이다. 정치에 관심이 있다고 한들, 공약이 전부 그 밥에 그 나물이라면 이를 어찌 구분하랴. 위의 12개 공약을 다시 한번 살펴보자. 보수와 진보, 윤석열과 이재명의 정치 이데올로기를 명확히 구분 짓는 공약은 몇 개인가. 윤석열의 경우, ‘원전 최강국 건설’, ‘튼튼한 안보’, 그리고 ‘원천기술 선도국가’ 등 여섯 개 중 세 개 공약은 보수의 이념이 엿보인다. 이재명의 공약 중, ‘돌봄 국가 책임제’, ‘일하는 사람의 권리보장’, 그리고 ‘311만 호 주택공급으로 균형 발전’ 등 역시 세 개가 진보의 이념에 가깝다. 윤석열의 ‘250만 호 주택공급’, ‘지속가능한 일자리 창출’, ‘청년이 내일을 꿈꾸는 공정사회와 여가부 폐지’, 이재명의 ‘과학기술 강국 실현과 공교육 내실화’와 ‘문화강국’, 그리고 ‘스마트 강군과 평화안보’는 이념적 성격이 다소 모호하거나 진보와 보수의 이념이 한데 겹쳐 누구의 공약인지 확신하기 어렵다. 응답자 대부분이 각 후보가 속한 정당, 그리고 양당이 각을 세워온 이념적 대척점들(예를 들어, 성장과 분배, 자유와 평등)에 대해 익숙하다면, 평균 공약판별 정확도는 약 50%로 추측이 가능하며, 이는 우리가 이전 글, [데이터로 보는 한국의 민주주의 3]에서 확인한 수치에 매우 가깝다.      


내가 20여 년의 연구경험을 통해 뼈저리게 배운 것 하나는 이처럼 데이터에 기반하지 않은 어쭙잖은 해석은 대개 틀린다는 것이다. 아래 차트를 보자. 각 공약의 판별 정확도를 지지 후보에 따라 다른 색깔의 막대그래프(윤석열 지지자 = 붉은색, 이재명 지지자 = 푸른색)로 표시하였다. 위의 여섯 개가 이재명의 공약이고, 아래 여섯 개가 윤석열의 공약이다. 이재명의 공약에 대한 지지후보별 판별 정확도는 큰 차이를 보인다. 이재명 지지자들이 이재명의 공약을 맞출 확률(상단 푸른 막대 여섯 개)은 약 53%에서 74% 정도로 높은 반면, 윤석열 지지자들이 이재명의 공약을 맞출 확률(상단 붉은 막대 여섯 개)은 약 1/3 정도인 15%에서 25% 사이로 매우 낮다. 윤석열 후보의 공약에 대한 집단 차는 미미하다. 이재명 지지자의 경우(하단 푸른 막대 여섯 개) 11%에서 32%, 윤석열 지지자의 경우(하단 붉은 막대 여섯 개) 14%에서 34%로, 두 집단 모두 윤석열의 공약을 맞출 확률은 전반적으로 낮다. 



종합해 보면, 윤석열 지지자들의 경우, 그것이 누구의 것이든, 대선 공약 전반에 대한 이해가 상대적으로 낮다는 결론을 내릴 수 있다. 아마도 이것은 ‘공약 무용론’에 기반한 듯 보인다. 앞서 [데이터로 보는 한국의 민주주의 2]에서 윤석열 지지자들이 ‘공약’이나 ‘경제’보다는 ‘인성’, ‘사람 됨됨이’, 그리고 ‘정권교체’와 ‘공정’을 위주로 투표했다는 사실을 기억해 보면 이들의 이러한 반응을 이해할 수 있다. 전 정권의 내로남불에 대한 실망으로 오로지 정권교체 자체만을 원했다면 후보 공약의 이념적 아이덴티티나 차별성은 그리 중요하지 않을 수 있다. 정권을 심판할 수 있는, 상대적으로 정치에 때가 덜 탄 (혹은 그럴 것으로 기대되는) 검찰 경력의 후보자를 원할 수 있다. 그의 공약이 황당할 정도로 이상하지만 않다면 말이다.     


이재명 지지자들의 경우, 이재명 후보의 공약이 무엇인지 상대적으로 잘 가려냈다. 흥미로운 것은, 이들이 윤석열 후보의 공약은 이재명의 그것과 잘 구분해 내지 못했다는 것이다. 이상하다는 생각이 든다. 누군가에게 네 발 달린 동물의 사진을 들이밀며, “이게 개인가요, 고양이인가요” 하고 물었을 때, 개를 고양이로, 혹은 고양이를 개로 오판했다면, 이 사람은 개와 고양이 둘 다 모를 확률이 매우 높다. 마찬가지로 윤석열의 공약을 잘 모른다는 것은 이재명의 공약 역시 잘 모른다는 뜻이 된다. 이재명의 공약만 ‘제대로’ 알고 있었다면, 이재명의 공약이 아닌 것을 윤석열의 공약이라고 답했을 것이고, 그랬다면 이재명 지지자들의 공약 판별력은 전반적으로 높았을 것이다.      


지금과 같은 응답 패턴을 설명할 수 있는 쉬운 이론이 하나 있다. 독자 여러분도 학창 시절 종종 해보았을 “밀어찍기”. 정답이 둘 중 하나인 문제가 여럿인 경우, 눈 딱 감고 한 옵션만 쭉 선택하는 방법이다. 물론 선생님께서 은혜롭게도 정답을 반반으로 나누어주셨다면 승률이 절반은 된다. 우리 서베이에서 12문제 중 각 후보의 공약이 6개씩 있었으니, 한 후보만 주욱 밀어 찍으면 정답률 6/12, 딱 50%다.      


이를 확인해 보기 위해 각 지지자 집단별로, ‘윤’의 공약을 ‘이’의 것으로 답한 빈도수를 살펴보았다. 아래 차트의 첫 번째 막대부터 해석해 보자. ‘윤’의 공약을 ‘이’의 것으로 한 번도 오판하지 않은 응답자 수가 윤석열 지지자 중 329명(막대의 붉은 부분), 이재명 지지자 중 93명(막대의 푸른 부분)이 있다는 뜻이다. 막대 속 붉은색과 푸른색 간 점유율 차이는 두 빈도의 합(329 + 93)에서 각각의 빈도가 차지하는 비율(윤석열 지지자의 경우, 329 / (329 + 93) = 약 78%)이므로 세의 불균형 정도를 파악할 수 있다. 모든 막대는 각 구간 내 두 빈도의 합이 100%(확률로 1.00)가 되도록 한 것이므로 그 높이는 전부 같다.      



단순 빈도수를 보면 ‘윤’의 공약을 ‘이’의 것으로 오판하는 응답자 수는, 오판의 개수가 0에서 6으로 올라갈수록 감소하는 추세를 그린다. 그러나 각 구간 내 두 집단 간 비율을 살펴보면 이재명 지지자의 퍼센티지가 압도적으로 높아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다시 말해, ‘윤’ 지지자들과 비교해 볼 때, ‘이’ 지지자들 중 ‘윤’의 공약을 ‘이’의 것으로 반복적으로 오판하는 사람들의 비중이 월등히 높다는 뜻이다. 앞서 농담처럼 꺼낸 “밀어찍기” 이론에 부합하는 데이터다. 이렇게 보면, 이재명 지지자들의 공약 판별력이 윤석열 지지자들의 그것에 비해 더 정확하다는 결론은 수정이 필요해 보인다. 물론 “밀어찍기” 이론을 확증하기 위해서는 다른 추가 데이터가 필요하고, 또 같은 데이터를 설명할 수 있는 이론은 이것 말고도 다른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으나 내 지력과 전문성, 그리고 시간의 한계로 추가분석은 안 하련다.


결론적으로, 두 지지자 집단 간 공약 판별 정확도는 큰 차이가 없다고 할 수 있겠다. 그 이유가 다를 뿐. 윤석열 지지자 집단의 경우 공약 자체에 대한 무관심과 회의가, 이재명 지지자 집단의 경우 공약 간 차별성 부족으로 공약 대부분을 이재명의 것으로 잘못 판단한 것이 데이터에서 찾은 이유다. 추측건대, 이재명 지지자들은 ‘정치공약’이라는 개념 자체에 긍정적 의미를 부여하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대선 공약은 무릇 그 이념적 토대와 관계없이 더 나은 내일을 위한 비전이라는 일반론을 견지하고 있다면, 후보자 공약에 대해 잘 모를 때, 이들 대부분을 자신이 지지하는 이재명의 것으로 판단할 개연성이 높기 때문이다. 또한, [데이터로 보는 한국의 민주주의 2]에서 파악한 바와 같이, 이들은 ‘공약’과 ‘후보자의 능력’을 위주로 투표에 임했다고 한다. 그 이유는, 대선 공약이 세상을 바꿀 수 있다는 믿음에는 이를 실행에 옮겨줄 리더의 능력에 대한 신념이 수반되기 때문인 듯 보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공약으로 뽑았다’는 이들의 응답이 ‘공약을 이해하고 뽑았다’를 의미하지는 않는다는 것은 팩트로 남는다.     


원래 이번 글에서 ‘인물로 투표하기’와 ‘공약으로 투표하기’의 함의에 대해 이야기할 계획이었는데 데이터 분석과 해석을 추가하면서 글이 예상외로 길어졌습니다. 이에 대해서는 다음 글, [데이터로 보는 한국의 민주주의 5]에서 더 써보겠습니다. 독자 여러분의 기대와 관심 부탁드립니다.


[데이터 해석의 주관성]

이 글은 한국 정치사나 정치학 이론에 대한 학습과정 없이, 데이터가 보여주는 패턴과 상식에만 의존해 제가 주관적으로 내린 해석을 담고 있습니다. 해석에 대한 반문이나 비판, 새로운 관점에서 본 재해석 모두 환영합니다. 정치에 관심이 없는 사람으로, 표현에 있어 최대한 중립적인 논지를 유지하려고 노력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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