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y
Jul 08. 2023
버팀목이 되어준 사람
P
"회사 사람들한테 마음 너무 쓰지 마라. 일할 때는 적정한 선 유지하며 사회생활 해야 해."
오래전 집안 모임, 사회생활을 오래 하신 한 어른께서 지나가듯 나에게 해주셨던 말씀.
지금보다 훨씬 이상적이고 순진했던 나는 그분의 말씀을 약간은 곡해해서 들었다.
'뭘 바라서가 아니고 내가 좋아서 하려는 일인데 왜 의도적으로 먼저 거리를 두라고 하시는 거지?'
시간이 지나서 나도 사회생활 내공이 조금은 쌓이며 그분이 해주시려던 이야기의 의미도 넓게 해석하게 되었다.
무엇보다 내가 상처받지 말라고 나를 위해 해주셨던 말씀이라는 것도 말이다.
회사생활의 인간관계에 대한 회의감이 최고조에 달해가던 작년 하반기,
P 선배와의 관계가 소원해지게 되면서 특히나 그 말씀이 더욱 머릿속에 맴돌았었다.
그만큼 그는 나의 지난 회사생활에서 비중이 큰 인물 중 한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신입사원인 해 같은 층, 다른 부서에 근무하는 그를 처음 보고 종종 했던 생각.
'와. 저 사람 보통 아니겠다.'
나도 어디 가서 덩치로 아쉬운 소리를 듣는 사람은 아닌데, 그의 덩치는 남달랐다.
복싱 체급으로 비유하면 내가 헤비급이라면 그는 슈퍼 헤비급 중에서도 상위 수준의 느낌이었다.
그리고 그의 두꺼운 몸과 더불어 아주 까칠해 보이는 눈빛.
말을 붙이면 '뭐! 인마'라고 말하며 노려만 볼 것 같은 눈빛이라 선뜻 말을 걸기도 쉽지 않은 인상이었다.
가끔 사무실 복도나 같은 층의 화장실에서 마주치면 늘 어깨를 모으고 허리를 굽혀 공손하게 인사를 했다.
물론 그에게만 그랬던 것은 아니고 각 잡힌 신입사원이었기 때문이지만, 유독 그의 앞에서 더욱 공손해졌던 것도 부인하기는 어렵다.
[영화 '범죄도시', 흥행의 주역 마동석 배우님 - 머릿속에 떠오른 싱크로율 높은 이미지]그의 거대한 몸통 안에는 그만큼 축적된 에너지도 많았다.
그는 회사의 성장이 곧 나의 성장이라는 높은 로열티 끝판왕으로 업무 해결에도 집요하고 열정적이기로 유명했고, 사내에서 알아주는 주당에다가 저돌적인 업무 추진력까지 겸비하고 있어 윗사람들에게 많은 신뢰를 받고 있었다.
신입사원이었던 내게 당시 우리 부서장님도 그의 신입사원 때 모습을 얘기하시며 열심히 하라고 말씀하시곤 했다.
막 과장이 되어 중요한 보고 숫자들을 가공하고 경영진의 의사결정을 지원하는 요직에 있었던 그는
뭔가 조직에 없어서는 안 될 행동대장이자 수문장 같은 느낌이었다.
금수강산도 변한다는 햇수 가까이 나이 차이 나는 그.
그의 입사가 조금 늦었던 편이라 실제 회사 내에서의 연차는 그보다는 조금 적게 났다.
그래도 풋내기 신입사원한테는 하늘 같은 선배님이자 범접할 수 없는 과장님이었다.
당연히 그에게 깍듯한 인사 외에는 얘기를 나눌 일도 없었고 사적으로 교류할 일도 전혀 없었다.
내가 입사 후 2년 정도 되었을 때 그가 해외 법인의 주재원으로 근무를 나가게 되었다.
전체 사무실을 돌며 작별 인사를 하는 그에게 '다음에 뵙겠습니다 (형님)!' 하며 살짝 과장하여 90도 가까이 인사를 올렸었다.
그가 웃으며 '그래 다음에 꼭 보자.'라고 말을 해줬던 게 입사 후 그와 처음으로 제대로 나눴던 대화로 기억한다.
그러다가 2년 뒤 내가 그가 있는 해외 법인의 신규 TFT 조직으로 장기 출장을 가게 되었다.
내가 맡은 프로젝트는 해외 법인이 위치한 수도에서는 떨어진 다른 도시에서 진행되고 있었다.
프로젝트에 투입되고 얼마 뒤, 해당 국가 법인장께 인사 및 현안보고 차 법인 사무실 건물로 현지에서의 첫 출장을 갔을 때였다.
법인에서 보내준 현지기사의 안내를 받아 사무실 건물로 도착했을 때 나를 처음으로 맞아준 한국인이 그였다.
인사를 드리고 저를 기억하시냐는 물음에 껄껄 웃으며 '인사성 밝은 친구'로 기억한다고 답했다.
그는 내가 대기하거나 일정이 비는 시간 동안 시설 여기저기를 소개해 주고 본인이 업무를 봐야 할 때는 편히 쉬면서 기다릴 수 있는 공간을 마련해 주며 챙겨주었다.
지금도 그렇게 생각하지만 그는 투박한 외모와 달리 나쁘게 말하면 예민하고 좋게 말하면 아주 섬세한 성격이었다.
타지에서 프로젝트를 진행하며 업무상 그의 도움을 받을 일도 많았다.
내가 맡고 있던 주요 업무의 현지 전문가가 그의 관리소속 하에 있던 영향이 제일 컸고,
사실상 일당백을 해야 하는 해외 근무 특성상 한국에서 오는 단기 출장자 관리 등도 맡게 되었는데 그와 사전협의 및 일정을 공유해야 할 일들도 많았기 때문이었다.
내가 배치받은 프로젝트 TFT의 정식 주재원 중 한 명이자, 해당 도시에서 처음 만나 가까워진 영혼의 단짝이었던 X선배가 그와도 한국에서부터 막역한 사이였다는 게 그와 급속도로 가까워지게 된 또 다른 큰 요인이었다.
나이로든 입사 경력으로든 중간에 있었던 X선배가 가교를 놓아준 덕분에 그도 내게 더 쉽게 마음을 열지 않았나 싶다.
해외에서 처음 제대로 만났지만 업무적으로나 인간적으로나 배울 점이 많았던 선배들이었다.
근무지역이 떨어져 있던 그와는 자주 볼 수는 없었지만 가끔씩 서로 현지 출장으로 보게 될 때 퇴근 후 술 한 잔 기울이고 타지에서의 고충을 터놓으며 친분을 쌓았다.
초기 단계 프로젝트가 종료되고 나는 먼저 한국으로 복귀했고, 주재원 신분이었던 두 사람은 몇 년을 더 근무하며 남게 되었을 때의 얘기다.
어느 정도로 내가 그들을 가깝게 생각했는지 말하자면, 사비의 휴가로라도 그들을 만나러 한 번 가기 위한 구체적 계획을 세웠다.
여러 가지 이유로 좌절되었지만 그들과의 헤어짐에 대한 아쉬움이 커져갔던 시기, 그들을 만나 앞으로의 회사 생활을 위한 도원결의를 다져보고 싶었다.
삼국지를 좋아하는 내가 흥미롭게 접한 '유비 패왕설'이라는 인터넷 유머가 있다.
유순해 보이는 유비가 사실은 관우와 장비를 무력으로 제압할 수 있을 만큼 강한 사람이었고,
도원결의 시 제일 큰 형님이 되었던 건 나이 순 등이 아니라 무력 순이었다는 것이다.
나는 그를 나의 유비로 생각했고, 내가 그의 장비 같은 동생이 될 수 있길 진심으로 바랐었다.
[모바일 게임 '천하장수 유비전'(현재 서비스 종료) 광고 이미지 중]시간이 더 지나 몇 해 전, 드디어 모두가 한국에 돌아왔다.
선배들의 귀국 복귀 후 코로나라는 예상치 못한 큰 변수가 한국에도 찾아왔지만, 재회의 반가움까지 가로막지는 못했다.
코로나 사회적 거리두기 지침을 지키는 선에서 자주 함께했다.
사적인 만남에서 뿐만 아니라 업무에서도 난 그의 이야기들을 가볍게 여기지 않았다.
그가 업무상 고충을 토로한 부분에서 내가 도울 수 있는 부분이 있으면 해결을 위해 업무 외 야근을 했었던 적들도 몇 번 있다.
그도 내가 얼마나 본인을 좋아하고 진심으로 헌신적이었는지 당연히 알았을 것이다.
그와 나의 부서장을 포함해 상위 직급의 사람들이 모인 자리에서 그가 나에 대해 '받아들이지 않으면 절대 안 하지만, 받아들이면 반드시 하는 친구'라고 칭찬인 듯 칭찬 아닌 칭찬 같은 말을 했다는 것을 전해 들은 적이 있다.
당시 나의 부서장이 'P도 남을 쉽게 칭찬하는 스타일이 아닌데...'라며 나를 추켜 세워줬었다.
그가 윗사람들에게 나에 대해 좋은 이야기를 전했다는 건 다른 경로로도 들은 적이 있었다.
그때마다 인정받고 있다는 왠지 모를 뿌듯함과 그에 대한 충성심(?)이 증가했던 것도 사실이었다.
그러다가 작년에 그가 갑자기 해외로 다시 파견을 가게 되었다.
코로나의 장기화, 해외 근무에 대한 선호도 하락, 적정 인력 부족 문제 등의 복합적 요인으로
해외 복귀 후 다시 해외로 나갈 수 있는 자격을 막 갖추게 된 그가 최종 후보자로 갑자기 결정된 것이다.
자녀들의 교육과 해외 경험을 위해서 해외 생활을 내심 다시 원하고 있었던 그도 망설임 없이 결정을 받아들였다.
승승장구할 수 있는 기회를 축하하며 환송했지만 다시 시작된 그의 해외 생활은 예상했던 것보다도 훨씬 고된 종군이었다.
코로나 여파의 지속과 엎친데 덮친 격으로 전 세계에 영향을 미친 전쟁의 소용돌이 속에 그의 해외 생활은 피폐해져 갔고 가끔씩 메신저로 안부인사를 전할 때면 점점 더 예민해져 가는 그의 모습을 느낄 수 있었다.
그러다가 내 마음속에도 전쟁의 포탄이 날아오는 사건들이 생겨났다.
그는 해외 근무 부임 후 해당 국가 관할에서 새로운 프로젝트를 추진하고 싶어 했다.
새로 상사로 만나게 된 그의 법인장에게 잘 보이기 위해서였는지 정말로 그 법인장의 압박이 심해서였는지는 모를 일이지만.
개인적으로 그에게 도움이 될 수 있다면 나도 그에게 도움을 주고 싶었고 그의 추진력을 누구보다 잘 알기에 도움을 받아해 나갈 수 있다고 굳건히 믿었다.
때마침 우리 부서에서도 추진 의지가 있었고 해당 법인과 본사 조직인 우리 부서가 잘 협업한다면 좋은 결과와 시너지를 낼 수 있는 일이라고도 생각했다.
문제는 그가 본격적인 프로젝트 진행에 모든 진행 사항을 공유해 줄 것을 강하게 요구하면서도, 정작 현지에서의 조율이나 의견 요청에 대해서는 발을 빼는 모습을 보면서부터 시작되었다.
그를 이해해 보려고 많이 노력했었다.
'직접 말은 못 해도 안 좋은 평판이 있는 법인장의 비상식적 행동을 그가 오롯이 감당하고 있는 건 아닐까?
머지않아 임원 진급을 앞둔 그에게 뭐라 하든 필요한 사람은 해당 법인장일 테고, 그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 말도 안 되는 요구사항에 맞춰 칼춤 추느라 그도 힘들겠지?
내가 더 도움이 되어야 하는데 떨어져 있다고 예전만큼 적극적이거나 헌신적이지 않다고 그도 불만스럽게 느껴질 수도 있겠다.' 등등.
하지만 문제가 생겼을 때의 비난의 화살은 우리 쪽으로 고스란히 넘기면서 정작 해당 법인에서 원활히 조율해 줄 수 있는 문제에 대해서는 완벽히 성문을 걸어 잠그는 모습은 쉽게 이해하기 힘들었다.
아군이 아닌 성 밖의 적군 취급을 받는 것에는 돌이킬 수 없는 큰 내상을 입었다.
회사생활은 의리 게임을 하는 곳이 아니었는데 순진한 생각을 하고 있었다는 회의감이 커졌다.
물론 이것은 나의 입장이기에 그가 진짜 어떤 생각이었는지는 알 길이 없다.
노골적으로 그에게 현지 돌격대의 선봉장으로 서 달라는 방안도 두어 번 얘기해 봤지만 어떻게 그렇게 하겠냐며 말을 돌리는 그의 모습에 더 분위기가 애매해질 따름이었다.
글을 써보며 당시 상황을 한 걸음 떨어져 보니 오히려 가깝다는 이유로 직언한 나의 모습이 그를 더 불편하게 만들었을 수도 있다는 생각도 든다.
어느 순간에는 그도 나도 더 큰 갈등이 초래되기 전에 더 이상 깊게 묻지도 파지도 말고 적정한 선에서 대화를 하지 않는 방식을 택했던 것 같다.
"너네 부서장이랑 직접 이야기하는 부분도 있으니까 넌 빠져 있어."
그가 했던 말을 당시는 감정적으로 공격적 발언으로 받아들였었는데,
그도 나름 나에 대해 조심하기 위한 방편으로 먼저 선을 지킨 게 아닐까 싶다.
자주 연락하던 사이였지만 그 후로 한동안 그와 메신저로도 통 대화를 나누지 않았다.
그러다 얼마 전 그가 아이들 방학 겸 검진 겸 한국으로 올해 처음이자 마지막이 될 장기 휴가를 온다는 연락을 받았다.
언제 그랬냐는 듯 코로나로 인한 제약들도 모두 사라지고,
오히려 사람들로 북적이는 서울 번화가의 한 고깃집에서 그를 환영하는 추억의 모임이 열렸다.
연락도 통 안 하다가 오랜만에 보는 그와의 만남이 어색할 줄 알았는데 막상 만나니 아무 일도 없었던 듯 자연스럽고 유쾌하게 이야기들을 나눴다.
삶에 대한 변화의 의지를 강하게 드러내는 나를 보고 오히려 그는 내게 무슨 사고 쳤는지 빨리 이실직고하라고 농담 식으로 연신 협박했다.
복합적인 심정을 딱히 뭐라고 표현하기는 힘들어서, 헤어지기 전에 꼭 밝히겠노라 농담으로 계속 응수한 내게 그는 막상 헤어질 때는 아무것도 묻지 않고 악수를 건네며 '너도 잘 버텨라.'라는 말을 했다.
그러고 보면 그는 그전에도 '버텨라'는 말을 참 많이 했었다.
나도 그가 버텨온 시간들을 한번 생각해 봤다.
내가 지금의 회사를 다닌 10년.
그동안 중간관리자에 가까워지며 고민이 줄기는커녕 더 커졌다.
이미 앞서서 수많은 시간 동안 실제 중간관리자 역할을 하면서 버텨온 그.
오랜 세월을 버텨와 이제는 머지않아 임원의 문턱에 오히려 가까워지고 있다.
더 많이 가질수록, 더 좋게 누릴수록 잃었을 때의 상실감이 더 크다는 얘기를 본 적이 있다.
버텨온 시간들이 길수록 한 순간의 실패에 무너지기 쉽기에 그는 더 안간힘으로 버텨야만 했던 건 아닐까?
'왕관을 쓰는 자, 그 무게를 버티라'는 말처럼, 회사 생활에서도 위로 갈수록 아직 내가 경험하지 못한 외롭고 힘든 부분이 분명 있을 것이다.
어떻게 보면 나도 이제 머리가 더 굵어지고 있고, 한 편으로는 내가 어떻게 버텨서든 지켜내야 할 소중한 것들도 회사 내외부에서 우선순위가 바뀌고 있다.
어떻게 될지는 알 수 없지만, 앞으로 그를 예전만큼 각별하게 대할 수 있을지는 장담하기 어렵다.
그는 나의 회사생활에 예전과 같은 버팀목이 되어줄 수 있을까? 그것은 더더욱 장담할 수 없다.
그렇지만 그가 내 지난 회사 생활에 큰 영향을 준 좋은 버팀목이 되어주었다는 건 변할 수 없는 사실이다.
앞으로는 버팀목이 될 수 없더라도 서로에게 꼭 필요할 때 적정한 거리에서 선을 지켜줄 수 있는 울타리 정도만 되어줘도 늘 그랬듯 든든할 것이라 생각한다.
그럼, 앞으로도 각자의 위치에서 잘 버티어 보시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