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OurStellar Jan 11. 2024

자연과학이 주는 지혜

- 이기적 유전자를 읽고

최근 “이기적 유전자”를 매우 재미있게 읽었다. 오래전 읽다가 포기했는데, 굳은 마음을 먹고 다시 시도했다. 읽다 보니 왜 처음에 어려워했는지 이해가 안 갈 정도로 생각보다 재미있고 잘 읽혔다. 많은 사람이 읽어야 할 책 목록에 주저 없이 이 책을 추천하는 이유를 알만하다.


많은 내용이 있지만 그중에서도 내 관심을 끈 것은 “근연도(relatedness)”라는 개념이다. 생물이 자식이나 친척과 같은 혈연관계를 가진 개체에 특별히 이타적인 행위를 한다는 것은 익숙한 사실이다. 작가는 이러한 행위는 개체 내의 유전자 다른 개체 내에서 자기의 같은 사본을 알아보고, 자기와 동일한 유전자를 번영시키기 위해서라고 한다. 즉, 다시 말해서 자식은 부모로부터 산술적으로 반반의 유전자를 가지고 물려받으므로 어머니나 아버지와는 유전자 반이 동일할 수 있다. 같은 부모를 둔 형제자매 간이라면 서로 자기 몸 반의 유전자가 동일할 수 있다. 이러한 유전자의 동일한 정도를 “근연도”라고 한다. 당연히 사촌, 팔촌과 같은 촌수가 멀어지면 “근연도”는 1/4, 1/8과 같이 적어진다. 


근연도를 통해 과학자가 말하려는 것은, 사람이든 동물이든 하나의 개체가 다른 개체에 이타적인 행위를 하는 것은 똑같은 유전자가 자기 말고도 어디에 있는지를 알고, 그 개체를 위해 이타적인 행위를 하는 것이 유전자 자신을 위해 좋은 일이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즉, 부모의 사랑, 형제 자매지간의 우애가 동일한 유전자를 번영하기 위해서이지, 다른 개체나 집단을 위해 하는 것이 아니라고 하는 것이다. 즉, 유전자 자신을 위한 이기적인 행위이지, 이타적인 행위가 아니라는 의미이다.


개체의 행동을 설명하기 위한 근거로 “근연도”라는 개념은 이 책에서는 널리 활용하고 있다. 처음 에는 약간은 충격적이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신선했다. 그렇다고 온전히 백 퍼센트 다 받아들이기는 어려웠다. 논리적으로는 안정적이고 문제가 없어 보이기는 했지만, 근연도라는 개념이 너무 단순하기 때문에 말로 설명하지 못하는 어설픈 구석이 있는 것 같기도 하고, 과연 그것 때문일까라는 생각은 여전히 남아 있었다.


근연도를 생각하면서 길을 걷다가 뜬구름 없이 고등학교 시절 배웠던 고문이 생각났다. 국어II라고 했던 고전 과목은 신라 향가, 고려 속요 등 고전 문학과 고어를 배우는 과목이다. 말이 문학이지 거의 암기 과목이었던, 지금 생각해도 진절머리가 나는 좋아하지 않는 과목이었다. 어려웠다는 기억만 있을 뿐, 교과서에 실린 고전 문학의 감동은 없다. 그 와중에서도 기억나는 것은 “재망매가”라는 향가이다. 신라 승려 월명사가 지은 죽은 누이를 기리며, 부처님에게 공양을 올리는 내용이다. 가사 내용 중 “같은 나뭇가지에 나고서도, 가는 곳 모르겠구나”라는 구절에서 형제자매를 하나의 나무에서 가지라고 표현한 것이 인상적이었다.


약 천오백 년 전 신라시대에도 동생이 누이의 죽음을 안타까워하고 명복을 빌었던 모양이다. 더군다나 승려라면 출가했을 터인데, 속세와 마음의 인연을 완전히 끊지 못하고 혈연의 이타심이 남아 있었던 모양이다. 그 안타깝고 애처로운 마음이 오늘까지 글로 남아 전해져 오니 대단할 뿐이다. 누이를 기리는 그의 마음도 유전자의 “근연도”라는 것이 작용한 자연 현상의 발로였을까?


모든 것이 유전자의 행위라고 차갑게 말하고 싶지는 않지만, 살아가면서 “근연도”는 많은 부분에 작용하는 것 같다. 형제자매가 모두 나이가 들어 각자 일가를 이루고 산 지 오래되어, 형제자매의 연보다, 각자 가족의 연이 훨씬 더 중요하게 되었지만, 근연도는 여전히 유효한 것 같다. 형제자매의 자녀인 조카나 그 배우자로 인해 나의 형제자매가 힘든 상황을 볼 때면, 힘들게 하는 조카나 배우자들이 참 밉다. 그들로 인해 형제자매가 고생하는 것이 못마땅하다. 평소에 살갑게 대하는 조카들도 그런 마음이 들 때면 별로 보고 싶지 않다. 


'예전 같으면 팔은 안으로 굽고, 피는 물보다 진하다'라고 하면서 당연하다 생각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조금 다른 해석을 해 본다. 조카들과 나와의 근연도가 그들의 부모인 내 형제자매보다 적어서 그렇다고 생각해 본다. 그러고 보니 “근연도”라는 개념이 그렇게 이론적이기만 한 극단적인 개념이 아니라는 생각도 든다. 신라시대 월명사도 그랬고 나도 그렇고 하니.


“나이가 들수록 자연과학에서 더 지혜를 얻어야 한다”라는 어느 명사의 조언을 본 적이 있다. 하지만 대부분은 나이가 들면 인문학에 더 천착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인문학에서 지혜와 안정을 찾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관심의 추의 무게가 인문학으로 기울수록 과학은 물질적이고 냉정한 학문이며, 현대 문명의 명과 더불어 짙은 어둠을 주는, 결국 우리를 위협하는 존재가 될 것으로 생각한다.


이타적인 행위의 실체가 “근연도” 때문이라고 한다고 해서 내 삶이 변하는 것은 없다. 이기적인 기저가 아래에 숨어 있다고 해서 나의 이타적인 행위는 변하지 않을 것이다. 그것이 사실(fact)이라면 사실(fact) 일뿐, 그 사실에 대해 내 행동에 의미를 부여하는 나의 의지가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사실을 제대로 아는 것이다. 사실을 아는 것이 겁이 난다고 해서 사실을 아는 것을 피해서는 안 된다. 그러면 우리는 올바로 된 지혜를 얻을 수 없을 것이다. 과학적 접근을 통한 보편적인 원리를 안다면 나타나는 현상에 대한 이해를 더 잘할 수 있을 것이다.


나이가 들수록 자연과학에서 지혜를 얻는 노력을 해야 한다는 그 말의 의미가 여기에 있지 않을까,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