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OurStellar Jan 24. 2024

잠깐의 완전체

 - 땅을 박차고 비상하는 이를 위한 격려사 

현관에 신발이 가득하다. 몇 켤레 안 되지만 좁아 발 디딜 틈도 없다. 허리를 숙여 신지 않는 신발을 집는다. 신발장 문을 열어보지만 빼곡하게 차 있어 넣을 곳이 없다. 할 수 없이 덜 신는 신발은 현관 벽 쪽으로 붙여놓아 발 디딜 곳을 만든다. 한 사람에 두세 켤레만 있어도 신발장은 가득 차고도 모자랄 판이다.


베란다에는 빈 곳 없이 빨래가 널려있다. 바위에 붙은 따개비처럼 양말이 따닥따닥 붙어있다. 티셔츠, 바지가 주렁주렁 걸려있다. 천장에 매달린 빨래대도 모자라 바닥에 세우는 건조대까지 한 가득이다. 너무 촘촘하게 널어서 잘 마를까 싶지만, 다행히 햇볕이 잘 들어 마르는 데는 문제가 없을 것 같다. 내일쯤 아내는 깨끗한 보자기를 깔아놓고 마른빨래를 개킬 것이다. 가득 쌓인 양말 짝짝이를 맞추어 동그랗게 말아 쟁일 것이다.


아침, 서랍을 열면 빼곡히 들어찬 옥수수 알갱이처럼 촘촘히 박힌 양말이 저를 선택해 주기를 기다리고 있다. 그 많던 양말은 누가 신었는지 어느새 양말 서랍은 텅 비어 가고, 빨래 바구니는 점점 무거워진다. 또 빨래를 하고, 빨래를 널고, 빨래 가득한 베란다에는 언제나 그랬듯 창 너머로 들어온 햇살은 빨래 말리는 일을 힘들어하지 않고 잘하고 있다.


둘째가 먼저 유학한답시고 집을 떠났다. 처음으로 집을 떠나고, 떠나보내고 해서 모두 긴장했다. 그것도 외국이라 더 했다. 그러고 나서 첫째가 졸업을 앞두고 시험 준비로 학교 앞으로 이사를 했다. 봄바람에 아주 조금씩 쌓인 눈 녹듯 서서히 아이들은 자기의 시간을 밟아 갔다. 아이들이 집을 떠났다는 허전함을 생각을 해 볼 겨를도 없이 시간이 갔다. 그래도 막내가 옆에 있으니까, 비록 혼자 저녁을 먹는 일이 있더라도, 아직 같이 있는 아이가 있으니까 그랬는지 모른다.


아침, 양말 서랍장은 여전히 빼곡하게 차 있다. 언제 없어진지도 모르게 텅 비던 서랍장이 며칠이 지나도 그대로이다. 밖에서 집에 들어오면 현관이 휑하다. 그 많던 신발은 어디로 가고 슬리퍼 하나만 뒹굴고 있다. 한 평도 안 되는 현관이 운동장 같이 넓다. 빨래로 가득 찼던 베란다는 한여름 초록의 잎을 다 떨구어 낸 겨울 나뭇가지처럼 앙상하다. 더 이상 쓸모가 없는지 건조대는 접어 한쪽으로 치워져 있다.


시간과 에너지는 되돌릴 수 없다. 물리학자는 이를 ‘비가역적’이라고 한다. ‘가역적’은 물질이 변화한 후 다시 원래 상태로 돌아올 수 있다는 의미이다. 따라서 ‘비가역적’은 다시 돌아올 수 없다는 뜻이다. 시간과 에너지는 되돌릴 수 없고, 앞으로만 나아간다. 이런 과학적 이론을 몰라도 우리는 삶의 시간을 되돌릴 수 없다는 것을 너무 잘 있다. 아이들은 자라서 제 갈 길을 간다. 우리도 그렇게 해서 어른이 되었다. 아이들이 커가는 것을 본다. 많은 감정이 교차한다. 우리가 그런 것처럼 우리 부모님도 우리를 보고 그랬을 것이다.


말끔했던 현관에 다시 신발이 뒹굴기 시작했다. 먼저 둘째가 다시 돌아왔다. 이후, 첫째가 시험을 마치고 돌아왔다. 유학을 떠난 둘째는 다른 학교로 가고 싶다고 했다. 본인이 원해서 갔는데 마음이 바뀐 것이다. 여러 고민 끝에 다시 한번 더 해보자고 결정했다. 마음에 안 드는 학교를 군대처럼 꾸역꾸역 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좋아하는 것을 하면서 보내기도 인생은 짧은데 하물며 마음에 안 드는 것을 굳이. 첫째도 시험을 마치고 새로운 진로를 생각해야 한다. 전공을 살려 계속 시험공부를 할지, 아니면 새로운 방향을 모색해야 하는지 진지한 고민을 마주해야 하는 시간이 되었다.


새우는 더 자라기 위해서 껍질을 벗는다고 한다. 껍질을 벗는 순간이 가장 위험한 순간이다. 성장하기 위해서 힘든 시간이 필요하다. 아이들에게 어려운 시간이 될 것이라 마음이 무겁다. 그 시절 나도 그렇게 쉽지는 않았던 것 같은데 어떻게 지나왔는지 기억을 되새겨 본다. 끝이 없는 어두운 터널 속에 지나고 있는 답답하고 우울한 느낌만 남아 있다.


다시 빨래 바구니가 가득 찼다. 베란다 건조대에는 빨래가 줄줄이 널리고, 매일 저녁 빨래를 개켜 쌓아 놓는 일상이 시작되었다. 수북이 쌓인 양말짝을 맞추고 서랍에 차곡차곡 넣는다. 빼곡히 채운 양말이 사흘이 안 돼 동이 난다. 다 모여 식사를 할 때면 다시 보조 의자가 등장했다. 저녁 후 싱크대에 설거지가 한가득이다. 하루에도 몇 번씩 정리해야만 신발을 밟지 않고 현관을 나설 수 있다.


엊그제 둘째를 데리고 인천 공항행 리무진 버스를 탔다. 짧다면 짧은 수험 준비를 한 후 원하는 학교로 가는 길이다. 지난여름 돌아온 후 반년 만에 다시 오르는 두 번째 유학길이라 그런지 마음은 가볍다. 따지고 보면 그렇게 긴 시간이 아니었던 것 같은데 오래 같이 지낸 것 같다. 둘째가 오고, 첫째가 온 후 가족 모두가 있게 된 시간은 겨우 사 개월. 성인이 되어가는 아이들 모두 같이 지내는 그런 행운의 시절이 다시 올 수 있을까? 둘째 다음에 막내가 곧 집을 떠날 것이다. 둘째가 떠나가면서 행운의 시간은 끝났음을 안다.


유명 가수 그룹, 아이돌이 시간이 지나면서 해체된다. 팬들은 원래의 모습을 다시 보는 완전체를 그리워한다. 그러나 쏟아진 물을 온전히 다시 담을 수 없듯 예전의 완전체를 복구하기란 쉽지 않다. 완전체가 아름다운 것은 다시 올 수 없어서이다. 아름다움은 기억 속에 남아 있을 때 더 소중하고 빛나는 것이다.



잠깐의 완전체였다. 아이들이 떠나는 것은 기쁨의 반, 아쉬움의 반이다. 둥지를 떠나 창공을 날아오르는 기쁨과, 주인을 기다리는 서랍에 가득 차 있는 양말을 보는 아쉬움이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