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수에도 불구하고 힘의 위계에서 오는 여전히 변하지 않는 그 절망에 관해
*영화의 결말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요르고스 란티모스의 영화 <킬링 디어>는 의료 사고로 아버지를 잃은 '마틴'(배리 키오건)이 해당 사고의 수술 의사 '스티븐'(콜린 파렐)에게 의도적으로 접근한 뒤 벌어지는 비극에 관한 이야기다. 그 어떤 과학적인 설명도 없이 일종의 '마틴의 저주'에 걸린 것만 같은 스티븐 가족의 비극을 보고 있으면, 마틴은 영화 속에서 정의에 따라 심판을 내리는 신적인 존재처럼 느껴진다. 특히, 의도적으로 낮거나 높은 시점에서 풀샷을 계속해서 보여주는 연출은 이 모든 상황을 신의 위치에서 지켜보는 마틴 혹은 CCTV 관찰자처럼 느껴지게 하기에 관객들은 영화 속 기이한 현상을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게 된다. 동시에 이 일반적이지 않은 장면들은 효과적으로 공포감을 조성한다.
스티븐이 그의 가족 구성원인 아내 '애나'(니콜 키드먼)와 자녀 '킴'(라피 캐시디), '밥'(서니 설직) 셋 중 하나를 선택하여 죽이지 않는다면 가족 구성원들이 차례로 다리가 마비되고 거식증 증세를 보이다 피눈물을 흘리며 다 죽게 된다는 마틴의 저주는 자신의 아버지를 죽게 한 스티븐에게 복수하고자 하는 마틴의 의도에서 비롯되었다. 아버지의 죽음으로 인한 고통을 그대로 되갚아주기 위해 스티븐의 가족 중 하나의 목숨을 빼앗는 것이다. 마틴과 스티븐 모두 가족 구성원 중 한 명을 잃게 되며 '균형'을 이루고자 하는 것이 마틴의 목적이다. 그리고 마틴은 그것이 '정의'라고 주장한다.
이는 '눈에는 눈, 이에는 이' 정신이 깃든 함무라비 법전과 일맥 상통하며, 가해자에게 그대로 응징하여야 한다는 엄벌주의자의 입장과도 유사한 결이다. 특히나 의료 사고가 은폐되어 처벌을 받거나 대가를 치르지 않은 채 마틴에게 시계를 주며 위로하는 것에 그쳤던 스티븐의 모습을 통해 영화는 마틴의 복수에 어느 정도 정당성을 부여한다. 결과적으로 스티븐이 자신의 아들 밥을 총살하며 마틴의 그 정당한 복수는 성공한 셈이 되었으나, 이상하게도 기존의 '짜릿한 복수극'에서 느낄 수 있었던 카타르시스는 전혀 느껴지지 않는다. 오히려 불쾌함과 찝찝함만이 가득 채워진 채로 영화는 마무리된다.
마틴이 주장하는 정의가 그럴듯해 보였음에도 그의 성공적인 복수가 통쾌하지 않은 이유는 아무 잘못 없던 스티븐의 어린 아들 밥이 균형을 위한 희생양이 되었기 때문이다. 가해자에게 직접적으로 위해를 가하는 복수가 아니었던 건, 마틴이 내세운 균형의 논리(내 가족 구성원이 죽었으니, 너의 가족 구성원도 죽어야 마땅하다는)때문이기도 하지만, 마틴의 아버지가 죽은 뒤 한 순간에 평안한 가정이 깨지고 약자로 전락한 뒤 아버지의 빈자리와 사회의 시선을 견뎌야 했던 그 부가적인 고통에서 기인한다.
"아빠가 돌아가시고 들었는데 제가 스파게티를 아빠랑 똑같이 먹는대요. 신기할 정도로 똑같다면서 '쟤 스파게티 먹는 것 좀 봐, 쟤 아버지랑 똑같이 먹네' '포크를 꽂고 계속 돌리다가 입에 쑤셔 넣네' 저만 그런 식으로 먹는 줄 알았는데 저랑 아빠만요, 알고 보니까 사람들이 다 그렇게 먹더라구요. 똑같은 방식으로. 그걸 알고서 속상했어요. 아빠가 돌아가셨단 얘기를 들었을 때보다요. "
마틴의 아버지의 무고한 죽음에서 끝나지 않고 남겨진 자들에게 그 비극의 여파가 지속되었기에, 스티븐 한 명이 죽는 것이 아니라 스티븐이 마틴에게 희생양을 바쳐야만 균형이 맞게 된다. 이때, 한순간에 약자로 전락했던 마틴이 강자였던 스티븐에 대하여 절대적인 힘을 가지게 된다. 하지만, 스티븐은 희생양을 선택하는 과정에서 밥에게 강압적으로 하반신 마비를 연기하지 말라고 말하고, 의료 사고가 자신의 잘못이 아니라며 의사는 실수하지 않는다고 합리화하고, 마틴이 정신적으로 문제가 있는 것이라며 이 모든 상황을 부정한다. 킴과 밥은 자신이 희생양으로 선택되지 않기 위해 스티븐에게 잘 보이려고 노력하고, 스티븐은 누가 더 죽기 아까운가를 따져보기도 한다. 가정에 비극이 벌어지고 있는 상황에서도, 초반부 스티븐이 가정 내에서 권위적인 위치에서, 그리고 사회적인 지위가 높은 의사로서 행사했던 권력은 지속적으로 유효하다. 그렇기에 희생양으로 선택된 밥의 죽음을 마주하는 관객은 더욱 불쾌하고 괴롭다. 마틴의 복수가 정당하다고 시종일관 굳게 믿었을지라도 그 복수의 정의, 균형의 논리에 의심할 수밖에 없게 만든다.
요컨대 <킬링 디어>는 결국 복수가 이루고자 하는 정의의 무력함에 관한 영화다. 사회적으로 강자인 스티븐을 상대로 절대적인 힘을 가진 채 복수를 행하는 마틴의 모습을 통해 강자와 약자의 힘이 전복된 상황을 보여주는 듯 하지만, 결국 그 과정에서 여전히 약자가 희생되고 강자는 완전하게 무너지지 않는 결과를 보면 마틴의 복수는 슬프게도 무력하다. 사회는 법의 테두리 내에서 가해자가 정당한 대가를 치르게 하며 일종의 ‘복수’ 역할을 수행하고 정의를 구현하고자 한다. 하지만, 약자는 그 사회 속에서 외면당하며, 강자는 법의 테두리를 늘 교묘하게 빠져나간다. <킬링 디어>가 연출한 마틴의 복수의 무력함은 받는 대로 되돌려주는 것이 정의로운가에 관한 고민에서 더 나아가 복수에도 불구하고 힘의 위계에서 오는 여전히 변하지 않는 그 절망에 관해 생각하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