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얀 알을 깨고 나와 얼굴에 피를 묻히기까지.
영화 <스토커>는 자신의 생일날 아버지의 갑작스러운 죽음으로 상실감에 빠진 18살 소녀 '인디아'가 갑자기 나타난 삼촌 '찰리'에게 알 수 없는 감정을 느끼며 내면적으로 변화하는 과정을 그린 일종의 성장 영화다. 박찬욱 감독의 첫 할리우드 연출작으로, 시나리오를 직접 쓰진 않았지만 박찬욱 감독의 색채는 짙은 영화다. 박찬욱 감독만의 미장센은 물론, 차갑고 건조하게 인간의 짓눌린 악의 본성을 해외 배우들을 통해 또 한 번 다루고 있다는 점에서 신선하고도 익숙하게 느껴진다.
의문의 사고사로 죽은 아버지 '리차드'의 장례식장에 존재 여부조차 알지 못했던 찰리가 등장하며 영화는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장례식장에 검은색 옷을 입고 오지도 않고, '항상 밖으로만 나도느라 집에 들어오지도 않았다'는 삼촌의 존재는 상당히 의심스럽지만, 젊고 다정하며 빼어난 외모까지 지닌 삼촌에게 인디아는 본능적으로 이끌리며 호기심이 생긴다. 인디아의 엄마 '이블린'도 찰리에게 비슷한 감정을 느끼는듯한 모습을 지켜보는 인디아는 성숙한 엄마에 비해 한없이 어린 자신의 모습에 약간의 허탈함도 느끼며, 이블린과 찰리가 다정하게 피아노를 연주하는 것을 보며 실망하기도 한다.
찰리에게 알 수 없는 묘한 이끌림과 긴장감을 느끼지만, 찰리의 등장 이후 멕게릭 부인과 고모할머니까지 모두 갑작스럽게 사라지고 찰리가 사 온 아이스크림을 보관하고 있던 냉동고 안에서 맥게릭 부인의 시신까지 발견한 인디아는 찰리를 향한 의심을 거두기는커녕 혼란스러움이 가중된다. 하지만 성인의 문턱에 선 소녀의 성적 호기심 역시 걷잡을 수 없이 커져, 찰리를 향한 의심과 두려움에도 불구하고 인디아는 찰리에게 완전히 빠져들고 만다. 홀로 피아노를 연주하고 있던 인디아가 이블린이 그러했듯 찰리와 다정하게 피아노를 연주하는 상상을 할 때 찰리의 표정에는 변화가 거의 없지만, 홀연히 사라진 찰리를 뒤로 한 채 넋이 나간 인디아를 보여주는데, 이는 인디아가 찰리에게 완전히 매료되는 상황을 독특하고도 또 섹슈얼하게 연출한 <스토커>의 대표적인 장면이다.
인디아는 찰리와 이블린이 입 맞추는 장면을 목격하고선 혼란스러운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고 도망쳐 나와 자신을 희롱하던 불량 학생 윕과 충동적으로 키스한다. 처음 느끼는 감정에 두려움이 커진 인디아는 키스 도중 윕을 거부하지만, 강제로 성행위를 시도하는 윕을 힘으로 뿌리치지 못해 위험에 빠지게 된다. 그때 찰리가 등장해 윕을 살해하고, 찰리를 향한 그동안의 인디아의 의심은 확신이 된다. 하지만, 인디아 역시 윕의 시신을 처리하는 것을 도우며 살인에 동조하고 비로소 자신의 잔인한 사랑과 애써 부정해 온 악의 본성을 인정하게 된다. 매년 인디아의 생일마다 리차드가 선물해 준 단화 대신 찰리가 선물해 준 빨간 하이힐을 신게 된 인디아는 갈망하던 여성성을 입고 소녀에서 숙녀로 한층 성장하게 된다.
내가 무엇이 되든 그건 내 책임이 아니야. 그걸 깨달아야 자유로워지고, 어른이 된다는 건 바로 자유로워진다는 거야. (영화 <스토커> 中)
흰 꽃이 붉게 물들듯, 영화 초반부 흰 원피스를 입고 뛰어가던 인디아는 영화 말미에 이르렀을 때 검붉은 하이힐을 신고 (브라운 계열에 가까운) 붉은빛의 치마를 입고 기어이 얼굴에 피를 묻힌다. 영화 초반부 인디아가 굴리던 흰 달걀을 비로소 깨고 나온듯하다. 대개 성장 영화에서 다루는 '어른이 된다'는 본성을 최선을 다해 누르고 행동과 태도에 책임감을 가지게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하지만 영화 <스토커>는 이 성장의 의미를 비틀어 버린다. 요컨대 <스토커>는 피로 물든 잔인한 사랑을 딛고 일어나 악의 본성을 깨닫고 자유를 만끽하게 된 18살 한 소녀의 잔혹한 성장 일지다. 찰리의 그동안의 살인 장면들이 이어지지 않고, 인디아의 아이스크림 먹는 장면이나 메트로놈 소리에 맞춰 침대 위에서 몸을 움직이는 장면 및 샤워 장면들과 교차시키고 찰리의 살인으로 피가 튈 때 인디아의 얼굴에 피가 묻는 등의 장면 배치는 인디아가 찰리와 같은 본성을 애초부터 지니고 있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실제로 과거 찰리가 첫 살인을 하고 흙바닥 위에서 했던 몸짓은 인디아가 메트로놈 소리에 맞춰 움직이던 것과 같았다.) 인디아가 본성을 깨닫고 성장을 하게 되는 과정을 자로 잰 듯이 계산적으로 장면을 구성하며 복선을 배치하여 영화는 내내 인디아가 가지는 긴장감을 보는 이에게도 그대로 전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