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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 쓰는 엄마 Jun 24. 2024

암 걸리기 최악의 타이밍

회사 프로젝트, 편의점 오픈, 의료 파업의 삼박자


Timing is everything.

타이밍이 전부다. 취업을 하는 것도, 결혼을 하는 것도, 아이를 낳는 것도, 집을 사는 것도, 면밀히 들여다보면 사실 모두 타이밍의 문제다.


암 걸리는 데에 최적의 타이밍이 있겠냐마는, 2024년 5월 초, 직장암 진단을 받은 내게는 고민거리가 세 가지 있었다.


1. 회사의 큰 프로젝트

다음 달에는 CEO급의 국외 외빈 약 300명이 참석할 예정인 업계에서 가장 큰 국제 행사가 한국에서 예정되어 있었다. 그리고 그 행사에서 나는 총괄을 맡고 있었고, 내가 공들여 하나하나 지휘한 결과물이 약 2주 뒤에 공개될 예정이었다. 이를 위해서 나는 밥 먹듯 야근 중이었고, 일주일 행사 기간 동안만큼은 이준이도 시댁에 맡기고 행사가 진행되는 호텔에서 묵을 예정이었다. 갑작스러운 암 진단으로 인해 중도 하차를 해야 하는 것인지 혼란스러워졌다.


2. 편의점 오픈

오랜 기간 동안 심사숙고 하던 '우리' 편의점을 드디어 오픈하기로 하여 약 2천만 원의 계약금을 지불한 상태였다. 갑작스러운 암 진단으로 이 또한 진행을 해야 하는 것인지 머리가 어지러웠다. 결정하기 전, 이미 남편에게 고민을 토로한 바 있었다. 현재의 행복과 미래의 여유 중에 어떤 것을 선택해야 하느냐에 대한 고민이었다. 편의점을 오픈해서 잘 된다면 미래에 조금 더 여유롭게 생활할 수는 있겠지만, 회사와 육아에 편의점 관리까지 병행한다면 그나마 있는 현재의 소소한 행복의 균형이 깨질 것 같았다. 그런데 이제 암까지 함께해야 하는 상황이라니. 그냥 계약금을 포기하는 것이 맞을까?


3. 의료 파업

우리나라는 지금 전례 없던 의료 파업이 몇 달째 진행되고 있다. 암이라는 말을 듣기 전날까지 남편과 "지금만 안 아프면 돼"라고 농담을 했었는데. 진단을 듣고 가장 먼저 걱정되었던 부분도 바로 이것이었다. 예상대로 3차 병원은 단기간 진료 예약도 불가하여 회사 근처 2차 대학병원에 진료 예약을 했다. 수술은 3달이나 뒤인 8월에나 가능하단다. 다른 선택안도 알아보겠다고 일어서려고 하니, 지금 파업 때문에 날짜 잡기가 어려울 것이라며 일단 예약을 걸어두라고 한다. 우리나라 직장암 최고의 명의가 있다는 삼성서울병원에 갔다. 수술까지 1년은 더 기다리라고 한다. 결국 2차 병원에서 8월에 수술을 받기로 했지만, 지금도 혹시나 파업이 확대되어 수술날짜가 밀릴까 노심초사하고 있다.


이렇게 삼박자에 맞추어 나는 혼란 속으로 빠져들어갔다.




정신을 차리기로 했다. 간단히 생각해 보자. 초기라 항암도 안 해도 되고, 사실 그냥 쉬고 있다가 수술만 받으면 되는 거다. 너무 깊이 생각할 필요는 없다. 그리고 이를 계기로 건강에 더 신경 쓰게 될 테니 오히려 장기적으론 내게 더 좋은 일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암 진단금 6천만 원도 들어오기로 예정되어 있었다. 생각해 보면 별 거 아니었다.


하나씩 정리해 보기로 했다.


먼저 회사 행사. 처음 진단을 받고 전이 검사다 뭐다 병원을 오가며 약 2주 동안 정신을 못 차렸다. 회사에서는 이런 나를 배려해 주어 현재 진행하고 있던 프로젝트에서 일부 배제시켜 주었다. 우리 팀은 내 상황을 어렴풋이 알고 있었지만 다른 팀과 외부에서는 여전히 나를 총괄로 알고 있어 업무 배제 후에도 계속해서 프로젝트 관련 문의가 쏟아졌다. 그럴 때마다 팀원들에게 진행상황을 물어보고 답을 해주었는데, 그러다 문득 오히려 이렇게 '반만 걸치고 있는' 상황에 더 스트레스를 받고 있음을 깨달았다. 예전엔 내가 꿰뚫고 있던 것들을 지금은 오히려 남에게 물어보고 확인해야 한다는 사실이 더 큰 스트레스로 다가왔음을 깨달았을 때 내 고민의 해답은 명확해졌다. 그냥 올인하자. 다시 업무에 푹 빠져서 제대로 행사를 완성시키고, 그리고 멋지게 퇴장하자. 그날, 업무 분장에서 빠진 내 이름을 다시 적어 넣어 팀원들에게 돌렸다.


다음으로 편의점. 지금 당장은 생각하고 싶지 않지만, 사실은 암에 걸렸기 때문에 더더욱이 플랜 B가 필요했다. 수술이 잘 되고 복직할 거란 확신은 있었지만, 재발했을 때는 바로 3기가 되어 항암치료를 피할 수 없다고 했다. 이런 일이 있으면 안 되겠지만 만약 일어난다면 회사를 언제까지 다닐 수 있을지가 불명확했다. 언제까지 수입이 안정적일 수 있을지 확실하지 않았다. 그렇기 때문에 처음에 조금 힘들더라도 '월급쟁이‘가 아닌 ’우리의 일'을 가질 필요가 있었다. 그리고 남편이 찾은 그 자리는 '초대박' 까지는 아니었지만 여러 업체에서 눈독을 들이고 있을 정도로 괜찮은 자리였다. 남편과 서로 배려하기로 약속하고 해 보기로 했다. 오래 기다렸다. 그래, 이제 할 때가 됐다. 해 보자.


마지막으로 의료 파업. 나는 항상 모든 상황에 있어서 지나치게 깊게 생각한다. 이게 내 단점이라는 말은 남편을 포함해서 여럿에게 들은 바 있다. 어쨌거나 나는 지금 수술까지 1년을 기다려야 하는 상황이 아니고, 의사도 아직 초기라 수술 날짜인 8월까지 마음 놓고 기다리면 된다고 한 상태다. 수술날짜가 미뤄지는 것은 일어난 상황이 아니니 미리 걱정할 필요도 없고 걱정한다 한들 할 수 있는 것이 없다. 이럴 땐 그냥 Let it be 정신을 발휘해야 한다. 내가 고민한다고 해결할 수 없는 것들에 대한 걱정은 그만. 생각을 그만 끄고 눈앞에 주어진 일을 해야 한다. 걱정을 너무 많이 하는 나를 보고 미국 고교시절 친구가 내게 해준 말을 떠올렸다.

“Whatever happens, happens."

(무슨 일이 일어나면 그냥 일어나는 거지 뭐.)


이왕 이렇게 된 거, 그래, 이때 아니면 언제 쉬어보겠어. 그동안 해보고 싶었던 것들을 해보며 여유를 맘껏 즐겨보자.


회사 복지카드로 휴직기간 동안 다닐 1:1 필라테스를 결제하고 돌아오는 발걸음이 한결 가벼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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