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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 쓰는 엄마 Jul 16. 2024

암밍아웃과 연락에 관한 고찰


자주 연락하지는 않더라도 가끔 연락하면 그동안의 시간이 무색하리만큼 반가운 사람이 있다. 누구나 이 문장을 읽으면 떠오르는 사람이 있을 것이다. 서로 각자의 인생을 살기에 바빠 자주 연락이 닿지는 않지만, 큰일이 생길 때마다 인생의 대소사를 공유하는 친구들이 있었다. 그러다 각자의 가정이 생기고 사는 지역이 달라지면서 그마저도 공유하는 날들이 줄었다. 특별한 일 없이 서로의 안부를 궁금해하는 날들은 더더욱 줄었다. 그리고 나에겐 암이라는 불청객이 찾아왔다.




암이라는 진단을 듣고 제일 먼저 남편한테 전화를 했다. 아침 일찍 병원에 온 나를 대신해 홀로 이준이를 어린이집에 챙겨 보내느라 바쁜지 전화를 받지 않는다.


카톡 대화기록을 넘겨봤다. 전날 “내일 나 출근 안 하면 결과 안 좋은 줄 알아-” 하고 농담했던, 내 출근을 기다리고 있을 아끼던 팀원에게 카톡을 보냈다. “OO야. 나 직장암 이래.”


“다들 점심 먹지? 뭐 먹을까?” 9시도 안 돼 점심 메뉴를 고민하는 동기 카톡방에 “얘들아 나 출근 못 할 것 같아. 병원 왔는데, 암 이래.“ 라고 남겼다.


남편에게 전화가 왔다. 예상대로 등원시키느라 이제야 봤단다. 뒤이어 동기들한테도 차례차례 전화가 왔다. 통화 괜찮으시냐고 묻던 팀원에게도 전화했다. 본부장님에게 오늘 출근을 못할 것 같으니 대신 오늘 예정된 회의에 좀 참석해 달라고 부탁하는 전화를 했다.


아이러니하게도 나는 가족보다도 회사 동료들에게 먼저 ‘암밍아웃’을 했다.




곧 부모님과 친구들에게도 알렸다. 드라마 “서른, 아홉”을 보면 전미도가 췌장암에 걸렸다는 사실을 알고서 두 친한 친구가 전미도를 ‘세상에서 가장 신나는 시한부’를 만들어주기 위해 주야장천 뛰어다니는데, 사실 내게는 그만한 친구는 없는 것 같다. (이렇게 말하면 서운해하는 이가 있을까?) 수술만 하면 낫는다고 하니 드라마 주인공에 빚댈 수준도 아니긴 하지만.


그저 괜찮을 거라고, 그나마 다행이라고들 말해주었다. 몇몇은 고맙게도 항암에 좋다는 과일과 음식을 보내주었다. 올리브 오일도 받고 휴직 기간 동안 읽을 책도 선물 받았다.


헌데, 오늘 아침 산책을 하며 가만히 카톡 리스트를 들여다보자니, 아직 알리지 않은 친구들이 두어 명 있다는 걸 발견했다. 대화방을 보니 마지막 대화가 작년 이맘때 무렵. 내가 먼저 연락하지 않으면 연락이 오지 않는 친구들이었다. 고교시절 한때 죽고 못 살 정도로 친했지만, 지금은 각자 사는 곳도 다르고 하는 일도 달라 접점이 없어진 친구들이었다.


그래도 가끔 연락하며 친구 관계를 이어나가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문득 내가 먼저 연락하지 않으면 그들은 내 소식을 궁금해하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굳이 이런 내 근황을 전한 들, ‘안물안궁’인 소식을 전하며 억지로 관계를 끌고 가고 있는 것 같았다. 내가 먼저 연락하는 것이 오히려 이들의 평온을 깨뜨리는 것이 아닐까 라는 생각이 들자, 미련 없이 그들의 연락처를 폰에서 지워버렸다.




사실 나도 연락을 먼저 잘하지 않는 편이었다. 더 정확히 말하면, 내가 연락을 잘하지 않는다는 것을 스스로 인지하지 못했다. 그러다 대학 시절 우연한 계기로 주변인의 속마음을 엿들을 기회가 있었는데, 그때 적잖이 충격을 받고는 나를 돌아보게 되었고, 그때부터 가까운 사람일수록 더 챙겨주고, 표현하고, 연락하려 노력했다.


슬프게도, 앞서 언급한 그 친구들은 더 이상 소식을 전하고 싶은 사람들 중 하나가 아닌, 그저 내가 억지로 끌고 가고 있는 관계의 단순한 지인이 되어있었다. 아마 내가 먼저 연락하지 않으면 앞으로도 연락올 일은 없을 거다.


그들의 연락처를 지우고 난 뒤 폰에 저장돼 있던 앞으로 연락할 일 없는 많은 일회성 만남의 지인들 연락처도 지웠다.


암에 걸리고 나서 부쩍 생각이 많아졌다. 그리고 동시에 한결 가벼워진 것 같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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