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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일 아침, 잠시 여유가 있다면.

반전과 반전이 머릿속에 있는 상태에 대한 고찰

by 맨땅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고 자부했지만 어제 하루만 해도 너무 많은 일을 했다.

내가 있다는 존재마저도 느끼지 못하게 하고 싶었지만 실패였다.


일어나 양치질을 하고 세수와 샴푸 하는 과정을 통해 사용한 물과 최소한의 세정제들과 로션 사용은 하루 시작부터 나의 신념을 무너트리는 것이다. 그렇다고 이마저도 하지 않게 된다면, 나에게 닥칠 따가운 시선과 나를 두고 퍼질 무수한 소문들은 나를 더 견디게 하지 못할 것이다.


어쩔 수 없이 타협하고 적당하게 합의점에 이른 것이 남들처럼 살기는 하지만

내가 나로 산다는 것을 눈치채지 못하게 하는 최선의 방법이라 생각한다.

가끔 드라마나 영화 속에서 주인공이거나 흐름상 중요한 인물들은 한결같이 검은 모자와

몸에 달라붙은 의상, 혹은 짙은 후드티를 뒤집어쓴 모습은 꿩이 자신의 모습을 감추려 머리만 처박은 모습과 아주 유사하게 보인다.

그저 평범하게 살아가기만 한다면 별로 눈에 뛰일 것도 없고

나에 대해 궁금할 것도 없어 편할지도 모르겠다.



이런 나의 생각과 행동이 효과를 보고 있다.

아직은 내가 그 안에서 섞여 있다는 점이 내가 곁에 있어도 점점 둔해지고

있었다는 기억조차도 못하는 사람들이 늘었기 때문이다.


사회로부터 격리되거나 탈출하여 잊혀 가는 사람이 되기 전에는 적당한 타협이 필수다.

그런 타협과 스스로의 연습은 내공을 쌓아가기에 충분했지만,

식탐은 나를 흔들고 마구 혼란에 빠지게 만들었다.


하루에도 몇 번씩 먹을 것을 찾고 소화하고 배설하는 과정은 다른 사람들이 느끼지 못하는

내 정신과 육체의 부산함의 수치를 최고로 만든다.


길을 걷다가도 어디선가 흘러나오는 음식 냄새에 나의 걸음걸이는 점점 느려지고

머릿속은 벌써 온갖 레시피의 조각을 맞추고 있었다.

'헝그리'와 '안헝그리'는 중요하지 않다. 왜냐하면 벌써 나의 뇌와 세포들은 냄새에 의해

각종 의지와 결심들을 깰 충분한 이유들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이럴 때 방법은 하나뿐이다.

줄행랑 : 대문의 좌우로 펼쳐진 종의 방, 노비의 방, 도망


가능한 모든 걸 비워놓고 시작하는 것이다.

텅 빈 방 안에서 아무것도 필요 없는 상태를 만들고 나서야 정말 무엇이 필요한 것인지 알 수 있지 않을까?

방안을 정리하고 책상을 정리하다 보면 생각지도 못한 것들이 나오고 그것들을 버리지 못하는 사이

난 다시 삼천포로 빠지듯이 책상에 앉아 무엇인가를 그리고 적고 있었다.


그럼에도 수없이 쏟아져 나오는 생각들로 한동안 아무 글도 쓰지 못했다.

반 페이지나 한 장정도의 글이 완성되어 갈 즈음엔 여지없이 반대의 생각들이 들고일어났다.

나의 생각에 대한 반론들.

그것에 난 나를 이해시키거나 합의하지 못했다.

내가 적어 내려간 글들이 서서히 흐려지고 모순된 쓰레기로 남아 있었다.


아직도 내 머릿속에는 원소기호와 주기율표, 번호들이 남아있다. 왜 그런지는 모르지만,

가끔씩 되새김질하듯이 그것을 속으로 중얼거리다 보면 그것들이 내 머릿속에 기억된 처음이유는

잊혀지고 그것들만 남아있다.

H HE LI B C N O F NE....

내가 가지고 있는 수없이 많은 질문들과 세상에 존재하는 불안과 슬픔이 모두 이것들로 만들어진 것일까?


최근에는 러시아 작가들의 책을 읽고 있다.

고전들을 읽다 보면 그 표현력과 화려한 문체에 감탄하고 만다.

하지만 글 속의 인물이 가지고 있는 이름 때문에 힘들다.

.... 스키... 노프..... 블라블라......

이름은 왜 이리도 긴지.

분명 예전에 못 느끼던 불편함과 걸림돌이다.


그 심오하고 깊은 통촬력과 웅장하고 서사적인 역사의 흐름, 인간 하나하나의 파르르 떨리는 호흡까지도 들리는 문장의 칼날이 그 이름들 때문에 잠시 멈춘다.

내가 가진 이해력과 독해력이 고장 난 때문일 것이다.

스마트폰과 tv를 통해 직관적으로 받아들이는 경험이 나의 뇌 속의 문자와 충돌하는가 보다.


그냥 그대로 있는 그대로

보이는 그대로

가진 거 그대로

생각하고 느끼고 살던 시절이 먼 과거로 느껴진다.



커피 한잔과 브람스의 음악이 주는 편안함과 휴식에 잠시 쉼을 취한다.

어떤 다른 생각이나 사건들이 지금의 이런 '쉼'을 깨트리지 못하도록 경계하면서.

잠시 낮잠을 취해도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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