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춘천 산문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수우 Feb 09. 2023

한잔하고 싶은 기분

영롱보다 몽롱

   괜히 술 한잔하고 싶은 때가 있다. 푸근하게 무너지고 출렁거리는 술기운에 방방 뛰고 싶어지는 때가. 그런 날엔 누군가를 만나면 한잔하지 않아도 한잔하고 싶은 기분이 해소되곤 했다. 춘천에서 대부분의 시간을 혼자 보내고 있던 터라, 이참에 혼술에 도전해보기로 했다.


   아껴두었던 시집과 유리잔과 흑맥주 캔, 그리고 치즈 과자를 고동색 테이블 위로 가져왔다. 구석에 있는 조명을 켜자 고운 주광색 불빛이 거실 가득 흘렀다. 미지근한 잔에 차가운 맥주를 따랐다. 맥주 위로 바닐라 아이스크림 같은 거품이 두껍게 쌓였다. 지금 마실까? 책을 먼저 읽을까? 나는 이런 ‘무엇을 하기 직전’을 좋아한다. 맥주를 마시기 직전, 여행을 떠나기 직전, 잠들기 직전, 글을 완성하기 직전, 고심해서 고른 책을 읽기 직전. 그 순간에만 느껴지는 어떤 풍요로운 향이 있다. 꿀꺽, 한 모금 마시자마자 가뭇없이 사라지는 기대의 거품. 그 찰나를 위해 수많은 일을 벌여온 건지도 몰랐다.


   맥주 한 모금을 마시고 과자를 오도독 씹었다. 씁쓸한 기운에 짠맛이 덮이자 식욕이 왕성해졌다. 이 만족감으로 오늘 하루를 덮기 충분할 것 같다고 생각했다. 여행 첫날 맑은 날씨에 느꼈던 이른 기쁨처럼. 버스를 놓치거나 미리 알아본 음식점 문이 닫혀 있으면 금세 증발하고 마는 얕은 행복처럼.


   술기운이 몸에 가볍게 퍼지는 감각은 오랜만이었다. 시를 읽으며 홀짝이다 보니 거의 다 마셔갔다. 기분 좋은 취기가 가시고 몸과 눈이 무거워지며 졸음이 오기 시작했다. 행복과 불행, 만족과 아쉬움 같은 감정은 맥주 거품처럼 일어났다가 쉽게 사그라든다. 가만히 누워 있는 때에도 행불행의 파도는 쉼 없이 오고 갔다. 혼자 맥주를 마실 때도 어김없이 그랬다. 맥주 한 캔을 비우는 동안 좋았다가, 지루했다가, 만족했다가, 무료했다가 했다. 술을 다 마실때 쯤엔 졸음과 심심함 뿐이었다. 며칠 전부터 기대해온 오롯이 나를 위한 시간이었는데 이렇게 끝나다니 아쉬웠다.


   이 심심함을 전에도 느껴보았다. 4년 전 한여름에 제주도로 혼자 떠난 여행에서였다. 판포포구와 애월리를 돌아다니며 사진을 찍고, 일기를 쓰고, 뜨거운 흙길을 걷고, 분홍빛으로 물드는 노을을 봤다. 나를 둘러싼 맑고 찬란한 자연 풍광이 무색하도록 따분했다. 여행을 기대했던 마음이 더 재미있게 느껴질 지경이었다. 예정보다 일정을 일찍 마무리하고 서울에서 친구를 만났다. 사과 향 맥주를 나눠마시며 제주도를 찍은 사진을 보여주고 일기를 읽어줬다. 평소보다 반 톤 올라간 서로의 웃음소리에 놀라며 꺄르르 웃었다. 졸음을 쫓으며 추억을 가열하는 동안 거품은 꺼지고 맥주는 식어갔다. 붉어진 얼굴, 웃음기 어린 눈, 기울어진 몸, 수더분해지는 마음, 어둑한 조도. 영롱한 기억과 몽롱한 술기운이 우리 테이블 위에 둥둥 떠다녔다. 허술한 안주와 마주 앉아 속닥이는 목소리가 달았다. 이야기하느라 미지근해진 맥주를 마시며 이제야 여행하는 기분이 든다고 말했던 듯 하다.


   내가 아닌 다른 이의 웃음소리로 완성되는 여행처럼 일상 틈틈이 타인의 웃음이 자리해야 나는 덜 심심했다. 맥주 거품이 중요한 게 아니었다. 미적지근한 맥주도 문제가 아니었다. 실망스러운 순간에 혼자가 아니어야 했다. 그럼 좀 괜찮았다.




매거진의 이전글 희귀한 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