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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블루나잇 Jan 21. 2024

파랑

벌레들이 무서워요. 기댈 빛이 무서워요. 새벽이 드나들어요. 나는 눈을 감아요. 어디서 오는 소리인지 가늠할 수 없을 만큼 알약을 삼켰어요. 억지로 잠들지 않아도 이끄는 곳으로 떠나려고요. 조금만 놓으면 다시 걸을 수 있어요. 밤이 어지럽네요. 무척이나 소란스러운 찰나, 얼굴을 사랑했지요.  

   

무슨 꿈을 꾸었나요. 창문으로 투과되는 빛은 파랑이 아닐 때가 많지만 그것이 서럽다는 것을 알면서도 사람들은 포기하지 못해요. 그림자를 본 적 있다면 내 마음을 이해할까요. 흰색도 검정을 가졌다는 사실을. 이따금 삼켜지는 바람에 지켜내지 못할 약속들만 구석에 흩어진다는 파란을.     


명멸을 바라봐요. 눈빛은 없어지고 동시에 나도 사라졌어요. 단어를 볼 수 없게 됐거든요. 이건 누구의 탓도 아니에요. 슬픔을 나열해 본 적 있는 사람들은 깊이 잠들 수 있대요. 깊이 잠들기 위해 슬픔을 나열하는 사람들을 본 적 있어요. 결과로부터 원인이 태어난 거니까요. 모든 건 예견된 수순이라면서. 반대는 믿지 않아요.  


내가 참 쉽대요. 그러니까 내가 쉬운 게 아니라 내가 쉽대요. 잘 모르겠죠. 나도 모르는 나는 쉬웠나 봐요. 쉬워지지 않고 싶어서 쉬워진 거예요. 애쓰는 말은 결국 달음을 멈추게 되어 있는 거죠. 말이 아니라 사람이라면 무엇을 멈춰야 할까요. 그냥 계속 쉬고, 쉬워지면서 언젠가 지워질까요. 숨도 잘 쉴 수 있게 될까요.

     

내가 늘어놓은 것은 몇 년 거뜬히 챙길 쌀알입니다. 솜이 쪼그라들어 자아를 잃은 겨울 이불입니다. 오래 방치해 제법 목숨 줄이 질겨진 손톱입니다. 늘어난 뱃살을 감당하지 못해 바짓단을 달랑거리는 단추입니다. 혀를 주욱 내밀고 옷걸이 곁에서 턱을 괸 지퍼를 올렸다 내리는 동안, 한 번도 크게 뱉어보지 못한 비밀을 짙게 토해내는 동안. 밤의 야윈 정상에서는 누군가 울고 있습니다. 산의 언어를 들을 수 있어 서글픈 계절.


파란빛은 그곳에서 시작된다고 내게 알려준 사람이에요. 어렴풋이 떠오르는 기억과 형상들은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겠지만, 잊지도 않겠지요. 추억에 묻은 깃털이 재회를 기다리고 기다린대요. 더는 생각이 나질 않아요. 시계추의 밤이 돌고 또 돌아 하루를 삼킨다는 속설을 믿어볼래요. 잔뜩 얼어있는 발에 찻잔을 기울이면 연기 대신 입김이 불어날까요. 무당벌레처럼 넓은 등을 쪼개어 포갠다면 덜 아플 텐데.     


내가 너무 많아서 끼어들 자리가 없다고 합니다.

그래도 주저앉게 두지는 않으려고요.      


파랑을 나에게 주세요.

나는 당신의 파랑이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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