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을 잊지 말아야지

빽빽하게 갇힌 누군가를 위한 기백의 선서

by 블루나잇

줄 없는 노트를 싫어했다. 통제 없이 자란 환경 안에서 마구잡이로 늘어진 까맣고 빨갛기도 한 몸체를 마주하는 게 썩 유쾌하지 않아서였다. 치부가 적확하게 드러나 짓궂은 물결로 요동치는 호숫가처럼 여겨짐이, 그리하여 꾸역꾸역 고개를 치켜드는 잿빛 열등감들이 빈번히 부끄러워서. 어떤 날에도 예외 없음으로, 촘촘한 직선이 일괄적으로 줄지어선 단정한 연습의 삶을 살곤 하였다.


정형화의 구속은 수시로 우리를 가두고 못살게 굴었다. 가끔은 수만 수천 개의 금들이 목을 조르는 것처럼 느껴졌지만, 숨통이 끊어질 기미가 보인대도 가만가만 방관했다. 알을 부수지 못한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러했다. 기안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하나, 정해진 길을 걷는 편이 만만했다. 쳇바퀴 돌듯 차려주는 밥을 먹고 꺼내주는 옷을 입었다. 은연중에 돌아가야 할지도 모르겠다는 의구심이 들었을 땐, 이미 겁보가 된 후였다.


우리는 결국, 산속 경쟁에는 두 번 다시 야망을 품을 수 없도록 곱게 길들여진 야생동물의 흉내를 내었다. 나태함과 익숙함에 눈이 뜨였다. 어쩌면 태초의 모습인지도 몰랐다. 길고 가느다란 눈빛들은 생기를 잃었으며, 급기야 특별한 광채를 빼앗긴 채 죽은 것들과 비슷한 낌새를 뿜기 시작했다. 스스로 포기한다는 굴복의 선언은, 식은땀을 넘나드는 구차한 현실로부터 꺼내줄 이가 아무도 없다는 방증으로 기록되고 말았다.


포승줄을 쥐는 기준이 있다 해도, 사람은 사랑에게로 돌아간다. 그러나 잔여 감정이 남아있을 경우에만 해당되는 문장일 것이다. 바다보다 그윽한 심적 항해를 탐구하는 일은 대체적으로 의지 없이 불가능하리라. 이는 때 이른 향경의 이정표와도 같았다. 그저 가야 할 곳을 가야 하기에 가는 것일 뿐. 의미도 모른 채 걷는 훈련터에서 우린 무엇을 깨닫고 어떤 빛깔의 가치를 얻을 수 있을까. 그때는 왜 이런 사유를 열어볼 시도조차 못했던 것인지. 감정을 늦게 깨닫는 유형의 허망한 부림은, 남은 관계를 유보시킬지도 모른다. 돌아간다 해도 예전 같지는 않을 일말의 낯선 경계심처럼 말이다.

여느 때처럼 꽃이 피고 지는 일. 만물이 공존하는 행성의 안위를 위해. 셀 수 없는 절망과 망각을 품은 이곳에서부터 나는 당신을 기록하고 있다. 덧붙여 아직 늦지 않았다는 한 떨기 기망을 보탠다. 나는 노상 당신의 뒤에 있다.


어리숙한 현존이 모조리 소진되고 쇠약한 미래가 당신을 뒤덮을지언정, 깊숙하고 끈적이는 불안을 앞세워 극렬하게 우리 사이를 갈라놓을지언정. 스스로 지켜야겠다는 위협이 가슴께를 맴돌 때, 심장이 다급하게 두근거릴 때면 말이야. 당신과 나, 둘만 기억하는 신묘한 수풀의 보금자리에서 수유 쉬어가기를. 누리의 고통을 깜빡할 시간만큼 온유한 쉼을 들이쉬고 내쉬기를. 우리가 만날 수 있다면 그 끝은 반드시 희망이기를.


나는 조그마한 몸짓으로 당신의 꿈을 좇는 감색 덩어리에 불과하지만, 등시에 살아냄의 존재를 증명하는 수호의 그림자로 생존할 것이다. 당신이 당신을 포기한다 해도 나는 당신을 놓지 않을 것이다. 그러니 당신은 나를 믿고 한발 더 나아가라. 생경한 각인일지 모르겠으나, 억겁의 생을 뚫고 이곳으로 넘어온 당신이 이루지 못할 일은 그 무엇도 없을 것이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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