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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오생 Sep 14. 2024

04. 수학과 문학은 동전의 양면 (1)

지식과 지혜, 그 뿌리를 찾는 여행

지난번 글의 제목은... <03. K- 문화가 환영받는 이유>였다.

지금까지 [대학과 학문의 세계] 매거진 내용을 정리해 보자.


( 1 ) 오늘날 대한민국 대학에서 가르치고 배우는 것은 21세기 전 세계의 주류主流 문화인 패권주의 패러다임이다. 자본주의와 물질문명에 관한 단편 '지식'이다. <01.Building is not university!>


( 2 ) 자본주의 물질문명은 인류의 지속 가능성을 심각하게 위협하고 있다. 인류학자 하빌랜드 Haviland작은 것과 적은 것이 지니는 가치로 삶의 패러다임을 삼아야만 인류가 지속할 수 있으며, 그 키워드는 동아시아의 전통문화에 있다고 주장했다. <02. '공부'와 '인생 공부'의 차이는>


( 3 ) 그런데 '동아시아 전통문화'에도 패권주의에 물든 주류가 있고 이를 극복하려는 비주류가 있다.

▶ 주류: 유교, 도교, 불교... etc.

비주류: 유가, 도가, 불가... etc.


( 4 ) 소오생이 말하는 '동아시아의 패러다임'은 비주류인 '유가, 도가, 불가 등의 가치관/우주관'을 의미한다. 이 패러다임은 동아시아 중에서도 대한민국에 가장 잘 보전되어 내려온다.


<대장금>, BTS 등의 K-문화가 세계인의 환영을 받는 이유는, 그 '동아시아의 패러다임'을 가장 잘 구현해 냈기 때문이다. 비주류 중의 비주류인 '동아시아의 패러다임'에는 패권주의 주류문화를 극복해 나가는 '지혜'와 '감동'이 담겨 있다.


앞으로 학교에서는 '지식과 정보' 대신 '지혜와 감성'이 담긴 '동아시아의 패러다임'을 가르쳐야 한다. '감동'은 '지식과 정보'가 아니라 '지혜와 감성' 속에서 찾아온다. <03. K- 문화가 환영받는 이유>




문제는 학생들이 이미 주류의 패권주의에 길들여져 있다는 사실. 학생들 대부분은 골치 아프게 책을 읽고 생각하고 글을 써야 하는 '지혜'의 교육 방식보다는, 단편 '지식'을 암기해서 시험 한번 보고 끝내버리는 '지식'의 교육 방법에 익숙해져 있다. 그리고 주류문화에 편승하는 티켓을 발부받아 돈도 많이 벌고 자신의 욕망도 충족하려 한다. 우리는 무엇으로 이들에게 '지혜'를 권유할 것인가.


우선 '지혜'가 무엇인지 알아야 한다. '지식'과 '지혜'의 차이는 무엇인지, 어디에서 비롯되었으며 그 구체적인 실체는 무엇인지, 알아야 한다. 그리고 '나' 자신부터 지혜의 공부를 게을리하지 않으면서, 간절함과 꾸준함으로 우리의 귀여운 학생들도 설득해 나가야 한다. 그래야 하지 않겠는가.


오늘은 그 첫출발이다.

먼저 30초를 투자하여 가벼운 두뇌 운동으로 몸 풀기.

난센스 퀴즈가 아니다. 리얼 fact 차원에서 생각하시면 된다.


<생각해 보기>


[ 문제 1 ]

점 A에서 점 B로 가는 가장 빠른 선은 무엇일까? 직선일까, 곡선일까? 왜 그럴까?


[ 문제 2 ]

수평선은 직선일까 곡선일까?


[ 문제 3 ]

1 더하기 1은 얼마일까?


30초를 투자해 주셨죠?


자, 그럼 본격적으로 '지식'과 '지혜'의 뿌리를 찾아서 시간 여행을 떠나보자. '지혜'를 찾아가는 길은 결코 쉽지 않을 것이다. 천학비재淺學非才의 어리석은 소오생이 독자 여러분의 슬기로움 만을 믿고 감히 그 길을 안내해 드리고자 나섰다. 부디 올바른 방향의 길라잡이가 될 수 있도록 여러분의 질정叱正을 바란다.




 Seeing is Believing


'지식'의 고향은 바다다. 지중해, 특히 섬이 많은 그리스의 에게해 일대다. (지도상의 원 일대 지역) 지금으로부터 약 2,500년 전, '지식'은 이곳의 해양문화에서 탄생했다. 그리스 에게해 일대는 동시에 서구 문명의 근원지이며 '철학'과 '자연과학'의 출발 지점다. 바꿔 말하자면 '지식의 세계'는 바로 곧 서구 문명과 서양학이라는 뜻이기도 하다.


그 첫 번째 문을 연 것은 기하학 geometry이었다. 섬이 많았던 이곳 에게해 일대의 삶에서 가장 중요한 일 중의 하나가 섬과 섬 사이를 이어주는 가장 빠른 항로 찾기였기 때문이다.

점 A에서 점 B로 가는 가장 빠른 항로를 찾고자 했던 사람들의 생각 패러다임은, 수학자이자 철학자인 피타고라스에 의해 정리되었다. 그 유명한 '피타고라스의 정리'다.

여기는 피타고라스가 태어난 에게해 사모스섬의 피사고리오(Πυθαγόρειο) 마을. 피타고라스의 고향인 동시에 '지식'에 기반한 서양학의 고향이기도 하다. 시각문화인 헬레니즘의 중심지다.


'일직선'으로 누워있는 저 눈부신 에게해의 수평선을 보시라! 어떤 생각이 드시는가? 시야가 탁 트여있는 이른바 뷰 맛집이다. 눈앞에 보이는 섬들... 에게해에는 저런 섬이 무수하게 많다. 어떠신가? 저 수평선 너머 또 어떤 곳 어떤 섬이 있을지, 그곳에 가보고 싶지 않으신가?


그리하여 그들은 미지의 세계를 향해 바다로 떠난다. 직선으로 쭉쭉 나아가 탐험하고 도전하는 것을 미덕으로 삼는다. 그리고 에게해에서 익힌 항해술로 지중해 전역으로 진출한다. 소아시아에서 이집트로, 로마에서 유럽 전역으로 진출하며 그들의 생각 패러다임이 전파되어 나간다.




이들, 해양문화의 특성 :


① 시각적이다. 현상학적現象學的이다.

Seeing is Believing! 보는 것이 믿는 것이다. 말이 바로 자연과학의 모토였다.

'지식의 패러다임'은 시각적이고 현상적이다. 눈에 보여야만 믿는다.


② '직선과 평면의 패러다임'이 탄생했다.

가장 빠른 항로를 추구한다는 것은 '직선의 패러다임'이다. 다른 말로 하면 '평면의 패러다임'도 된다. 수평선이 직선이라는 것은 바로 곧 바다도 평면이라는 뜻. '지식'은 '직선과 평면의 패러다임'인 것이다.

▶ 직선과 평면의 세계에서 [1 + 1]은 언제나 2다. 절대적인 '정답', 그것이 '지식'이다.


'지식의 패러다임'은 기본적으로 숫자의 영역이다. 

기하학 geometry은 '땅 geo'과 '측정하다 metry'의 합성어다.

▶ 여기서 '땅'은 '육지'만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이 세상 전체'를 뜻한다.

▶ '측정'의 도구는 무엇일까? '수數'다. '숫자'다.

▶ 피타고라스는 세상의 구성 원리를 숫자로 보았다. 기하학은 이 세상을 '수, 숫자'의 이치로 바라보는 수철학, 수리학이다. 기하학은 자연과학의 출발이요, 모든 서양학의 근간이었다.


geometry를 동아시아에 소개하고 '기하학幾何學'으로 번역한 사람은 명나라의 서광계徐光啓다.(1607)

▷ '기하幾何'란 영어로 'how many' 또는 'how much?', 숫자를 물어보는 단어다. 현대중국어의 '多少?'에 해당한다. '이 세상'을 숫자로 측량하고자 한 geometry취지를 살린 번역이다.


④ '지식'은 이원론, 분리 패러다임의 산물이다.

▶ '측정'을 위해서는 구간과 구간, 영역과 영역을 분리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리하여 무엇이든지 나누어 인식하고자 하는 '분리의 패러다임'이 탄생할 수밖에 없었다. 서구 이원론二元論의 탄생이다.

그리스 로마 신화에는 각자 역할을 맡은 수없이 많은 신들이 등장한다. 가장 대표적인 분리의 패러다임이다. 서양 예술에는 그 신들의 그림과 조각이 수없이 등장한다. 시각 패러다임의 산물이다.


Seeing is Believing.

그것이 모든 '지식'의 출발이었다.



Seeing is not always Believing


대항해시대大航海時代 (15c ~ 17c)가 시작되었다. 지중해에서 대서양으로 무대를 옮긴 서구인들은 미지의 세계를 향해 '직선'으로 쭉쭉 나아가 탐험하고 도전했다. 대서양 서쪽으로 진출했던 콜럼버스가 아메리카 대륙을 '발견'한 것을 기점으로(1492), 유럽 각국은 앞다투어 아메리카와 아프리카로 진출했다. 그 사이 탐험과 도전은 점점 정복과 약탈로 변모했다.

(좌) 마젤란. 그는 사실 지구 일주를 완성하지 못하고 필리핀에서 죽었다. (우) 살인과 약탈을 일삼았던 마젤란을 죽인 필리핀 원주민들의 추장 영웅 라파라푸의 동상. 약탈자 마젤란을 죽인 장소에 서 있다.


서구인들은 대서양에서 인도양으로 태평양으로 거침없이 진출했고, 마젤란 일행은 마침내 지구를 한 바퀴 돌아 제 자리로 돌아왔다.(1522)


어라? 서쪽으로 갔는데 동쪽에서 왔네?

직선 따라갔는데 어떻게 다시 돌아왔지?


지구가 둥글다는 사실이 드디어 입증된 것이다. 그에 따라 '직선과 평면'에 기반한 이들 해양문화의 분리의 패러다임은 커다란 위기에 직면할 수밖에 없었다.


Seeing is not always Believing.

눈에 보이는 것이 전부는 아니었다.

눈에 보이는 것이라고 해서 늘 사실은 아니었던 것이다.




이들, 해양문화의 딜레마 :


① 직선은 알고 보니 직선이 아니라 곡선이었다.

▶ 수평선은 '직선'인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곡선'이었다. 수평선을 섬과 섬 사이, 구간과 구간으로 분리해서 작은 시야로 바라보았을 때는 분명 '직선'이었다. 하지만 그건 착시 현상이었을 뿐, 멀리서 높은 곳에서 거시적이고 총체적으로 바라보면 '곡선'이었던 것이다.

▶ 따라서 직선은 이론에서나 존재하는 가상의 선이다. 현실 세계에서는 끝없이 계속 직진하면 결국 제자리로 돌아온다. 왜? 지구는 둥그니까. 직선으로 우주 공간으로 뚫고 나가면 되지 않느냐고? 불가능하다. 왜? 중력이 존재하니까. 직선으로 출발했더라도 결국은 휘어질 수밖에 없다.

▶ "직선은 인간이 만든 선이고, 곡선은 신이 만든 선이다." ― 안토니 가우디.

   

② 직선이 직선이 아니라는 것은, 평면 역시 평면이 아니라는 이야기다. 

왜? 아 글쎄, 지구는 둥글다니까? 둥근 구형이 어떻게 평면이 될 수 있겠는가? 따라서 평면 역시 이론에서나 존재하는 가상의 단면이다. 그러므로 점 A에서 점 B를 잇는 가장 빠른 선도 직선이 아니라 곡선이다. 점 A에서 점 B를 향해 굳이 직선으로 가겠다면 땅속으로 파고 들어가야 한다.


③ 우리가 사는 세계는 평면이 아니었다. 

이지러진 입체의 공간이었다. 기하학과 자연과학은 딜레마에 빠진다. 한계에 봉착한 것이다.

▶ 이 세상이 직선과 평면의 세계가 아니라면 [1 + 1]도 2가 아닐 수도 있지 않을까?

▶ 기하학의 기본은 '점'이다. 1차원은 선, 2차원은 면, 3차원은 면과 면으로 이루어진 공간이다. 그런데 그 모든 것이 이지러져 버린다면? 설명이 불가능하다. 하물며 그 이후의 4차원, 시간을 극복한 세계는 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④ 새로운 돌파구, 동아시아의 패러다임

물리학자들에게 무엇보다 가장 곤혹스러웠던 점은 이러한 현상을 설명해 줄 수 있는 철학, 즉 패러다임의 부재였다. 고심하던 그들은 음양의 조화에 입각한 동아시아의 패러다임에서 계시를 얻는다.

▶ 1905년, 아인슈타인은 상대성이론을 발표한다.  [1 + 1]은 언제나 2라는 절대성이 깨진 것이다.  [1 + 1]은 2일 수도 있지만 아닐 수도 있다. 모든 것은 상대적인 것이다.

▶ 1913년, 닐스 보어는 동아시아의 태극과 상보성相補性 원리에 입각하여 원자 모형 이론을 발표한다. 양자론의 시작이었다.

보어(좌측 첫 번째)와 아인슈타인. 우측은 보어 연구소의 문장. 닐스 보어의 연구가 동아시아 패러다임에서 계시를 얻었음을 시사해 준다. 영국의 과학자 니덤 J. Needham(1900~1995)은 도가道家 사상과 아인슈타인 상대성원리의 유사성을 극력 주장하였고(니덤,《중국의 과학과 서양》 38쪽), 스티븐 호킹은 양자역학이 지금까지 해놓은 것은 동아시아 사상의 음양 · 태극 · 색즉시공色卽是空의 개념을 과학적으로 증명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고 실토한 바 있다.(이성환 · 김기현, 《주역의 과학과 도》27~ 54쪽)




아인슈타인의 상대론과 닐스 보어의 양자론을 기점으로 물리학은 완전히 새로운 국면에 들어간다. 학자들은 그 이전의 물리학을 고전물리학, 이후의 물리학을 현대물리학이라고 구분했다. 그런데 이것은 단순한 시간의 구분이 아니라 완전히 새로운 이론 체계의 구축을 의미한다.

현대물리학의 주축은 양자물리학이므로, 현대물리학이라는 단어 대신 양자물리학이라고도 부른다.
또 눈에 보이는 세계만을 대상으로 삼은 고전물리학을 '양陽의 과학',
육안으로 보이지 않는 세계도 대상으로 삼은 양자물리학을 '음陰의 과학'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물리학 Physics은 사물의 이치를 탐구하는 학문이다. '완전히 새로운 이론 체계의 구축'이란 말은, 과거의 고전물리학이 삼라만상의 이치를 완전히 잘못 파악했노라고 인정했다는 뜻. 그래서 동아시아 패러다임에 근거한 양자물리학으로 세상 모든 사물의 이치를 재정립해야 한다는 이야기다. 그 말은 무슨 말인가? 우리가 여태껏 배운 대부분의 기존 '지식'이 사실은 허깨비라는 이야기다.


'지식'은 사라져 버리는 것이다. 왜 그럴까? '지식'은 '현상 세계'의 것이기 때문이다. 현상 세계는 끊임없이 변한다. 그러니까 '지식'도 계속 변할 수밖에 없다. 소오생이 '국민학생'일 때 사용했던 '주판 지식'을 지금 사용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박사논문을 쓸 때 사용했던 286 컴퓨터 운용 지식도 AI시대에는 쓸모가 없다. '지식'은 금방금방 사라져 버린다.

(좌) 주판. 고대 메소포타미아에서 만들어져 중국을 거쳐 우리나라에 들어왔다. 1980년대 컴퓨터가 출현하기 전까지 수천 년 동안 주판은 숫자를 세는 필수불가결의 도구였다. 그러나 지금은 박물관에나 가야 만나볼 수 있다. (우) 1987년 국내 최초로 개발된 286급 AT 호환 랩톱 PC(모델명 ‘S-5000’). 그 후 컴퓨터는 엄청나게 빠른 속도로 업그레이드되었다. 그때마다 그 이전의 컴퓨터 운용 '지식'은 계속 새로운 것으로 대체되었다. '지식'은 이렇게 금방 금방 사라져 버리는 것이다.


'지식'은 눈에 보이는 삼라만상의 현상에 대한 것이다. 그러나 삼라만상은 일분일초도 쉬지 않고 끊임없이 변화한다. 그에 따라 '지식'은 순식간에 옛날 것이 되어버리고 '새로운 지식'은 끊임없이 탄생한다. 급변하는 현대의 '지식'은 그 변화 속도가 너무나 빠르다. 나이 든 사람은 그 속도를 도저히 따라잡을 수가 없다. 그런데 사실은 젊은이들이 더 불쌍하다. 변화의 주기가 점점 더 짧아질 터이므로 점점 더 적응하기 어려울 것 아닌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한민국에서는 아직도 낡은 '지식'을 가르치고 있다. 99.9999%의 학생들이 "점 A에서 점 B로 가는 가장 빠른 선은 무엇이냐" 물어보면, 1초의 망설임도 없이 직선이라고 대답한다. 지구는 둥글다고 일깨워준 후에 물어봐도 수평선이 직선이란다. 고전물리학의 낡은 인지 체계 교육이 얼마나 무서운가 알 수 있다. 이 정도면 '교육'이 아니라 '세뇌'가 아닐까?




그러나 '지혜'는 변하지 않는다. 사라지지도 않는다. 왜 그럴까? 삼라만상의 대자연은 끊임없이 변화하지만 아무렇게나 변화하는 게 아니다. 일정한 내재 규율이 있다.

예컨대 달은 끊임없이 변화하지만, 그 내재규율을 잘 살펴보면 한 달을 주기로 반복 변화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변화하는 그 이면의 내재 규율을 깨치는 것이 바로 '지혜'다.


지식의 시간은 흘러가면 그뿐이지만, 지혜의 시간은 다음 해가 되면 봄 여름 가을 겨울, 또다시 유사한 패턴으로 찾아온다. 지식의 달은 매일 변화하지만, 지혜의 달은 한 달을 주기로 규칙적으로 존재한다. 삶을 바라보는 직선 패러다임과 순환 패러다임. 지식과 지혜의 첫 번째 차이다.


옛날 서구인들은 달과 지구, 달과 인간을 따로따로 생각했다. 그 상호 ‘관계’에 대해서는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그러나 동아시아인 들은 일찍부터 달의 변화에 근거한 음력陰曆이라는 달력을 만들어 농경 생활에 활용했다. 지식은 모든 개체를 분리해서 인식하고, 지혜는 상호 연결된 것으로 인식한다. 분리의 패러다임과 결합의 패러다임. 지식과 지혜의 두 번째 차이다. 


동아시아인 들은 어떻게 삼라만상의 내재규율을 살펴볼 수 있었을까? 서구인들은 바다를 중심으로 하는 해양문화였지만, 동아시아는 정착생활을 기반으로 하는 농경문화였기 때문이다. 농경 생활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매년 비슷하게 되풀이되는 계절과 날씨의 변화를 잘 파악하는 일. 새로운 지식보다는 과거의 경험과 통계에서 우러나온 삶의 지혜가 더욱 중요한 법이다. 그러므로 역사란 진보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서구의 직선 패러다임이라면, 역사는 반복 순환하는 것이라고 인식하는 것은 동아시아의 곡선 패러다임인 것이다.


결정적인 차이가 있다. 지식의 패러다임은 교만하다. 대자연을 얼마든지 정복 가능한 대상으로 인식한다. 인간과 세상을 기계처럼 인식하고 모든 것을 끝없이 분류하고 분석한다. 지혜의 패러다임은 겸손하다. 인간은 우주와 대자연의 아주 작은 일부다. 삶의 갈림길마다 늘 겸손하게 길을 묻는다. 그 과정에서 얻는 것이 바로 지혜다.    


'학문'이 추구하는 것은 지식이 아니라 지혜다. 삼라만상 모든 것은 끊임없이 변화하는 이면에 일정한 내재 규율이 존재한다. 내재 규율을 파악하고자 하는 것, 그것이 동아시아에서 말하는 '학문'이다. '학문'은 내재 규율 속에서 '지혜'를 얻고자 하며 '삶의 교훈'을 얻고자 한다.


자연과학의 법칙은 인간 세상, 우리들의 삶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왜? 인간도 대자연의 일부이니까. 그러므로 우리는 언제나 대자연에게서 배워야 한다는 이야기.

무엇을? 우선 한 가지만 예를 들어보자.


점 A와 점 B를 잇는 가장 빠른 선은 무엇일까?


'지식의 세계'에서는 '직선'이 정답이라고 주장한다. 그 세계 주민들의 삶은 '직선 인생'이다. 크고 많은 것, 빠른 것을 추구하여 욕망의 최대치를 추구한다. 예컨대 육법전서를 달달 외워 사법고시에 붙고 검사가 되려 하고 교묘한 수작으로 권력을 찬탈하여 세상을 자기 마음대로 주무르려 한다.


Fact는 무엇일까? 'fact의 세계'에서 알고 보면 그 '직선'은 땅속으로 들어가는 , 자기 무덤을 파는 길이다. 그 결과는 명약관화明若觀火, 불을 보듯 뻔하다.


진실의 세계에서 점 A와 점 B를 잇는 가장 빠른 선은 '곡선'이다.

여기서 우리는 어떤 지혜를 얻을 수 있을까?


노자 老子는 말했다. 

"곡즉전 曲即全" 《노자 22장》

"곡 曲 = 전 全"이란다.


무슨 뜻일까? 소오생은 이렇게 해석한다.

곡선 인생이 best! 


곡선 인생! 

느리게 가는 삶이 충일감을 얻는 가장 빠른 길이다.

작은 것, 적은 것에서 얻는 삶의 즐거움과 기쁨이 가장 크다!


< 계 속 >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우주에는 세 개의 세계가 있다.

매크로의 세계와 마이크로의 세계, 그리고 현상의 세계다.


양자물리학은 그 세계를 숫자로 풀이한다.

동아시아의 문학은 그 세계를 글과 이미지와 노래와 몸짓으로 표현한다.  

수학과 문학은 동전의 양면인 것이다. 다음에는 그 이야기를 해보자.

우리는 여기에서 또 어떤 지혜를 얻을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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