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재'란 무엇일까요?
'삶'과 '죽음'이란 무엇일까요?
양자역학
요새 양자역학이 뜨고 있습니다.
물리학자 김상욱 교수가 양자역학의 시각으로 바라본 '존재와 죽음'의 실체는 이렇게 정리됩니다.
① 우주의 모든 것은 '원자'로 이루어져 있다. 인간도 마찬가지다. 원자로 이루어져 있다.
② '원자'란 '더 이상 쪼갤 수 없는 알갱이'다. 원자의 속성은 변하지 않는다. 끝없이 재배치될 뿐이다.
③ 삼라만상은 '죽음'으로 충만하다. 돌멩이, 땅, 바다 등등 대부분이 다 죽음의 상태다.
④ 그러므로 물리학의 입장에서 보자면 '죽음'이 가장 자연스럽다. 오히려 '생명'이 가장 이상한 상태다.
⑤ 원자는 대부분 죽음의 상태로 있다가 '우연한 이유'로 그 어떤 형태로 뭉쳐서 '생명'이 된다.
⑥ '생명'은 생명력이 다하면 분해되어 다시 원자의 상태로 돌아간다.
⑦ '죽음'이란 '존재'가 형태만 달리 했을 뿐 소멸된 것이 아니다. '원자'로 바뀌어 우리와 함께 존재한다.
'죽음'은 소멸된 것이 아닙니다. 그 육체를 구성하고 있던 원자가 분해되어 다른 형태로 재배치되었을 뿐, 여전히 같은 공간 안에서 함께 존재한다는 이야기입니다.
아인슈타인의 특수상대성이론도 참고할 만합니다. 그 이론의 핵심인 '질량과 에너지의 등가等價 법칙 Law of Mass-Energy Equivalence'을 '존재의 소멸'이라는 관점에서 생각해 보시죠.
모든 질량은 우리가 눈에 보이지 않는 것으로 산화하여 없어졌다 하여도, 사실은 없어진 것이 아니다. 우주 공간에 에너지로 변화한 것뿐이다. 예컨대, 종이를 태우면 금방 우리 시야에서 사라져 버린다. 하지만 없어지는 것이 아니다. 에너지로 변화하여 우주에 여전히 존재한다. 네이버 지식백과, 색즉시공 공즉시색 참고.
'죽음'은 소멸된 것이 아닙니다. 에너지로 변화하여 이 우주 공간 안에 우리들과 함께 여전히 존재하고 있다는 것이 양자역학이 말하고 있는 과학적 fact입니다.
양자역학의 원리를 바탕으로 시를 쓰는 시인들도 점차 늘어나고 있는 것 같습니다.
두 편의 시를 소개하고 낭송으로 감상해 보겠습니다. 여러분은 어떤 시가 더 마음에 드실지 궁금합니다.
<하여간, 어디에선가>
안녕,
지구인의 모습으로는 다들 마지막이야
죽은 사람들은 녹거나 흐르거나 새털구름으로 떠오르겠지
그렇다고 이 우주를 영영 떠나는 건 아니야
생각이라는 것도 아주 없어지진 않아
무언가의 일부가 되는 건 확실해
보이지 않는 조각들이 모여 '내'가 되었듯
다음에는 버섯 지붕 밑의 붉은 기둥이 될 수도 있어
죽는다는 건 다른 것들과 합쳐지는 거야
새로운 형태가 되는 거야
꼭 '인간'만 되라는 법이 어디에 있니?
그러고 보니 안녕 하는 작별은 첫 만남의 인사였네
우리는 '그 무엇'과 왈칵 붙어버릴 테니깐
난 우주의 초록빛 파장으로 번지는 게 다음 행선지야
박승민(1964- ) 시집 《해는 요즘도 아침에 뜨겠죠》(2024)
낭송
<체온의 시>
빛은 해에게서만 오는 것이 아니었다
지금이라도
그대 손을 잡으면
거기 따스한 체온이 있듯
우리들 마음속에 살아있는
사랑의 빛을 나는 안다
마음속에 하늘이 있고
마음속에 해보다 더 눈부시고 따스한
사랑이 있어
어둡고 추운 골목에는
밤마다 어김없이 등불이 피어난다
누군가는 세상은 추운 곳이라고 말하지만
또 누군가는
세상은 사막처럼 끝이 없는 곳이라고
말하지만
무거운 바위틈에서도 풀꽃이 피고
얼음장을 뚫고도 맑은 물이 흐르듯
그늘진 거리에 피어나는
사랑의 빛을 보라
산등성이를 어루만지는
따스한 손길을 보라
우리 마음속에 들어있는 하늘
해보다 더 눈부시고
따스한 빛이 아니면
어두운 밤에
누가 저 등불을 켜는 것이며
세상에 봄을 가져다 주리
문정희 시집 《지금 장미를 따라》(2016)
낭송
수학의 시와 문학의 시
양자역학은, 삶과 우주의 원리를 탐구하는 최신 현대 과학입니다. 동아시아의 패러다임을 기반으로 출발하였지만 다른 점도 있죠. 양자역학은 우주와 대자연이 '죽음'으로 충만하다고 인지합니다. '죽음'이 가장 자연스럽고, '생명'이 오히려 가장 이상한 상태라고 주장한답니다. 삶과 죽음을 별개의 것으로 보는 서구의 이원론, 분리 패러다임의 발로입니다. <09. 이선균과 '아득히 먼 곳'>
반면에 동아시아의 일원론, 결합의 패러다임에서는 모든 것을 하나로 생각합니다. 예컨대 불교에서는 삶과 죽음을 하나의 결합체로 인식하죠. 대자연 자체를 하나의 거대한 생명체로 인지하기 때문에, 어느 한 생명체의 '죽음'이란 다시 대자연의 일부로 살아가는 또 다른 형태의 '삶'이라고 생각합니다. 무엇이 더 합리적이고 과학적일까요? 아니, 무엇이 슬픔을 더 따스하게 위로하고 허전함을 더 오롯이 채워줄까요?
'수학'과 '문학'은 삶과 우주의 오묘한 원리를 표현해 내는 특별한 언어라는 점에서 공통점을 지닙니다. 이를 테면 동전의 양면이라고 할까요? 자세한 내용은 <06. 오, 캡틴! 마이 캡틴!>에서 이야기했으니 궁금하시면 참고하시면 좋을 듯요.
하지만 다른 점도 있어요. '수학'은 양자역학의 언어이고, '문학'은 동아시아 패러다임의 언어이니까, 그 느낌이 다를 수밖에 없습니다. 아 참, 제가 여기서 말하는 '문학'이란 서구의 literature 개념이 아니라, 동아시아의 전통 학문에서 말하는 '文學'의 개념이에요. 어떻게 다르냐고요? 제 브런치 북 [문학으로 인문학 톺아보기] 참고하시면 눈치채시리라 믿습니다.
여기 소개한 두 편의 시는 모두 양자역학의 원리를 바탕으로 쓴 것 같습니다. 제 생각에 박승민 시인의 <하여간, 어디에선가>는 보다 수학적인 분위기고요, 문정희 시인의 <체온의 시>는 보다 동아시아의 문학적 분위기를 풍기는 것 같아요. 여러분은 어떤 분위기의 어떤 시가 더 마음에 드시나요?
제 마음과 정신과 영혼이 담긴, 육체라는 옷을 벗어버리는 그날을 생각해 봅니다. 여러분은 무엇이 되고 싶으신가요? 저는 빛이 되고 싶습니다. 님의 마음속에 스며 들어가 따스한 체온이 되어주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