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우 이선균 님이 유명幽明을 달리 했다. 최진실 씨 때와는 또 다른 느낌으로 큰 충격을 받았다. 하루 종일 충격에서 헤어 나오기 힘들었다. 많은 사람들이 나처럼 충격과 슬픔에 잠겼던 모양이다. SNS에는 그가 불렀던 <아득히 먼 곳>이라는 노래가 올라와 순식 간에 엄청난 조회 수를 기록했다. 노래를 들으니 더욱 슬프고 허전하다. 님의 죽음을 깊이 애도하며, 나 자신을 포함하여 슬프고 허전한 모든 이들의 마음을 위로하기 위해 이 글을 쓴다.
1. 질량과 에너지
존재란 무엇일까? 죽음은 또 무엇일까?
형이상학적인 이야기는 하지 말자. 첨단 현대 과학의 시각에서 이야기해 보자.
딸내미가 15년 동안 반려견으로 키우던 뭉치가 죽었다. 딸내미의 슬픔은 이만저만한 것이 아니었다. 처음에는 거의 식음을 전폐하다시피 했다. 왜 아니겠는가. 이선균 님처럼 일면식도 없는 사람이 떠나가도 슬프고 허전한데, 늘 접촉하며 지내던 존재가 사라졌으니 왜 허전하고 슬프지 않겠는가. 어쩌다가 한 번씩 대면하는 가족이나 지인을 잃은 것보다 훨씬 더 허전할 수도 있다.
딸내미의 상태는 몇 달이 지나자 조금 나아졌다. TV 프로그램 '알쓸신잡'에 출연했던 물리학자 김상욱 교수가 '유퀴즈온더블록'이란 프로그램에 출연해서 한 말에 큰 위로를 얻었단다. 너튜브에서 검색하여 그의 이야기를 들어보았다. 김상욱 교수의 말을 대충 정리해 보면 이렇다.
① 우주의 모든 것은 '원자'로 이루어져 있다. 인간도 마찬가지다. 원자로 이루어져 있다.
② '원자'란 '더 이상 쪼갤 수 없는 알갱이'다. 원자의 속성은 변하지 않는다. 끝없이 재배치될 뿐이다.
③ 삼라만상은 '죽음'으로 충만하다. 돌멩이, 땅, 바다 등등 대부분이 다 죽음의 상태다.
④ 그러므로 물리학의 입장에서 보자면 '죽음'이 가장 자연스럽다. 오히려 '생명'이 가장 이상한 상태다.
⑤ 원자는 대부분 죽음의 상태로 있다가 '우연한 이유'로 그 어떤 형태로 뭉쳐서 '생명'이 된다.
⑥ '생명'은 생명력이 다하면 분해되어 다시 원자의 상태로 돌아간다.
⑦ '죽음'이란 '존재'가 형태만 달리 했을 뿐 소멸된 것이 아니다. '원자'로 바뀌어 우리와 함께 존재한다.
요즈음 너튜브에서 한참 핫 hot한 주제인 양자역학 이야기였다. 그에 따르면 뭉치의 존재는 소멸된 것이 아니다. 그 육체를 구성하고 있던 원자가 분해되어 다른 형태로 재배치되었을 뿐, 여전히 같은 공간 안에서 함께 존재한다는 이야기다. 그게 과학적 fact다. 딸내미는 그 이야기를 듣고 많은 위안을 얻었단다.
그렇다면 아인슈타인의 특수상대성이론을 떠올리면 어떨까? 좀 더 위안을 얻을 수 있지 않을까? 그 핵심은 '질량과 에너지의 등가等價 법칙 Law of Mass-Energy Equivalence'이다. 다 아는 이야기겠지만 관점을 조금 바꾸어 '존재의 소멸'이라는 측면에서 그 이론을 설명해 보자.
모든 질량은 우리가 눈에 보이지 않는 것으로 산화하여 없어졌다 하여도, 사실은 없어진 것이 아니다. 이 우주 공간에 에너지로 변화한 것뿐이다. 예컨대, 종이를 태우면 금방 우리 시야에서 사라져 버린다. 하지만 없어지는 것이 아니다. 에너지로 변화하여 우주에 여전히 존재한다. 네이버 지식백과, 색즉시공 공즉시색 참고.
이선균 님의 존재는 소멸된 것이 아니다. 에너지로 변화하여 이 우주 공간 안에 우리들과 함께 여전히 존재하고 있다. 그것이 필자가 얘기하고 싶은 첫 번째 과학적 fact다.
2. 색즉시공과 양자역학
그래도 여전히 슬프고 허전하다. 죽었는데, 존재가 소멸된 것이 아니라니... 아직은 크게 와닿지 않는다.
이번에는 현대물리학 이론과 매우 유사한 불가佛家의 이론과 더불어 살펴보고자 한다.
먼저 에피소드 하나를 소개한다. 아인슈타인은 훗날 불교 경전을 접하고, 자신의 이론이 불교에서 말하는 '색즉시공色卽是空, 공즉시색空卽是色'을 증명한 것임을 깨닫고 크게 놀란다. 그는 더 많은 불교 경전을 접한 뒤에 자서전에 이렇게 썼다고 한다. "21세기를 바라보는 인류의 미래의 종교는 현대 물리학에 부응하는 종교여야 한다. 나더러 종교를 택하라고 한다면 불교밖에 없다." 네이버 지식백과, 색즉시공 공즉시색 참고.
현대물리학은 왜 불교 사상과 유사한 것일까? 시간과 공간에 대한 입장이 불교 사상과 기본적으로 동일하기 때문이다. 고전물리학에서의 시간과 공간은 절대적이다. 그러나 현대물리학과 불교는 시간과 공간을 상대적으로 인식한다.
'불교佛敎'의 '불 佛'은 '깨달음', 또는 '깨달은 자'라는 뜻이다. 무엇에 대한 깨달음일까? '우주의 이치'에 대한 깨달음이다. '우주 宇宙'란 원래 '시간과 공간'이라는 뜻. 풀어서 말하자면 '시간과 공간을 초월한 4차원의 세계'다. 그 개념 속에는 '존재'와 '죽음'이 모두 포함되어 있다. 시공을 초월하면 존재와 죽음의 경계도 사라지기 때문이다.
깊은 사유와 명상을 통해 그 세계에 대한 큰 깨달음을 얻은 자를 '붓다 Buddha', 우리말 음역으로는 '부처'라고 한다. 또 그 이치를 공부하면서 대중에게 가르치는 존재를 우리말로 '큰 스님'이라고 한다. '스님'은 '스승님'의 줄임말이다. 중국말로는 '大師', 티베트말로는 '라마'다. '달라이라마'는 '바다처럼 넓은 지혜를 가진 큰 스승님'이란 뜻이다.
서방의 어느 기자가 제14세 달라이라마에게 물었다. "불교란 무엇입니까? 불교 용어가 아닌 일반 용어로 설명해 주실 수 있나요?" 달라이라마의 대답은 이랬다. "불교란, 한 마디로 말해서 science, 과학입니다."
불교와 물리학. 그들의 탐구 대상은 하나였다. 삼라만상, 모든 것이었다. 사유와 명상을 즐겼던 스님들은 이를 테면 동아시아의 이론 물리학자였던 셈. 그들은 존재와 죽음을 어떻게 인식했을까? '색즉시공, 공즉시색'이라는 말에 그들의 인식이 담겨있다.
'색즉시공'은 《반야심경般若心經》이라는 불교 경전에 나오는 말이다. '반야 般若'는 팔리어 판냐 paññā의 음역. 의역하면 '지혜'라는 뜻. 이 4글자는 [ 색즉/ 시공 ], 이렇게 읽으면 안 된다. [ 색/ 즉시/ 공 ], 이렇게 띄어 읽어야 해석이 된다.
▷ '즉시 卽是'는 '등가等價 equal'라는 뜻. A卽是B, A=B, A는 B이다.
▷ '색 色'은 '우리 눈에 보이는 현상의 세계'를 말한다. 아인슈타인이 말한 '질량/물질의 세계'다.
▷ '공 空'은 '비어있다'는 뜻이 아니다. 아인슈타인이 말한 '에너지의 세계'다.
[ 정리 1 ] '색 色(질량)' = '공 空(에너지)'
[ 정리 2 ] '죽음'이 '존재의 소멸'이라는 생각은 '조각 정보 piece of information'에 의한 인식의 오류다. '죽음'은 단지 원자가 재배치된 것일 뿐, 여전히 우리와 함께 존재한다.
후세 대승불교에서는 '공 空'을 끊임없이 변화하는 '무상無常의 세계'로 해석하기도 한다. ‘무상無常’이라는 말은 우리에게 너무나 친숙하다. 인생무상! 우리 입에 늘 오르내리는 말 아니던가. 너무나 친숙한 단어다. 하지만 그 뉘앙스는 그다지 밝은 편이 아니다. 일반적으로 ‘허망함, 허무함’의 의미로 생각한다. 그러나 원래는 그런 감정의 성분과는 거리가 멀다. 사실은 대단히 과학적인 영역의 어휘다.
1996년, 중앙아시아 천산 산맥에 있는 천지天池를 찾아간 적이 있었다. 만년설 덮인 해발 5,000m의 보고타 봉우리 아래, 신화처럼 숨어있는 환상의 호수였다. 불빛 하나 없었던 그날 밤, 황홀하게 아름다운 별들의 대 축제가 밤하늘에 펼쳐졌다. 이 우주에 그렇게 많은 별이 있으리라고는 정말이지 꿈에도 상상하지 못했다. 여기저기 하얀 선을 그으며 별은 마구 쏟아지는데, 나는 그 신비로운 밤하늘의 아름다움에 취해서 밤새도록 호숫가에 주저앉아 펑펑 눈물을 흘렸다.
그런데, 내가 눈물을 흘리며 바라본 그 별들의 향연은 사실은 ‘공空’의 세계다. 그게 과학적 fact다.
그게 무슨 말일까? 그날 밤 내가 보았던 별은 거의 모두 지구로부터 수 만 광년光年 이상의 거리에 떨어져 있다. 그런데 '광년'이 무슨 뜻인가? 빛이 1년 동안 달려가는 거리 아닌가. 그렇다면 그날 밤 내가 보았던 그 별들은 지금 현재 존재하고 있는 별이 아니라, 몇 만 년 전의 별이 쏘아 보낸 빛의 허상이라는 이야기다. 그 별들은 어쩌면 그동안 모두 소멸되어, 지금 현재는 이 우주에 존재하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러므로 밤하늘에 펼쳐진 별들의 세계, 그 '현상 세계'는 ‘공의 세계'라는 말이다. 그게 '색즉시공'의 이치다.
그러나 그 별이 소멸되었다고 단정할 수도 없다. 지금도 그 별은 여전히 존재하고 있을 수도 있다. 즉, 지금 현재 눈앞에 펼쳐진 그 '빛의 허상(파동)'이 실제 '현상(입자)'일 수도 있다는 이야기. 실제로 아인슈타인은 광전효과를 설명하면서, 파동(공)인 줄로만 알았던 빛도 입자(색) 임을 밝혀냈다. 그것이 '공즉시색'의 이치다.
프랑스의 이론 물리학자 드브로이 LouisVictordeBroglie (1892~1987)는 한 발 더 나아가 입자(색)인 줄로만 알았던 전자도 파동(공)이라는 가설을 제시한다. 즉 모든 물질은 파동(공)이면서 동시에 입자(색)라는 이중성을 지니고 있다는 이야기다. 양자 물리학자들은 전자를 이용한 이중 슬릿 실험을 통해서 그 사실을 증명한다. 이때, 그들은 너무나도 놀랍고 신기한 현상을 발견한다.
입자의 세계(색)와 파동의 세계(공)는 분명 동시에 함께 존재하는데,
신기하게도 관찰하는 순간에는 하나는 사라지고 다른 하나만 보였던 것이다.
이 말은 무슨 뜻인가? 우주는 파동(공)으로 존재하지만, 관찰할 때는 입자의 세계(색)로 변해버린다는 말이다. 바꿔 말할 수도 있다. 우주는 입자의 세계(색)로 존재하지만, 관찰할 때는 파동의 세계(공)로 변해버린다. 색즉시공이면서 동시에 공즉시색이라는 불가의 이론이 과학적으로 정확하게 증명된 것이다. 과연 아인슈타인이 탄복할 만하지 않은가!
3. 관찰
필자는 지금 무슨 이야기를 하자는 것일까? 양자역학도 아니고 불교 이야기도 아니다. 이선균 님은 소멸된 것이 아니라 지금도 여전히 우리 옆에 존재하고 있다는 과학적 fact를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다.
나는 20여 년 전부터 인터넷으로 동영상강의를 진행해 왔다. 보통 3년에 한 번 동영상을 다시 찍었다. 학생들은 미리 찍어놓은 그 동영상을 보고 난 후, 수강 소감을 편지 형식의 보고서로 제출했다. 그런데 많은 학생이 착각을 한다. "선생님, 날씨가 갑자기 추워졌죠? 기침을 하시던데 감기 조심하셔요." 분명 미리 찍어놓은 동영상인 줄 알 텐데도, 열심히 수강하다 보면 무의식 중에 실시간 강의로 인지하게 되는 모양이다.
그러다 보니 엉뚱한(?) 생각이 들었다. 만약 내가 죽는다고 해도 그 사실을 알리지 않으면 어떻게 될까? 학생들은 여전히 나의 '존재'를 믿고, 열심히 나한테 말을 걸며 편지 보고서를 쓰겠지? 이순신 장군의 죽음을 모르고 치열하게 싸워 노량에서 승리했던 조선의 수군들처럼. 그런데 만약 학생들이 동영상강의를 수강하지 않는다면 나는 그들에게 '죽음'은커녕 아예 '존재'하지도 않는 인물 아닐까?
아인슈타인의 '질량과 에너지의 등가 법칙'을 다시 한번 생각해 보았다. '죽음'이란, 육체라는 질량이 재가 되어 사라지는 현상이다. 하지만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에너지로 바뀐단다. 다시 말해서 육체라는 입자(색)가 파동(공)으로 변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어떻다고? '관찰'을 하면 다시 파동(공)이 입자(색)로 나타난다고 하지 않는가! 그렇다면...
키포인트는 '관찰'이다. '존재'는 '관찰'을 통해서 비로소 나타난다.
나는 학생들의 '동영상강의 수강'이라는 '관찰'을 통해서 비로소 존재한다. 내 육체가 죽더라도 누군가 동영상을 보며 관찰한다면 나는 존재한다. 반대로 내 육체가 살아있더라도 아무도 '동영상 시청'이라는 '관찰'을 하지 않는다면 내 존재는 나타나지 않는다는 이야기다. 만물은 양자兩者 간의 관계가 이어져 있을 때만 존재하는 것이다.
'관찰'은 그냥 단순하게 눈으로 보는 행위가 아니라, 치열하게 부딪치는 행위다. 문제의식을 가지고 있어야 하며, 애정과 관심이 있어야 한다. 무엇보다 정성으로 꾸준하게 지속해야 가능한 실천의 행위다.
현대인들은 양자역학의 힘을 빌려서 아주 쉽게 누군가의 존재를 '관찰'할 수 있다. 무엇을 통해서? 양자역학의 원리를 이용한 현대의 첨단 기기를 통해서! 영화나 TV나 동영상이 아주 쉽게 우리들 앞에 파동의 세계(공)를 입자의 세계(색)로 바꿔주고 있지 않은가! 이제는 조금의 애정과 관심만 있어도 '관찰'을 통해 자신이 원하는 상대방을 아주 쉽게 존재하게 할 수 있는 시대가 된 것이다.
나는 이선균 님을 직접 만난 적이 한 번도 없다. 그가 출연한 영화 몇 편만 보고 그의 '존재'를 인지했을 뿐이다. 만약 그가 유명을 달리했다는 소식을 접하지만 않았다면, 앞으로도 계속 그가 출연한 영화나 드라마를 보면서 그의 존재를 믿을 게 틀림없다.
나는 이번에 그가 부른 <아득히 먼 곳>이라는 노래를 처음 들었다. 예전에 다른 사람이 부른 것으로 들어본 적은 있지만, 그때는 '관찰'하지 않았기 때문에 나에게 그 노래를 부른 '다른 사람'은 존재하지 않았다.
아무튼 이선균 님은 그 노래를 <나의 아저씨>라는 드라마에서 불렀단다. 그렇게 알게 된 그 드라마를 5시간 반 짜리 축소판으로 밤을 새워서 보았다. 그렇다면 나에게 있어서 이선균 님의 존재는 '아득히 먼 곳'으로 사라진 것이 아니라, 오히려 요 며칠 동안 늘 함께 존재했던 것 아니겠는가? 앞으로도 애정과 관심으로 꾸준히 '관찰'하기만 한다면 계속해서 함께 존재할 수 있다는 이야기다.
혹자는 이의를 제기할지도 모르겠다. 그건 당신 혼자만의 얘기 아니냐고. 그럴지도 모른다. 하지만 절대성의 논리란 없다. "1 더하기 1은 무조건 2"라는 고전 역학의 절대 논리는 이미 양자역학에 의해 깨졌다. 모든 것은 상대적이다. '내'가 '관찰'하지 않으면 상대방은 존재하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관찰'하기만 한다면 상대방은 입자(색)가 되어 나타나서 언제나 존재한다. 그것이 필자가 얘기하고 싶은 두 번째 과학적 fact다.
4. 물은 흘러갔지만 지금도 흐르고 있다.
존재란 무엇일까? 죽음은 또 무엇일까?
조금 나아졌지만, 그래도 아직은 슬프고 허전하다. 여전히 피부에 와닿지 않는다.
그렇다면 이번에는 문학文學으로 이야기해보자.
뜬금없이 웬 문학? 하지만 엉뚱한 이야기가 아니다.
어려운 과학 이론도 문학으로 이야기하면 훨씬 쉽고 재미있게 받아들여질 수 있다.
동아시아에서는 문학文學도 과학과 불가분의 관계를 지닌다. '물리학'이란 무엇인가? '사물의 이치를 정량적定量的으로 탐구하는 공부'다. 동아시아에서 말하는 '문학文學'이란 무엇인가? '사물의 이치를 정성적定性的으로 쉽고 재미있게 표현하는 학문'이다. (졸저, 《문학으로 인문학 톺아보기》브런치북) 불가佛家와 문학과 물리학. 그들의 탐구 대상은 결국 하나인 것이다. 그것이 동아시아의 일원론 패러다임이다.
동아시아의 모든 작가, 모든 문학 작품이 다 그렇다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앞서 2회에 걸쳐 소개한 동파의 <적벽부>는 양자역학이나 색즉시공보다 훨씬 쉽고 재미있고 감동적으로 우리를 위로해 준다. 이 작품을 동아시아 문학의 최고봉으로 꼽을 수 있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적벽부>의 주제는 '존재의 소멸'과 '우주의 항상성恒常性'이다.
동파를 따라 적벽으로 놀러 온 나그네는 '존재의 소멸'을 이야기한다. 적벽대전 당시의 영웅호걸들도 시간 속에 소멸되어 버렸으니 하물며 초야에 묻혀 지내는 자신의 존재는 더욱 보잘것없다는 생각, 나아가 끊임없이 변화하며 생로병사의 과정을 겪는 인간 존재의 슬픔을 토로한다.
그 말을 들은 동파는 나그네에게 '우주의 항상성'을 이야기해 준다. 양자역학을 전공하는 학자나 불교의 선승들은 이 부분에서 모두 언어의 한계를 느낀다. 그러나 동파는 아주 쉬운 예를 들면서, 귀에 쏙쏙 들어오게 설명한다. 그 대목을 읽어보자.
그대도 이 물과 저 달을 잘 알고 계시렸다?
흘러가는 것은 모두 다 이 물처럼 흘러가게 마련이오만,한 번도 우리 곁을 떠난 적이 없소이다.
차고 기우는 것은 모두 다 저 달처럼 변화하게 마련이오만, 결코 줄어들거나 늘어난 적은 없소이다 그려.
客亦知, 夫水與月乎? 逝者如斯,而未嘗往也;盈虛者如彼,而卒莫消長也。
동파는 물은 흘러가버렸지만 여전히 우리 옆에서 흐르고 있다고 말한다. 심오한 우주의 철리를 너무나 멋진 비유로 너무나 쉽게 설명하고 있다. 그렇다. 흘러가버린 물은 바다에서 증발하여 구름이 되었다가 빗물로 화하여 다시 우리 옆에서 흐르고 있다.
양자역학적으로 말하자면, 물을 구성하고 있던 원자가 분해되어 다른 형태로 재배치되고 있을 뿐, 물은 한 번도 우리 곁을 떠난 적이 없다는 이야기다. 물뿐만이 아니다. 이 세상 모든 것이 마찬가지 이치로 늘 우리와 함께 한다. 왜냐하면 모든 것의 구성 요소인 원자는 영원불멸하기 때문이다. 이것이 '우주의 항상성'이다.
그런데 이 '우주의 항상성'은 '관찰'하지 않으면 성립하지 않는다. 다음 구절을 읽어보자.
변화하는 측면으로 관찰하면, 천지 간에 모든 일이 눈 깜짝할 사이라도 변화하지 않는 때가 없겠으나,
변화하지 않는 측면으로 '관찰'하면,만물이 나와 함께 끝이 없는 법이라오.
蓋將自其變者而'觀'之,則天地曾不能以一瞬; 自其不變者而觀之,則物與我皆無盡也。
동파는 말한다. '관찰 觀'을 해야 만물이 나와 함께 끝이 없는 법이라고. 그런데 어떻게 관찰을 해야 할까? 현대인들은 양자역학의 원리를 응용한 첨단 기기를 통해서 '관찰'할 수 있다. 그러나 동파 당시에는 그런 첨단 기기가 있을 리 없지 않은가. 무엇으로 관찰해야 파동의 세계(공)를 입자의 세계(색)로 바꿔서 볼 수 있을까?
강 위에 맑은 바람, 산간의 밝은 달을 보시오 그려.
귀로 접하면 소리가 되어주고, 눈으로 만나면 색조色調를 이루나니,
제아무리 마음대로 엄청나게 가진다 한들 그 누가 시빌是非걸며,
제아무리 마음대로 가져다가 쓴다 한들 없어지질 아니하니,
이게 바로 조물주의 무진장無盡藏한 보고寶庫라서 그대와 내가 함께 즐기는 것 아니겠소?
惟江上之清風,與山間之明月,耳得之而為聲,目遇之而成色,取之無禁,用之不竭,
是造物者之無盡藏也,而吾與子之所共適。
동파는 대자연 속에서 만나고 싶은 님의 존재를 '관찰'한다. 님의 육체는 '죽음'을 통해 하나하나의 원자로 분해되어 대자연 속에서 또 다른 모습으로 재배치되었기 때문이다. 그 원자는 맑은 바람의 일부가 되었을 수도 있고, 밝은 달의 일부가 되었을 수도 있다.
그 님의 존재를 귀로 '관찰'하면 '소리'라는 파동의 세계 속에서 나타나고, 눈으로 '관찰'하면 입자의 세계 속에서 칼라풀하게 나타난다. 우리가 아무리 마음껏 '관찰'해도, 언제 어디서 어떤 방법으로 '관찰'해도, '관찰'하기만 하면 님의 존재는 대자연과 함께 영원불멸하다. 양자역학의 과학적 fact와 정확하게 일치하지 않는가! 그러면서도 너무나 멋진 문학적 표현 아닌가!
한 가지, 양자역학과 다른 점이 있다. 김상욱 교수는 우주와 대자연은 '죽음'으로 충만하다고 했다. 그래서 물리학의 입장에서 보자면 '죽음'이 가장 자연스럽고, '생명'이 오히려 가장 이상한 상태라고 주장했다. 삶과 죽음을 별개의 것으로 보는 서구의 이원론, 분리의 패러다임이다.
동아시아의 전통 패러다임, 특히 불교에서는 모든 것을 하나로 바라본다. 불이不二 사상에 의하면, 인간과 대자연과 우주는 별개의 존재가 아니다. 인간은 대자연의 일부이며, 또 다른 형태의 우주다. 삶과 죽음도 마찬가지. 모든 생명체의 죽음이란 대자연이라는 생명체의 일부로 살아가는 또 다른 형태의 삶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