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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오생 Dec 31. 2023

08. 사랑이 어떻게 변하니?

〈적벽부赤壁賦〉감상 (2)

※ <07. 맑은 바람 솔솔 부니>에서 이어집니다.

번역을 인용할 때는 반드시 출처를 밝혀주시기 바랍니다.


오늘은 작품 감상이다. 원문과 발음은 <07. 맑은 바람 솔솔 부니>를 참고하시기 바란다. 



[1-1 단락] 적벽으로 유람을 나가다


임술년 가을날 칠월 기망일旣望日, 소자蘇子는 객과 함께 배를 띄워 적벽赤壁 아래로 유람을 나갔다

 

맑은 바람 솔솔 부니, 물결 또한 잔잔하다. 술을 들어 그대에게 권하노니,

 <명월明月>의 시가읇조리고, <요조窈窕>의 장구章句노래해 보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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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망일望日'은 '음력 보름날'이다. '기망' 또는 '기망일'은 보름 다음날, 즉 음력 16일을 말한다.


아래의 그림은 조선의 겸재 정선敾이 1742년에 그린 것이다. 10월 보름날, 경기도 관찰사 홍경보洪景輔는 양천 현령인 정선과 연천 현감 신유한申維翰을 불러서, 연강漣江(임진강)에서 함께 뱃놀이를 한다. 그날 밤의 유람을 정선이 그림으로 그리고, 홍경보와 신유한이 글로 써서 <연강임술첩漣江壬戌帖>이라는 화첩을 벌 만들어 각자 하나씩 소장한다.

누구 흉내를 낸 것일까? 당연히 소동파의 적벽 유람 흉내를 낸 것이다. 그날 밤 임진강에 배를 띄운 그들은 〈적벽부를 낭송했을까, 안 했을까? 확실한 증거는 없지만 당연히 낭창한 목소리로 낭송했을 게 틀림없다. 어떻게 짐작할 수 있느냐고?


이 그림의 제목은 <우화등선 羽化登船>. 강가에 있는 우화정羽化亭이라는 정자 앞에서 배를 탔다는 뜻이다.  〈적벽부〉에서 바로 이다음 부분에 나오는 '날개까지 돋아나서 신선으로 변하는 듯! 羽化而登仙'이라는 구절에서 '신선 선仙'을 '배 선船'으로 바꾼 것이다. 이렇게 발음을 흉내 내었으니, 당연히 그 원문을 소리 내어 낭송하고 또 낭송하며 즐기지 않았겠는가!


그런데, 그렇게 동파의 흉내를 낸 사람들이 어디 그들뿐이겠는가? 남의 나라 조선의 선비들이 그러했으니, 중국의 문인들은 또 오죽했겠는가? 동아시아의 문인들은 늘 그렇게 〈적벽부를 낭송하고 또 낭송했다. 마치 그래야만 지성인 자격을 인정받을 수 있다는 것처럼. 그런 모습이 동아시아 선비들의 풍류요 낭만이었다.



[1-2 단락] 적벽의 풍광


잠시 후였다.

달이 동산東山 위에서 떠올라 북두칠성과 견우성 사이에서 어슬렁거렸다.

하얀 이슬이 강을 가로지르더니 수광水光이 하늘과 맞닿았다.

이 갈대 한 잎 떠가는 대로 몸을 맡겨, 저 만경창파 아득한 곳을 날아가 보리라!

아하! 이 호호 탕탕함이여, 허공에 훌쩍 떠서 가이없는 그곳까지 바람 수레 몰고 가듯!

오호라! 이 표표飄飄함이여, 속세를 떠나설랑 홀로이 우뚝 서니, 날개까지 돋아나서 신선으로 변하는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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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바다처럼 넓은 장강의 야경을 묘사한 부분이다. 이 단락의 가장 큰 특징은 '의인화 擬人化' 수법이다.


▶ 둥근달이 동산 위에서 나오더니(出), 북두칠성과 견우성 사이를 배회한다(徘徊). 여기서 '출 出'이나 '배회 徘徊'는 명사나 형용사가 아니라, 동사다. 즉 달이 살아있는 생명체처럼 어슬렁거리며 걸어 다닌다는 것이다. 이 얼마나 역동적인 모습인가!


▶ '하얀 이슬 白露'은 한 술 더 떠서, 그 넓은 강을 '가로질러간다 橫'. 드넓은 장강의 조용한 강물 위에 달빛에 비치면서 하얀 윤슬이 보인다. 그런데 여기서의 '횡 橫'은 형용사가 아니라 동사다. 가만히 제 자리에서 빛나고 있는 정적靜的인 모습이 아니라는 이야기다. 반짝반짝 빛나는 윤슬이 강을 가로질러 달려가고 있다는, 굉장히 동적動的인 모습이다.


윤슬이 왜 달려간다는 걸까? 강물이 넓기 때문이다. 드넓은 강물의 끝에서 끝으로 얼굴을 돌리면서 바라보는 그 시선의 빠른 움직임을 따라, 윤슬도 재빨리 나타났다가 순식간에 사라지는 광경을 묘사한 것이다. 그런데 윤슬은 왜 다시 사라져 버리는 걸까? 모든 사물은 관찰할 때만 그 모습을 드러내 보이기 때문이다. 윤슬도 마찬가지. 관찰할 때만 나타났다가 관찰이 끝나면 사라져 버린다. 만물은 양자兩者 간의 관계가 이어져 있을 때만 존재하는 것이다.


▶ '수광水光이 하늘과 맞닿았다'는 구절에서 '맞닿을 접 接'이라는 글자도 동사다. '물빛 水光'이 그냥 하늘과 맞닿아있는 상황을 형용한 것이 아니라, 하늘로 높이 높이 치솟아 오르면서 맞닿고 있는 역동적인 장면을 포착한 거다.


위에 나오는 하얀 이슬이 강을 가로질러(橫) 달려가는 모습이 수평적인 움직임이라면, 하늘로 올라가 맞닿고(接) 있는 모습은 수직적이다. 수평과 수직의 움직임이 교차하면서 상당한 속도감이 발생한다. 그만큼 강이 넓고, 그만큼 배가 빠르며, 그만큼 하늘로 날아 올라가는 느낌이라는 이야기다.


여러분의 눈앞에 그 역동적인 광경이 펼쳐지시는가? 그 장면에 충분히 공감이 가시는가? 그 묘사와 표현이 중계방송해주고 있는 그 광경이 눈앞에 선하게 떠오른다면, 그다음 구절을 다시 한번 낭송해 보시라.


아하!

이 호호 탕탕함이여! 

허공에 훌쩍 떠서 가이없는 그곳까지 바람 수레 몰고 가듯!


오호라!

이 표표飄飄함이여

속세를 떠나설랑 홀로이 우뚝 서니, 날개까지 돋아나서 신선으로 변하는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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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말로 바람 수레를 몰고 가는 느낌이 들지 않으시는가? 정말로 날개가 돋아 신선이 되는 느낌이 아니신가? 이러한 기법을 서구 패러다임에서는 '죽어있는 대자연을 살아있는 사람처럼 묘사한다'라고 해서 '의인화 수법'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동아시아 패러다임에서는 '의인화'가 아니다. 대자연은 무생물이 아니라 원래부터 살아 있는 생명체이기 때문이다. 동파는 대자연의 생명력이 넘치는 그 순간을 포착했을 뿐이다. 그리고는 날개가 돋아나서 신선으로 변한다(羽化而登仙). 대자연과 하나가 되어 그 속에서 약동하는 에너지를 얻는다.



[2 단락] 동파의 노래, 나그네의 퉁소 반주


그리하여 술을 마시니, 한없이 즐거워져 노래 한 곡 부르노라!


삿대는 계수나무, 돛대는 목란木蘭이라!

허공 같이 밝은 물살 헤치고서, 흐르는 저 빛살을 거슬러 오르노라!

아득한 곳 떠나가는 나의 마음이여, 하늘 끝에 계시오는 그 님을 바라보네.


그때였다. 객 중의 한 손이 퉁소를 불며 노래에 맞추어 화답을 하였다.


흑흑- 흐느끼는 그 소리,

원망함인가 그리움인가, 흐느낌인가 하소연인가!

여음餘音은 실처럼 가냘프게 끊어지지 않으니,

그윽한 골짜기의 이무기가 꿈틀대며 춤을 추고,

외로운 돛단배의 청상과부 숨죽이며 흐느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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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이 난 동파가 낭창한 목소리로 노래를 부른다. 문득 일행 중 한 사람이 퉁소를 불어 반주를 해준다. 여기서 특히 흥미로운 점이 있다. '글자'라는 도구로 '소리'를 '녹음'해서 독자에게 들려주고 있는 장면이다. 중당中唐 시대의 백거이白居易(772~846)가 〈비파행 琵琶行〉에서 시도했던 기법이지만 훨씬 더 절묘하다. 구체적인 악보는 알 수 없다. 하지만 그 퉁소 가락이 어떤 멜로디인지 귀에 선히 들려오는 것 같다.




[3-1 단락]  놀란 동파의 질문


소자蘇子는 안색을 바꾸고, 옷깃을 바로 하며 단정히 앉아 그에게 물어보았다.

“퉁소 가락이 어찌 그리 슬프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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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파가 깜짝 놀라 묻는다. 자기는 신이 나서 노래를 불렀는데, 퉁소 가락은 너무나 구슬펐기 때문이다.



[3-2 단락] 적벽에서의 감회


이 말했다.

"달은 밝은데 별이 드무니, 오작烏鵲은 떼를 지어 남쪽으로 날아간다!"

이게 바로 조맹덕曹孟德의 시구詩句가 아니오이까?


저기 서쪽으로는 하구夏口 땅이 보이고,

동쪽으로는 무창武昌 땅이 보이는 그 사이에,

울울창창 빼곡하게 산천山川이 연이어져 있으니,

여기가 바로 맹덕孟德이 주랑周郞에게 곤욕을 치르던 그 적벽이 아니더이까?


바야흐로 조맹덕이 형주荊州 땅을 격파한 후

순류를 타고 동쪽 강릉江陵으로 내려오던 그때의 그 광경을 떠올려 보십시다.

천리에 줄을 이은 군선軍船 위로 깃발은 하늘을 뒤덮었고,

조조는 강가에서 술잔을 흩뿌리며

긴 창 비껴든 채 시가詩歌를 노래하니, 참으로 일세의 영웅이 아니었소이까?

헌데, 그런 그가, 지금은 어디로 갔단 말이오이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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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달은 밝은데 별이 드무니, 까마귀는 떼를 지어 남쪽으로 날아간다."


조조 〈단가행 短歌行〉의 한 구절이다. 소설 《삼국지연의 三國志燕義》제48회를 보면 재미있는 스토리가 나온다. 적벽대전이 벌어지기 전 날 밤. 조조는 여러 장수들과 함께 잔치를 벌인다. 주흥이 도도해진 조조는 긴 창을 옆에 끼고 〈단가행〉을 부른다. 그리고는 음률에 밝은 유복劉馥에게 평을 해달라고 한다.


입은 바르고 눈치는 쥐뿔만큼도 없는 고지식한 성격의 유복은, 자신의 느낌을 곧이곧대로 말한다. 바로 이 구절을 거론하며, 전쟁을 앞둔 마당에 불길하다고 말해 버린 것이다. 아이고, 쯧쯧. 이걸 어쩌나... 만취했던 조조는 순간 대로하여 끼고 있던 긴 창으로 그를 찔러 죽인다. 다음 날 아침, 조조는 술이 깨고 난 후, 크게 후회하며 유복의 장사를 후히 치러주었다는 이야기다.


여기서 몇 가지 사항을 알고 있으면 더욱 재밌다.


첫째, 하지만 그 이야기는 거짓말이다. 어디까지나 소설 속의 픽션일 뿐이다. 앞의 글, <07. 맑은 바람 솔솔 부니>에서도 말했지만 적벽대전에 대한 역사적 기록은 매우 간략하다. 이런 내용이 있었을 리가 없다.


둘째, 동파는 조조가 이 노래를 긴 창을 옆에 끼고 술을 마시며 불렀다고 말한다. 그것도 허구다. 동파가 살았던 북송 시대의 소설 《삼국지》스토리의 픽션은 딱 여기까지였다.


셋째, 그러나 동파는 이 작품에서 조조가 유복을 죽이고 후회했다는 이야기는 전혀 거론하지 않는다. 왜? 그 당시에는 그 스토리가 아직 만들어지지 않았으니까. 그 이야기는 북송 시대 이후에 가공된 픽션임을 짐작케 한다. 소설 《삼국지》의 스토리는 이렇게 오랜 세월을 거치며 수많은 민중들에 의해 가공에 가공을 거듭한 집단 창작인 것이다.




[3-3 단락]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하물며 그대와 나는 어떻소이까?

강가의 모래섬에서 물고기나 사슴 따위와 벗을 하는 어부漁夫 초부樵夫아니오이까?

나뭇잎 같은 조각배에서 표주박으로 만든 잔을 들고 술 권하는 딱한 처지가 아니오이까?


그야말로 잠시 잠깐 이 세상에 몸을 맡긴 하루살이요,

검푸른 바닷속에 떨어뜨린 한 톨의 좁쌀처럼 보잘것없는 신세 올시다.

어찌 아니 수유 같은 삶이 슬퍼지고,

끝없이 흘러가는 장강의 물결이 부럽지 않으리오?


신선의 옆구리에 매달려 거침없이 창공으로 날아가서

저어기 밝은 달을 꼭 껴안고 천년만년 살고픈 심정이었소만,

문득 이루어질 수 있는 일이 아닌 줄을 깨닫게 되었는지라,

슬픈 바람 위에 여음餘音을 실어본 것이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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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그네는 탄식하며 말한다. 백만 대군을 거느렸던 조조와 같은 영웅도 장강의 물결 따라 역사 속에 사라져 갔거늘, 당신이나 나처럼 범부凡夫 필부匹夫는 말할 나위도 없는 것 아니냐. 이 대자연처럼 천년만년 살고 싶지만 그저 다 부질없는 소망일 뿐, 우리네 존재는 참으로 보잘것없는 먼지 같은 존재 아닌가. 그 생각을 하니 부지불식 간에 퉁소 가락이 슬퍼지고 말았다는 답변이었다.


그렇다. 광대무변한 대우주 속의 인간은 그야말로 제로(0)에 가까운 존재다. 유구한 시간 속에 인간은 아주 잠깐 나타났다가 종적도 없이 사라진다. 어찌 슬프지 않을 수 있겠는가. 대체 인간 존재의 의미는 무엇이며, 삶과 죽음이란 또 무엇인가. 우리 모두의 영원한 미스터리요, 풀리지 않는 숙제다.


동파는 과연 뭐라고 대답했을까?




[4-1 단락] 변變과 상常, 위로하는 소동파


소자蘇子가 말했다


그대도 이 물과 저 달을 잘 알고 계시렸다?

흘러가는 것은 모두 다 이 물처럼 흘러가게 마련이오만, 한 번도 우리 곁을 떠난 적이 없소이다.

차고 기우는 것은 모두 다 저 달처럼 변화하게 마련이오만, 결코 줄어들거나 늘어난 적은 없소이다 그려.


변화하는 측면으로 보자면야, 천지 간에 모든 일이 눈 깜짝할 사이라도 변화하지 않는 때가 없겠으나,

변화하지 않는 측면으로 보자면은 만물이 나와 함께 끝이 없는 법이라오. 헌데 뭘 그리 부러워하신단 말이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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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벽부〉가 동아시아 문학의 최고봉인 이유가 바로 이 단락에 있다.


나그네는 슬퍼한다. 장강의 강물이 흘러가듯 시시각각 죽음의 순간을 향해 늙어가는 우리네 삶이 너무 허망하다고 한다. 동파는 선생님이 학생을 타이르듯, 절묘한 비유로 삶과 우주의 철리를 알려준다.


강물이 흘러가 버렸다고? 여기 여전히 우리 곁에서 흐르고 있는데? 달님이 매일 변한다고? 그래도 더 이상 커지거나 완전히 사라져 버리지는 않았잖소. 한 달 지나면 또 똑같이 나타나는데, 뭘 그리 슬퍼하시나?


나그네와 동파. 누구의 생각이 더 합리적일까? 나그네는 눈에 보이는 대로 삶의 변화를 바라보았고, 동파는 그 이면에 존재하는 내재규율을 보았다. 지식의 시간은 흘러가면 그뿐이지만, 지혜의 시간은 다음 해가 되면 봄 여름 가을 겨울, 또다시 똑같은 패턴으로 찾아온다. 지식의 달은 매일 변화하지만, 지혜의 달은 한 달을 주기로 규칙적으로 존재한다. 삶을 바라보는 직선 패러다임과 순환 패러다임. 지식과 지혜의 첫 번째 차이다.


옛날 서구인들은 달과 지구, 달과 인간을 따로따로 생각했다. 그 상호 ‘관계’에 대해서는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그러나 동아시아인 들은 일찍부터 달의 변화에 근거한 음력陰曆이라는 달력을 만들어 농경 생활에 활용했다. 지식은 모든 개체를 분리해서 인식하고, 지혜는 상호 연결된 것으로 인식한다. 분리의 패러다임과 결합의 패러다임. 지식과 지혜의 두 번째 차이다. 


결정적인 차이가 있다. 지식의 패러다임은 교만하다. 대자연을 얼마든지 정복 가능한 대상으로 인식한다. 인간과 세상을 기계처럼 인식하고 모든 것을 끝없이 분류하고 분석한다. 지혜의 패러다임은 겸손하다. '학문 學問'이란 삶의 갈림길마다 늘 겸손하게 길을 묻는 것이다. 그 과정에서 얻는 것이 바로 지혜다.


동아시아의 학문이 추구하는 것은 지식이 아니라 지혜다. 문자 써서 말한다면 《대학 大學》에 나오는 ‘격물치지格物致知’다. 무슨 뜻인지 정리해 보자.


격물格物: 삼라만상의 근본적 이치를 탐구하다.

치지致知: 끊임없이 변화하는 삼라만상의 내재규율을 깨치다. 관계 속에서 지혜를 얻다.


삼라만상, 그 모든 것의 '현상'은 순간순간마다 끊임없이 변화한다. 지식을 추구하는 사람은 바로 눈앞에서 그 '변화하는 현상(變)'만을 바라보고 일희일비, 슬퍼하고 기뻐한다. 반면에 '격물치지'의 지혜를 추구하는 사람은 현상의 이면에 숨어있는 '일정한 내재규율(常)'을 탐구한다. 매일 밤 변화하는 달을 바라보며, 차면 기울고 기울면 다시 차는 '우주의 항상성 恒常性'을 깨닫는다. 물은 쉴 새 없이 흘러가지만, 바다에서 증발하고 구름이 되었다가 빗물로 화하여 다시 우리 곁으로 돌아와 여전히 내 옆을 흐른다는 '대자연의 에코 법칙'을 깨닫는다.


인간의 삶과 죽음도 마찬가지다. 삶은 끊임없이 변화하지만, 죽으면 대자연의 일부가 되어 언제나 함께 한다. 죽지 않으면 삶도 없어지고 생명력도 없어진다. 그게 과학적 팩트 fact요 진리다. 인간의 유한한 삶이 그저 아쉽고 슬프기만 했던 동아시아의 평범한 선비들은, 동파의 가르침에서 깨달음을 얻고 위로를 받았다.  역대의 문인들이 입을 모아〈적벽부〉를 동아시아 최고의 작품으로 꼽았던 이유가 여기에 있다.


▶ 사족. 사랑도 마찬가지다. 사랑이 어떻게 변하니? 영화 '봄날은 간다'에서 유지태는 절규한다. 하지만, 변하니까 사랑이다. 변하지 않는 꽃은 가짜 꽃, 조화造花다. 변하지 않는 사랑은 생명력이 없다. 그러나 전제 조건이 있다. '사랑'이란 하루에도 몇 번씩 바뀌는 그런 감정 같은 것을 말하는 게 아니다. 인간이면 누구나, 언제나 지니고 있어야 할 그 어떤 '소중한 내면적 가치'를 말한다. 그런 사랑은 변하지 않는다.


사랑은 어느 한순간의 개별적 음소音素가 아니다. 삶이 끝날 때까지 오르내리며 이어지는 장편 교향곡이다. 흘러가 버린 줄로만 알았던 강물이 여전히 우리 곁을 흐르고 있듯이, 사랑도 역시 그러하다.



[4-2 단락]


무릇 천지간의 삼라만상은 제각기 임자가 있는 법.

내 것이 아니라면, 터럭 하나라도 가져서는 아니 되지 않겠소?


허나 강 위에 맑은 바람, 산간의 밝은 달을 보시오 그려.

귀로 접하면 소리가 되어주고, 눈으로 만나면 색조色調를 이루나니,

제아무리 마음대로 엄청나게 가진다 한들 그 누가 시빌是非 걸며,

제아무리 마음대로 가져다가 쓴다 한들 없어지질 아니하니,

이게 바로 조물주의 무진장無盡藏한 보고寶庫라서 그대와 내가 함께 즐기는 것 아니겠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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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물며 대자연은 죽어있는 무생물의 존재가 아니다. 펄펄 소리 내며 약동하는 생물이다. 과거 서구의 패러다임 속의 대자연은 무생물이었다. 그래서 필자도 학교에서 그렇게 배웠다. 흙이나 땅은 무생물이라고.


하지만 최근 현대과학이 발달하면서 서구에서도 새로운 관점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1979년, 영국의 과학자 러브록 James E. Lovelock (1919 ~2022)이 '지구는 살아있는 유기체'라는 내용의 '가이아 이론'을 발표한 것이 그 사례 중의 하나다.

인간은 죽어서 대자연의 일부가 되어 언제나 우리와 함께 한다. 그런데 그 대자연은 무생물이 아니라 무한한 에너지를 발산하며 살아 숨 쉬는 생명체란다. 인간은 죽음을 맞이하면 그 모습을 달리 한다. 강 위의 맑은 바람, 산간의 밝은 달의 일부가 되어 언제나 함께 한다. 귀로 접하면 소리가 되어주고, 눈으로 만나면 칼라풀한 세계가 되어준다. 그야말로 조물주의 신비가 아닐 수 없다.  


인간 존재의 왜소한 가치가 한없이 슬프고, 유한한 삶이 그저 덧없기만 한 우리네 보통 사람들에게, 〈적벽부〉는 참으로 커다란 위로가 되어 준다.



[5 단락] 깨달음, 진정한 유람의 시작


이 기뻐하며 웃음을 터뜨렸다.

우리는 잔을 씻어 새로운 마음으로 술을 마시니,

안주는 곧 동이 나고 배반杯盤은 여기저기 어지럽게 나뒹굴었다.

서로서로 배 안에서 베개하고 쓰러지니, 먼동이 - 하게 터 오는 것도 미처 알지 못하였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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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삶의 철리를 깨달은 나그네는 크게 기뻐한다. 깨달음은 제2의 탄생이다. 깨달음을 얻고 난 다음의 삶은 다시 태어나서 다시 사는 것과 마찬가지다. 깨달음의 눈으로 삼라만상을 바라보면, 모든 것이 새롭게 보일 수밖에 없다.


▶ 동파의 적벽 유람도 그러했다. 나그네는 삶과 우주의 깨달음을 얻고, 동파는 깨달음을 얻은 소중한 벗님을 새로이 얻었으니, 그들은 이제 진정한 유람을 시작하게 되었다.


< 계속 >


동파의 〈적벽부〉는 불가佛家의 색즉시공色卽是空 사상과 현대과학의 핵심인 양자역학의 관점에서 감상하면 이해도를 더욱 높일 수 있습니다. 다음에는 그 시각으로 〈적벽부〉를 감상하도록 하겠습니다.


필자의 주장과 번역을 인용할 때는 반드시 출처를 밝혀주시기 바랍니다.




[ 표지 그림 ]

◎  명明, 구영仇英, <적벽도> 일부. 1548년 작품. 요녕성遼寧省 박물관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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