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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오생 Oct 06. 2024

06. 수학과 문학은 동전의 양면 (완)

오, 캡틴! 마이 캡틴!

오늘은 <수학과 문학은 동전의 양면> 마무리 편입니다. 


지난번 <수학과 문학은 동전의 양면 (2)>에서는 

<리미트 제로(limit 0)> = '나' = <무한대(∞)> 이야기를 했었죠?

어떤 내용이었는지, 잠시 정리하고 넘어가겠습니다. ^^




21세기 최신 현대과학에 의하면, 삼라만상에는 세 개의 세계가 있다.


① 일반적 현상의 세계 : 육안으로 보이는 세계

② 매크로 Macro의 세계 : 천체망원경으로 보이는 별들의 거시巨視 세계

마이크로 Micro의 세계 : 원자현미경으로 보이는 미시微視 세계


삼라만상의 최소 구성단위는 원자다. 그런데 그 안에는 매크로 세계의 우주와 똑같은 모습의 마이크로 우주가 존재한다. 삼라만상의 모든 사물은 하나하나가 전부 우주인 것이다. 매크로 세계에서의 내 존재는 리미트 제로지만, 마이크로 세계에서의 내 존재는 무한대의 우주다. <리미트 제로(limit 0)> = '나' = <무한대(∞)>


그 모든 우주는 치밀한 망으로 그물처럼 연결되어 있다. 마치 영화 <아바타>의 에이와 나무의 뿌리처럼, 그리고 현대사회의 인터넷망처럼. 이 글을 읽는 독자님과 나도 그렇게 연결되어 있다.


그런데 이런 내용은 아주 오래전부터 동아시아의 최고 지성인들이 사색과 명상의 힘으로 이미 깨닫고 있었던 생각의 틀이었다. 양자물리학은 그 동아시아의 패러다임을 과학으로 증명하고 있는 것이다.




여기까지가 지난 시간에 말했던 주요 내용이었죠.

소오생이 수십 년 동안 강의실에서 강조했던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자, 그럼 오늘의 이야기를 계속해 볼까요?




자신감



아시다시피 제 주전공은 중국 문학과 문화입니다. 그런데 왜 전공과는 별로 '상관없어 보이는' 이야기를 하는 걸까요? 간명하게 말씀드리자면 학생들에게 강한 학습 동기를 부여해 주고, 새로운 학습 방법을 일러주고 싶어서입니다.


어떻게 해야 학습 동기를 부여해 줄 수 있을까요? 왜 이 공부를 해야만 하는 것인지, 그 필요성을 알려줘야 하겠죠. 그리고 우리도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심어주면 될 것입니다. 먼저 자신감 이야기부터 해볼까요?




제가 재직했던 학교는 속칭 '서울외대'였습니다. '서울 외곽에 있는 대학'이라는 뜻이라나요? 그래서인지 '인 in 서울 대학'에 진학하지 못한 열등감에 사로잡혀 있는 학생들이 많았습니다. 특히 새로 입학한 신입생들을 보면 대부분 무기력해 보여서 너무나 속상했죠.


'서울외대' 뿐일까요? 아마도 전국 모든 대학이 마찬가지일 겁니다. 소위 '명문대'도 마찬가지! 열등감에 빠져 우울증에 걸린 학생들이 상당히 많습니다. 그런데 그런 학생일수록 진리와 사랑 같은 그 어떤 절대적 가치 앞에서는 상당히 교만하더군요. 왜 그럴까요?


단언컨대, '지식과 정보를 추구하는 교육' 때문입니다. '지식 교육'의 목표는 '경쟁에서 이기는 것'이죠. 성적이라는 수치로 줄을 세웁니다. 입시를 지도하는 학교와 학원, 심지어는 주류 사회를 대변하는 신문까지 나서서 전국 각 대학 각 학과의 '랭킹'을 매기죠. 마치 그 랭킹 순서대로 권력과 돈, 출세와 성공을 보장해 주겠다는 듯이.

 

그런 '교육'을 받은 학생들은 행복은 성적 순이 아니잖아요... 울부짖으면서도 점차 그들 주류 집단의 논리에 길들여집니다. 자신감을 가져야 할 때 열등감을 가지고, 겸손해야 할 때 교만합니다. 바로 자기 눈앞에 펼쳐진 세계만을 이 세상의 전부로 생각하고, 자신과 타인을 비교하면서 상위 랭킹에 올라가지 못한 열등감에 사로잡혀 위축되고 무기력하게 되죠. 


어떻게 해야 그 학생들에게 자신감과 활기를 불어넣어 줄 수 있을까요?

가장 먼저 이 '수학 공식'을 알려주고 싶습니다. 그러고 나서 현대과학의 fact로 설명해주고 싶군요.


<리미트 제로(limit 0)> = '나' = <무한대(∞)>


육안으로 보이는 세계가 전부 같지만 그게 아니다, 매크로 세계와 마이크로 세계도 존재한다. 우리 모두는 매크로 세계의 먼지보다도 더 작고 보잘것없는 존재이지만 그와 동시에 마이크로 세계의 주재자다. 프랙털 원리에 의하면 그 마이크로 세계는 바로 곧 거대한 매크로의 우주다. 


그런 과학 팩트를 알려주는 것으로 '감성과 지혜의 교육'을 시작합니다. '지혜 교육'에서는 타인과 '나'를 비교할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 모두는 각자 무한대의 존재이며, '나'를 구성하고 있는 수많은 소우주에게 있어 '나'는 '신神'과 같은 존재이니까요. 이게 허무맹랑한 요설이 아니라 최신 현대과학의 팩트라는 사실을 명쾌하게 전달해 준다면, 열등감에 빠져 무기력하던 학생들도 점차 자신감과 책임감을 회복하지 않을까요? 


중국문화/문학을 전공하는 학생들이라면, 저는 한걸음 더 나아가 그들의 자부심과 학습 의욕을 돋우어지기를 기대하며 이렇게 말해주곤 합니다.


① 그 최신 현대과학/양자물리학은 동아시아의 유가儒家 · 도가 · 불가 패러다임을 기반으로 출발했다.

② 그 패러다임은 중국에서 비롯되었지만 오늘날 대한민국에서 가장 잘 보전하고 있다.

③ K-문화가 전 세계를 강타하고 있는 이유도 바로 그 때문이다. <03. K- 문화가 환영받는 이유> 참조.


④ 동아시아의 패러다임을 현대 사회에 맞게 재조명해야 한다. 쌤이 그렇게 도와줄 것이다. 여러분은 그것을 기반으로 K-문화의 새로운 콘텐츠 소스를 발굴하라.


⑤ 최종 목표는 '나'의 완성에 있다. '직선 인생'을 추구하는 얄팍한 지식인의 말로는 허망하기 마련이다. 그러나 지혜로운 지성인은 '곡선 인생'으로 천천히 가지만 나 자신의 내면을 충일하게 만들어주는 삶 속에서 즐거움과 보람을 찾아나갈 수 있을 것이다.


얼마나 효과가 있었을까요? 고백합니다. 그래봤자 별무 신통이었습니다. 그 당장에는요. 물론 그 당장에 귀를 열고 듣는 학생들도 가끔 기적처럼 존재하지만, 10년 넘게 지식 위주의 교육으로 '세뇌' 당하며 살아온 학생들 삶의 관성이 그리 쉽게 바뀔 리가 없지요. 


대부분 이 우주 속에 그 어떤 에너지의 파동으로 남아있던 제 목소리를 나중에 조금씩 뇌리에 재생하며 뒤늦게 듣는 학생들이 많았던 것 같습니다. 졸업할 때 즈음이면 그 눈빛이 제법 똘망똘망 많이 바뀌어 있었거든요. 한 사람의 우주, 그 내면을 채워주는 '교육'이란... 절대로 조급하게 서두를 일이 아닌 듯합니다. 인생은 곡선, 돌아서 느리게 가는 게 최선이라고 방금 말했잖아요, 그쵸? ^^




겸허함



제 모든 수업은 '지식과 정보'가 아니라 '지혜와 감성'을 추구합니다. 어떤 방법으로 추구할까요? 지식은 시각적이고 지혜는 청각적이라는 말, 기억하시죠? 그래서 '소리'를 활용합니다. 


저는 시험을 따로 보지 않습니다. 동영상강의로 진도를 나가고 학생들에게는 그 강의의 소감문을 제출하라고 하죠. 이때 저의 요구 사항: (1) 강의 내용을 정리하려 하지 말고, '새롭게 깨닫고 느낀 점'을 말할 것. (2) 딱딱한 보고서는 절대 금지! 에세이도 금지! 반드시 '편지' 형식으로 제출할 것. 자신만의 개성이 담긴 목소리, 평소 대화하는 말투로 동영상강의를 들으며 느낀 점을 진솔하게 이야기할 것.


왜 하필 편지일까요? 왜냐하면 편지가 가장 청각적인 글쓰기 장르이기 때문입니다. 저는 편지 속에 녹음된 목소리를 들으면서 '학문'에 대한 학생들의 마음가짐과 생각의 깊이를 짐작해 봅니다. 열 개 정도의 세부 항목 평가표를 만든 다음, 학생이 어떤 지혜를 얻었는지, 자신의 삶에 어떻게 적용하며 배움을 실천으로 이어가고 있는지, 격주마다 평가하여 통보해 줍니다. 점수가 상향 곡선을 그리면 보너스 점수를 준다는 유혹과 함께요.


그리고 학기말에는 자신이 썼던 편지를 주욱 돌아보며 그동안 무엇을 배웠는지, 키워드를 중심으로 말해보라고 유도해 주지요. 그런데 어떤 학생들은 이따금 학기 초에 이런 편지 내용으로 저를 당황하게 한답니다. 


선생님, 저는 아직도 멀었나 봐요. ㅠㅠ


불과 2, 3주 정도 수업을 진행했는데 이런 이야기를 들으면 정말 당혹스럽죠. 아니, 이제 막 시작했는데 이게 무슨 소리? '학문'을 얼마나 가볍게 여겼길래 이런 생각을 한다지? 열등감 무력감은 때로는 이렇게 교만함으로 이어지는 것 같더군요. 그래도 이 정도면 정말 귀엽지 않나요? ^^ 


어떤 학생들은 '느낀 점'이 아니라 자기 얘기만 늘어놓기도 합니다. 아무래도 동영상강의를 켜놓기만 하고 듣지는 않는 거 같죠? 그런데 솔직히 그 학생들이 고맙기도 하답니다. 저는 종종 제 생각을 댓글로 피드백을 하는 데요, 대단위 강의인만큼 일일이 다 해주기가 상당히 힘들답니다. 그런데 이런 학생들이 있으면 쉬어가는 느낌이 드는 터라, 저도 모르게 감사한 마음이 들더라고요. 저, 정말 나쁜 교수죠? ^^;;;


최근 들어서는 아예 대놓고 저를 비난하는 학생들도 생겼습니다. 극우 '일베' 느낌? 공자 같은 전근대적인 인물을 왜 신격화하느냐, 왜 중국을 띄우고 서양을 깔보느냐, 당신 생각에 동조해야 점수를 잘 준다면 불공정한 것 아니냐, 문학/문화 수업에서 왜 정치 이야기가 나오느냐, 당신 빨갱이 교수 아니냐... 급기야는 강의평가에 익명으로 온갖 인신공격을 퍼붓습니다. 악플에 삶을 포기하는 심정이 어떤 건지 충분히 공감하게 되죠. 


어쩌겠어요? 속이야 상하지만 그래도 해야 할 일은 해야 하지 않겠어요? 대부분의 학생들을 위해서 그래도 '겸허함'의 '수학 공식'을 다시 한번 설명해 줍니다. 


<무한대(∞)> = '나' = <리미트 제로(limit 0)>


자신감은 좋지만 교만하면 안 된다. 우리 모두 마이크로 세계에서는 우주의 주재자이지만, 매크로 세계에서는 먼지보다 더 작고 보잘것없는 존재임을 잊지 말자. 인간은 우주의 일부니까, 우주의 원리는 삶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진리와 사랑 앞에 작아지고 작아져야 한다. 간절하게 작아지는 일, 그게 진정한 '학문'의 시작이다. 


기독교로 치자면 하나님 앞에 가난한 마음, 작아진 마음, 간절한 심정으로 자복하며 통곡하는 것이다. 불교로 말하자면, 백척간두 절벽에서 뛰어내려 텅 빈 가난한 마음만이 우주에 남아있는 경지다. 《예기禮記 · 학기學記》에 보면 이런 말이 있다. "배우고 난 연후에야 부족함을 안다.(學, 然後知不足)" 그러니까 부족함을 알고 작아지는 것이야말로 진짜 공부다. 


학생들에게 들려준다기보다는, 저 자신을 달래고 경계하는 마음으로 그런 이야기를 해봅니다. 세상의 냉소와 귀를 닫은 학생들, 폭언을 퍼붓는 학생들의 목소리를 생각하면 공허하기 그지없지만, 그래도 또 모르는 일 아니겠어요? 이 우주 속에 에너지의 파동으로 떠돌던 제 목소리가 언젠가 그들의 뇌리에 조금씩 재생되며 뒤늦게 듣게 될 수도 있지 않을까요? '교육'이란... 조급하게 서두를 일이 절대로 아니니까요. 삶은 장거리 마라톤이니까요. 찰나의 이별로 영원한 사랑을 상실할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요. 





패러다임의 대 전환



'수포자'인 학생들에게 '수학'에 재미를 붙이고 열공 모드로 돌입하게 만들, 그런 지혜로운 방법은 없을까요? 

 <03. K- 문화가 환영받는 이유>


한 달쯤 전에 댓글로 수학 선생님이신 @Bono 작가님께 대충 그런 내용의 질문을 받았더랬습니다. 지금 이 글을 쓰게 된 동기였죠. 


저는 제 전공인 중국문화/중국문학 과목의 학습 동기 부여 방법만 생각해 봤지, 전혀 다른 전공, 그것도 인생 최대 약점인 '수학 과목의 학습 동기 부여'라는 명제는 꿈에도 생각해 본 적이 없었던 터라 상당히 당황스러웠습니다. 근데 역으로 생각해 보면 제가 바로 '수포자'였기 때문에 뭔가 말씀드릴 수 있는 부분이 있을 듯도 싶어 감히 이 화두를 붙잡아 보았죠. 


이제 어영부영 한 달이 지났네요. 손에 잡힐 듯 말 듯, 아직도 난마처럼 얽힌 생각 회로를 제대로 풀어내지 못했습니다만, 더 이상 시간을 끌 일이 아닌 듯하여 헝클어진 생각의 날 것 그대로를 보여드리고 여러 작가님들의 꾸지람을 듣고자 합니다.




첫째, 패러다임의 정립. 감히 말씀드립니다. 학생이 문제일까요? 아뇨. 진짜 문제는 가정과 학교에서 교육을 시행하는 학부모와 교사에게 있지 않을까요? 먼저 학부모와 교사가 교육에 대한 패러다임을 전환하여 새롭게 정립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스스로를 설득하지 못하면 타인도 설득할 수 없을 테니까요.


교육열이 높은, 많은 학부모님들은 대부분 이런 식으로 말씀하십니다. 우리 아이들은 노벨상을 수상하는 과학자나 세계적인 예술가로 키우겠노라, 아니면 판검사나 의사로 만들어서 떵떵거려 보겠노라, 기필코 남들이 알아주는 사회 저명인사로 만들겠노라, 최소한 대기업에서 인정받고 맹활약하는 주류집단의 핵심 멤버가 되게 하겠노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분들은 그래서 자녀들의 성적에 목을 매시죠. 현실은 약육강식의 정글, 피 튀기는 경쟁사회 아니냐. 성적 랭킹을 올리려면 영어 수학이 핵심과목이란다. 강한 멘털로 영어 수학을 정복하여 주류 집단으로 들어가는 특급열차의 티켓을 따거라! 그렇게 자녀들을 끊임없이 세뇌합니다. 삶의 모든 것에 있어서 '자녀 교육'이 최우선 가치가 됩니다. 자신의 반려자는 아웃 오브 안중眼中, 눈에 들어오지도 않습니다.


그분들은 대체 왜 그러실까요? 혹자는 말합니다. 자신이 못 이루었던 욕망을 자식을 통해 이루게 함으로써 대리만족을 얻고자 하는 거라고요. 물론 그런 요인도 있겠죠. 그러나 보다 더 큰 이유는 그분들 역시 교육이라는 미명 하에 그렇게 세뇌당해 왔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니까 학부모와 교사가 먼저 '교육'의 함정을 정확하게 깨닫고 삶의 패러다임에 대전환을 가져와야 그 악순환의 고리를 깰 수 있다는 이야기. 




제 고등학교 동창들을 보면 참 재미있습니다. '공부'를 잘하던 친구들은 대부분 힘들게 삽니다. 반대로 '공부'를 못하던 친구들은 오히려 훨씬 더 재밌게 삽니다. '공부'를 못하면 '인생 공부'를 잘하게 되는 걸까요? 


소오생의 경우는 어떨까요? 예전에 제가 대학교수가 되자 많은 친구들이 놀라더군요. 오생이 니가 교수라고? 눈으로 니까짓게? 말하면서요. 요새는 어떨까요? 브런치에 올리는 제 글을 가끔 읽어보고 조금은 인정해 주는 눈치입니다. 하하.

 

20년쯤 전, 세미나 발표를 위해 처음으로 서울대 관악캠퍼스를 갔습니다. 교문을 들어서는데 묘한 감정이 들더군요. 여기가 우리나라에서 제일 좋다는 그 대학인가? 그런데 세미나 발표가 끝나자 회식 자리에서 서울대 박사반 학생들이 그러더군요. 교수님 학교 학생들은 정말 좋겠어요. 엥? 이게 무슨 소리죠? 한 달 후, 제 대만대학 사형이었던 서울대 교수님은 또 이러시더군요. 김교수, 넌 좋겠다. 우리 학과 강사들이 당신 논문으로 교수법 스터디를 한다네? 에엥? 이건 또 무슨 소리죠?


제 자랑을 하려는 게 아닙니다. 중고등학교 6년 내내 수학 · 물리 · 화학을 거의 빵점 맞으며 생전 '공부'란 걸 해 본 적이 없는 문제아가, 대체 어떻게 교수가 되어, 훗날 서울대 사람들한테 그런 요쌍한 말까지 듣게 되었는지, 그 사실을 여러분은 어찌 생각하시느냐 그걸 묻고 싶은 겁니다. 바보였던 소오생이 갑자기 천재라도 된 걸까요? 아니면 대한민국 교육 시스템에 심각한 문제가 있는 걸까요? 제 생각엔 아무래도 후자 같습니다.


'교육'을 행하는 주체는 누구일까요? '주류 문화집단', 즉 기득권 세력입니다. 그들은 새로운 세대들도 자신들이 만들어놓은 '교육'의 틀을 통해 자신들의 주류집단 안에 들어와서 시키는 대로 순응하며 살라고 요구하게 마련입니다. 그러므로 대부분의 '교육'이란, 사실은 전 인류의 공동 선善과는 괴리가 있게 마련이죠. 


돌이켜보면 저는 늘, 왜 꼭 그래야 하는 건데? 반항 심리로 살았던 인생 같습니다. 좋게 말하자면 '기성 교육'에 대한 비판 의식이라고나 할까요?


우리나라의 기존 교육 시스템은 아시다시피 일본 군국주의 강점기 시대에 확립되었습니다. 그리고 식민지 학문 100년이 지났습니다. 그 교육의 결과로 나타난 오늘날 정치 현실이 어떤가요? 끊임없이 제국주의 사관의 교과서를 발행하며 호시탐탐 한반도를 노리는 일본. 그들에게 영합하여 권력을 장악하자마자 우리의 역사를 왜곡 폄훼하는 뉴라이트 일당. 명문대 법대에서 최고의 교육을 받았다면서도 너무나 무식하고 무능하고 무도하기 짝이 없는 권력자...


그 모든 사실이 우리나라의 일본 군국주의 식민지 교육 시스템이 얼마나 심각한 문제를 안고 있는지, 그 폐단을 너무나 잘 알려주는 증거 아닐까요? 패러다임의 대 전환이 필요합니다. 국가와 사회 탓만 하지 말고, 우리 브런치 작가님과 독자님들부터 먼저 나서서 우리 학생들에게 이런 식으로 말해주실 수는 없을까요? 


괜찮아. 까짓 거 수학 공부 좀 못 하면 어때? 영어 공부 좀 못 하면 어때? '공부'를 못하는 사람이 '인생 공부'는 더 잘한다더라. 더 신나고 재밌게 산다더라


내가 아는 소오생이라는 브런치 작가는 평생 공부란 걸 한 번도 제대로 해 본 적이 없다는데, 교수 짓도 해 먹으며 서울대에 세미나 발표 가서 서울대 학생들한테 우레 같은 박수도 받았다더라. 금수저 아니냐고? 아니, 아부지가 북한 땅에 금수저를 놔두고 오는 바람에 남한에선 완전 상거지 흙수저였다는데? 


돈? 돈을 왜 돈이라고 하는 줄 아니? '성적'이랑은 상관없이 돌고 돌아서 돈이라고 한단다. 그러니까 머니 머니해도 건강하고 즐겁고 기쁘게 지내는 게 최고란다. 알았지? 




수학과 문학은 깨달음의 방편



둘째, 학습 목표의 수정. 선생님들은 대부분 학생들의 성적 향상에 목표를 둡니다. 그 목표를 살짝 수정해 보시는 건 어떨까요? 수학이 무엇인지, 어떻게 탄생한 것인지, 왜 배워야 하는 것인지 깨닫게 하는 것에 목표를 두면 학생들이 조금은 더 수학에 재미를 느낄 수도 있지 않을까요? 




피타고라스가 말했다죠? 우주는 숫자로 이루어져 있다고요. 수학은 그렇게 모든 서양학의 근간이 되었습니다. 특히 자연과학은 수학에서 출발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죠. 그런데 지금 와서 곰곰 돌이켜보면, 저는 그 전제 조건에서부터 거부감을 느꼈던 것 같습니다. 아니, 그럼 '나'의 본질도 숫자란 말이야? 그게 말이 돼? 출발선에서부터 반항 심리가 싹텄으니 그다음으로 이어질 리가 없었죠. 


서구의 이원론 패러다임에서 바라보는 기하학/수학은 '분리'를 전제로 합니다. '측정'을 위해서는 구간과 구간, 영역과 영역을 분리하지 않으면 안 되니까요. 그래서 무엇이든지 나누어 인식하고자 하는 '분리의 패러다임'이 탄생할 수밖에 없었죠. <분리의 패러다임> 참조.


저는 그 이원론의 분리 패러다임도 영 마음에 들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뭔가 논리에 구멍이 뚫려있는 느낌이랄까요? 그래서 동아시아의 일원론 패러다임으로, 수학의 본질을 완전히 새로운 차원에서 설명해 보면 어떨까, 그런 생각을 해봅니다. 


여기 동아시아의 결합 패러다임으로 '수학'을 인지하고 적극 활용했던 위대한 사상가이자 교육가이자 문학가를 소개합니다. 바로 가우타마 싯다르타 Gautama Siddhārtha, 즉 '석가모니'입니다. 

가우타마 싯다르타는 산스크리트어. 팔리어로는 고타마 싯닷타 Gotama Siddhattha이다. 샤카무니 Śākyamuni는 그가 ‘깨달음을 얻은 자’, 즉 붓다 Buddha가 되자, ‘샤카족族의 성자聖者’라는 뜻으로 세인世人들이 부른 존칭이다. 중국에 들어와 석가모니釋迦牟尼라고 음역 되었다. 


여기서 잠시 <17. 울타리 아래 국화꽃 한 송이>에서도 말씀드린 바 있는 《능가경楞伽經》의 가르침을 다시 한번 리마인드 해볼까요?


'으뜸 가는 깨달음(싯단타 siddhānta)'은 '특별한 언어(데샤나 deśanā)'로 가르쳐라!


기억하시나요? 그때 '으뜸 가는(宗)' '가르침의 방법(敎)'을 합성하여 만들어진 단어가 '종교宗敎'라고 말씀드렸죠? '종교'는 원래 '으뜸 가는 가르침의 방법'이라는 이었습니다. ('종교'의 어원: <달마 얼굴에 수염 없는 까닭은>) 그런데 여기서 '특별한 언어, 데샤나'가 뭘까요? 저는 이렇게 말씀드렸습니다. 


특별한 언어, 데샤나는 '문학文學'을 말합니다. 서구에서 말하는 literature가 아니라 동아시아 전통의 '문학'입니다. 그 '문학'의 방법을 통하면 한없이 어렵게 느껴졌던 것도 쉽게 깨달을 수 있다는 이야기.


그런 각도에서 말하자면 '문학'이 '으뜸 가는 가르침'이므로, '문학'이 바로 곧 '종교'라는 이야기가 되죠. 지금은 거기에 하나 더 보태고 싶습니다. 특별한 언어, 데샤나에는 '문학' 외에 '수학'도 있다고요. 다른 각도에서 바라보면 '수학'도 '문학'의 한 방법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만. 


아뇩다라삼먁삼보리(阿耨多羅三藐三菩提, anuttara-samyak-sambodhi) 최고의 지혜, 석가모니가 바라본 '수학'과 '문학'은 별개의 것이 아니라 동전의 양면이었습니다. 둘 다 으뜸 가는 가르침의 방편이었죠. 석가모니가 깨달은 삶과 우주의 원리는 일반 언어로는 설명하기 어려운 심오한 이야기들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잠시 고민하며 사색에 빠집니다. 


내가 깨달은 진리는 매우 미묘해서 사람들이 쉽게 이해하기 어려울 것이다. 설명한다 해도 사람들이 이해하지 못하면 나만 피곤하고 고달프리라. 《南》相應部經典1, p.234, 勸請 참조.


사색의 결과 석가모니는 기막히게 적절한 여러 가지 수사법을 동원하여 삶과 우주의 심오한 원리를 쉽고 재미있게 설명했지요. '수數'의 운용은 그중 하나였습니다. 당시 인도 바라문교에는 요가학파를 비롯한 6파의 철학이 있었다는데요, 석가모니는 그중 수철학파數哲學派인 상캬 sāṃkhya 학파의 수 운용법을 응용하여 설법의 문학적 수사법으로 즐겨 활용하였답니다. 


불교의 교리에는 6근根, 6경境, 12처處, 5온蘊, 4제諦, 8정도正道 등등... 수를 응용한 수사법이 무수히 등장합니다. 여기서 숫자 그 자체는 중요한 게 아니었죠. '숫자'와 '문학'은 단지 주제를 설명하기 위해 동원된 방편이요 수단에 불과한 것이었으니까요. 


오늘날 논설문 같은 글에서, 자신의 주장을 펼치기 위해 논조를 서너 개로 정리하여 논리를 펼쳐나가는 수법과 동일한 원리겠죠. 그러니까 숫자는 절대적인 본질이 아니라는 이야기. 그 숫자는 상황에 따라 얼마든지 5, 7, 9와 같은 또 다른 숫자로 대체될 수 있다는 이야기죠


석가모니는 애당초 왜 숫자를 활용한 것일까요? 그 당시는 브라흐마니즘의 신비주의와, 패배주의에 물든 숙명론이 판을 치던 비합리주의의 시대였습니다. 사실은 오늘날 대한민국도 마찬가지. 손에 임금 왕王 자를 쓰고, 2000이라는 숫자를 고집하면 황제가 되리라는 황당한 대한민국의 미신이 전 세계의 조롱을 받고 있는 비합리주의의 시대 아닌가요?


그런 시대의 흐름 속에서 과연 어떤 방법으로 설명해야 삶의 원리가 과학이라는 fact를 사람들에게 효과적으로 납득시킬 것인지, 석가모니 역시 고민이 되었던 모양입니다. 그가 선택한 방법은 '수학'이었죠. 12 연기설緣起說을 예로 들어 설명드려볼까요? 


"삼라만상 모든 존재는 이것이 일어나면 저것도 일어나고, 이것이 사라지면 저것도 사라진다." 그게 연기설의 핵심 내용입니다. 우주 만물의 인과 관계와 상호 의존성을 파악해 낸 놀랍도록 정확한 과학 논리였죠. 고전물리학의 절대성 이론이 아닌, 양자물리학의 상대성 이론의 선성先聲이었습니다. 


문제는 그 원리를 사람들이 잘 납득하지 못한다는 것에 있었습니다. 하긴, 21세기 대한민국에서도 < 1+1 >은 무조건 < 2 >가 정답이라는 절대성 논리가 판을 치는데, 그 당시엔 오죽했겠어요? 그래서 석가모니는 12이라는 숫자를 활용합니다. 삶의 12 단계가 톱니바퀴처럼 치밀하게 맞물려 돌아가는 모습을 보여줌으로써, 미신과 숙명론에 사로잡힌 사람들에게 '삶의 원리는 과학'이라는 사실을 아주 효과적으로 설명해 준 것이죠. 


석가모니가 숫자를 즐겨 사용한 것은 이러한 전시효과를 거두기 위한 방편이요 수단이었죠. 그 사실을 모르고 숫자에만 얽매이면 자꾸만 사소한 형식과 불필요한 이치만을 따지는 곁길로 빠지게 될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숫자가 아니라 본질이죠. 연기설의 의미와 가치가 어디에 있느냐, 그걸 깨닫는 것이 진정한 지혜 아니겠어요? '수학'도 마찬가지 이치일 것입니다. '문학'의 공능이 그러하듯이. 




지식에서 지혜의 교육으로



셋째, 새로운 패러다임의 교육


여러분. 여러분께서도 많은 사람들이 가슴속에 담아두는 인생 영화, <죽은 시인의 사회>를 보셨겠죠? 명문 사립고 웰튼 아카데미에 새로 부임해 온 영어선생님 키팅은 첫 수업시간에 학생들에게 이렇게 묻습니다. 여러분, 문학이 뭐죠? 학생들은 얼른 교재를 펼치고 개념 정의를 읽죠. 그러자 키팅 선생님이 뭐라고 말하는지 기억하시나요? 학생들을 자기 주위에 동그랗게 앉혀놓고 속삭입니다.


찢어버려.

그런 교재 따위는 찢어버리라고.

문학은, 바로 우리들의 삶 그 자체란다. 


그때부터 학생들은 키팅 선생님을 이렇게 불렀죠.


오, 캡틴. 마이 캡틴!      


참 인상적인 장면입니다. 흥미로운 사실은 '문학 교재'를 찢어버린 학생들이 더욱더 '문학'의 재미를 만끽하게 되었다는 것! 자, 그건 뒤에서 다시 이야기하도록 하고요, 지금 저는 키팅 선생님의 말을 조금 수정하고 싶군요. 동아시아 일원론 패러다임에 입각해서 이렇게 표현을 살짝 고쳐보고 싶습니다.  


찢어버려.

그런 교재 따위는 찢어버리라고.

문학은 수단이요 도구란다. 중요한 건 바로 우리들의 삶 그 자체란다. 

건강하고 즐겁고 신나고 기쁘게 사는 게 삶의 본질이란다.


이번엔 한두 단어만 바꿔서 이렇게 한 번 더 속삭여주고 싶습니다. 


찢어버려.

그런 공식 따위는 찢어버리라고.

수학은 수단이요 도구란다. 중요한 건 바로 우리들의 삶 그 자체란다. 

건강하고 즐겁고 신나고 기쁘게 사는 게 삶의 본질이란다.


그러면 아마 '수포자'인 학생들이 눈을 번쩍 뜨고 외치지 않을까요?


오, 캡틴. 마이 캡틴!    


문제는 그다음이죠. '수학 공식'을 찢어버린 학생들을 어떻게 유도해야 더욱더 '수학'의 재미를 만끽하게 할 수 있을지, 그게 문제입니다.  




'수학'과 '문학'이 동전의 양면이듯, '지식'과 '지혜'도 마찬가지. 동아시아의 일원론에 의하면 별개의 것이 아닐 것입니다. 하지만 추구하는 순서와 방법이 매우 중요하죠. 먼저 학생들의 '지혜와 감성'의 눈을 일깨워줘야 합니다. 그렇게 강한 학습 동기를 부여해준 다음, 그에 부합하는 방법론을 활용해 준다면, '지식과 정보'는 공짜 선물처럼 학생들을 찾아갈 것으로 믿습니다. 대체 어떤 방법론을 활용하자는 말일까요? 


'지식'은 시각적이고 '지혜'는 청각적이라는 말을 기억하시나요? 그렇습니다. '지식'은 문자의 영역이자 좌뇌의 영역이죠. '지혜'는 소리의 영역이자 우뇌의 영역이고요. 그러므로 '지혜'는 외우는 게 아니라 느끼는 것입니다. 어떻게 느낀다는 걸까요? 제 '문학 수업'의 경우를 예로 들어볼까요? 우선 아래의 사진을 보시죠.



느낌이 어떠신가요? 이런 걸 학생들에게 보여주면서 같이 공부하자고 하면 어떤 반응을 보일까요? 여러분은 또 어떤 반응을 보이실지 궁금하군요. 아마 다들 도망가지 않으실까요? ㅋㅋㅋ 눈으로 보면 분명 기가 질립니다. 쳐다보기도 싫습니다. 


그런데 소오생의 중국문학 강의를 듣는 우리 사랑스러운 학생들은 너무나 즐거워하더군요. 왜 그럴까요? 귀로 듣기 때문입니다. 소오생의 낭송을 귀로 들으면 너무나 즐거워진답니다. 여러분도 다음 시간에 들어보시면서 참말인지 아닌지 직접 확인해 보시죠. ^^




그렇다면 혹시 '수학'도 '감성과 소리'로 재미를 유도해 보면 어떨까요? 그건 또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냐고요? 아래의 그림을 보시죠. 태극기입니다. 무슨 소리가 들리시나요?


"대~~한, 민, 국~~!!"


소오생의 귀에는 2002년 월드컵에서 세계 4강에 오를 때 온 국민이 외쳤던 그때의 그 함성소리가 들립니다. 여러분의 귀에는 안 들리시나요? 


태극기는 《주역周易》이라는 책의 원리에서 비롯되었죠. 여기서 '역易'은 '바뀐다, 변화한다'는 뜻. 삼라만상은 끊임없이 변화한다고 했죠? 《주역》은 그렇게 변화하는 만물의 내재규율을 탐구하는 책입니다. 그래서 영어 이름은 《The book of change》라네요. 


무엇으로 탐구할까요? 숫자입니다. 그러니까《주역》은 음과 양이라는 2진법의 숫자로 삼라만상의 변화를 파악해 내는 일종의 수철학책인 셈. '효爻'라고 하는 길고 짧은 두 개의 코드(음효陰爻; --와 양효陽爻; ㅡ)를 사용해서 삼라만상의 생성, 변화의 원리를 코딩 시스템으로 구축했답니다. 대충 아래와 같은 구성 원리로요.

이진법(음양)에 3 조합을 활용해서 8가지 경우의 수로 구성한 것을 소성괘, 또는 팔괘라고 불렀다. 그 팔괘를 다시 상하로 겹쳐 구성하여 64개의 경우의 수로 구성한 것을 대성괘, 또는 중괘라고 하였다. 


그러니까 태극기의 구석에 있는 4개의 괘는 각각 (;하늘, (, ☷) (, ☵) (;, ☲)의 세계를 상징하는 거지요. 다시 말해서 태극기의 코딩 시스템에는 음양 조화調和의 이치를 생각하며 국운을 개척하자는 온 겨레의 함성 소리녹음되어 있다는 이야기! 


어때요? 이 정도 '감성의 소리'면 학생들 가슴에 뭔가 좀 와닿지 않을까요? 네? 오히려 더 헷갈리겠다고요? 쩝... 그럼 아래의 그림은 어떨까요? ①번은 《주역》의 디지털 코드에서 힌트를 얻어 발명한 컴퓨터의 디지털 코드입니다. 컴퓨터 게임을 좋아하는 학생이라면, 이 그림의 이면에는 뿅뿅뿅뿅~~~~ 게임하는 소리가 숨어있으니 그 소리를 들어보라 권해보고 싶습니다. 

②번 그림은 마트에서 사용하는 바코드. 역시 《주역》의 디지털 코드를 응용한 거죠. 이제는 QR 코드로 한 단계 더 발전했죠?  ISBN 코드에서는 그윽한 책 향기가 날지도 모르겠네요. 

③번 그림은 인체의 유전자 코드. 역시 《주역》에서 힌트를 얻어 발견한 거죠. 


구양수의 한문에 낭랑한 소리가 숨어있듯, 이 숫자 그림에도 삼라만상의 소리가 내재되어 있겠죠? 물론 그 소리를 들어본 경험이 있는 사람에게만 들리고, 그 경험이 없는 사람에게는 들리지 않겠죠. 사랑하면 보이고 사랑하면 들리나니, 그 이치를 잘 설명해 주면 최소한 흥미는 생기지 않을까요? 


'수포자'였던 소오생은 예전에는 왼쪽 수학 공식을 보기만 해도 어휴... 한숨이 나오고 골머리가 아팠더랬죠. 이제는 수학 공식을 대하면 뇌리에 매크로의 우주가 떠오릅니다. 궤도 위를 맹렬한 속도로 달려가는 행성의 굉음이 마음의 귀에 들려옵니다. 이 정도면 수학에 대한 공포와 두려움은 없어진 거겠죠? 연산 능력이야 컴퓨터가 해결해 줄 거고, 다음 세상에 다시 태어난다면 수학 선생님이 되어보고 싶네요. ^^ 




하지만 크게 기대하지는 마셔요. 이렇게 학습 동기를 부여해도 학습 효과는 그리 크지 않을 것 같으니까요. 위에서도 말했지만 오랫동안 지식 위주의 교육으로 '세뇌' 당하며 살아온 학생들 삶의 관성이 그렇게 금방 바뀔 리가 없으니까요. 한 사람의 우주, 그 내면을 채워주는 '교육'이란 절대로 조급하게 서두를 일이 아니니까요. 


더구나 사람마다 근기根基가 다른 법 아니겠어요? 혹시라도 아직 수학에 대한 재능을 발견하지 못한 학생들에게는 이백 <장진주>의 시 구절을 가르쳐주고, 큰소리로 즐겁게 낭송하도록 하면 어떨까요?


하늘이 주신 재주 쓰임새가 있을 터니

천만금 탕진해도 돌고 돌아 돌아오리.  

天生我材必有用, 千金散盡還復來。



수학 성적이 당장에 오르지는 않더라도, 수학에 대한 재미는 좀 느끼지 않게 될까요? 최소한 두려움은 없어지리라 생각합니다. 그리고 자신에게 자신감을 심어주려 애쓰시는 선생님께 진심으로 감사하는 마음이 생겨날 거예요. 어쩌면 속으로 이렇게 중얼거리며 따스한 존경의 마음을 품게 되지 않을까요?


오, 캡틴... 마이 캡틴! 


수학과 문학은 동전의 양면! 슬기로운 지혜를 발휘하여, 학생들의 삶을 신나고 즐겁고 보람차게 만들어주는 아름다운 교육의 수단이요 방편으로 삼아야 할 것입니다. 수포자의 장광설에 끝까지 귀 기울여주셔서 감사합니다. 






[ 정 리 ]


▶ 싯단타 siddhānta라는 불교 어휘가 있다. '삶과 우주의 오묘한 원리'라는 뜻. 《능가경楞伽經》

▶ 싯단타의 경지는 너무나 오묘해서 일반 언어로는 설명이 불가능하다. '특별한 언어(데샤나 deśanā)'로 가르쳐야 한다. 

▶ 석가모니의 설법을 근거로 유추해보면 '특별한 언어'의 실체는 '수학'과 '문학'임을 알 수 있다. 

'수학'과 '문학'은 '삶과 우주의 원리'를 알려주는 '특별한 언어'다. 

▶ 지혜와 감성의 교육으로 학생들이  '특별한 언어의 소리'들을 있도록 도와주자. 지식과 정보는 선물처럼 저절로 학생들에게 찾아갈 것이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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