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양의 생각의 틀로는 크게 헬레니즘과 헤브라이즘을 꼽는다. 거기에 이집트 문명까지 모두 지중해를 중심으로 형성된 생각의 틀이라고 할 수 있다. 바꿔 말하자면, 서양의 패러다임은 지중해라는 자연환경이 낳은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지중해가 어떤 자연환경이길래? 크게 세 가지 특징이 있다.
첫째, 열린 공간.
바다는 원래 열린 공간이다. 시각적으로 탁 트여있기 때문에 무엇이든지 눈앞에 보이는 현상을 중시하게 된다. (모든 바다가 다 그런 것은 아니다. 우리나라 다도해는 시각적으로 닫힌 공간이다.) 게다가 지중해는 교통 측면에서도 열린 공간이다. (울릉도와 같은 절해고도는 교통 측면에서 닫힌 공간이다. 우리나라는 삼면이 바다지만 교통 측면에서 닫힌 공간이었다.) 지중해는 '찻잔 속의 바다'라는 별명처럼 호수처럼 잔잔하다. 이따금 풍랑이 불어도 도처에 섬이 널려 있고 해안이 가까워서 즉시 피난할 수 있다. 항해술을 익히기에 최적의 장소다. 사방으로 거침없이 진출할 수 있는 교통의 요지다. 이런 환경에서는 시각적이고 분석적인 사유방식이 발달하게 된다. (최영진,《동양과 서양》참조)
사방이 탁 트인 바다에서는 시각 의존도가 높다. 그런데 시각視覺이라는 감각은 분리적이고 분석적인 사고방식을 형성하는 데 큰 영향을 준다. 예컨대 인간은 그 어떤 것을 보더라도 한눈에 모든 것을 다 볼 수는 없다. 반드시 전후좌우의 공간으로 나누어서 하나씩 둘러보고 난 후, 각각의 장면을 분석하여 이성理性에 의해 상황을 종합 판단하게 된다. (월터. J. 옹,《구술문화와 문자문화》112~122쪽 참조) 때문에 시각적 의존도가 높으면 논리적이고 이성적인 분리의 패러다임을 지니기 쉽다. '시각 패러다임'은 분리 패러다임의 첫 번째 특색이다. 그리스 로마를 중심으로 한 지중해 문명에서 미술과 조각 등 시각 예술이 발달한 것도, 훗날 서구의 인문학이 현상학과 분석철학 위주로 발전한 것도 모두 이 때문이다.
둘째, 천혜의 자연환경.
요새는 전 세계적인 기후 위기로 달라졌지만, 옛날 지중해 일대는 천재지변은 거의 없고 기후는 온화했다. 동아시아에 비해 상대적으로 먹을 것도 풍부하고 교통도 편하여 인간이 살기에 너무나 좋았다. 그런데 이런 곳에 살다 보면 자신감, 나쁘게 말하자면 교만한 마음이 생기기 쉽다. 대자연이 만만하게 보여서 정복과 도전의 대상이 된다. 그 결과 서구인들은 대자연을 인간이 충분히 컨트롤할 수 있는 거대한 기계와도 같은 존재로 생각하게 되었다. 지식과 정보를 중시하는 서구 문명의 자연과학적 인식이 여기에서 출발한 것이다. (최영진, 상기上記 서적 참조)
딱 하나, 문제가 있었다. 이따금 나타나는 어떤 자연현상은 도저히 극복할 수도, 이해할 수도 없었던 것이다. "음... 이런 건 초超자연이라고 하자." 그들은 스스로를 논리적으로 납득시키기 위해서 '대자연'을 둘로 분리했다. 즉 자신들이 충분히 정복할 수 있을 것 같으면 '자연', 정복하거나 극복하기 어려울 것 같으면 '초자연'이라고 치부하며 '신(神)의 영역'으로 돌려버렸던 것이다. 이분법적 분리의 패러다임은 이렇게 탄생했다.
이쯤에서 볼테르 Voltaire(佛, 1694~1778) 이야기를 안 할 수 없다. 풍자와 해학으로 위선과 부조리를 비판했던 그가 일갈했다. 아니, 니네들이 알면 과학이고, 모르면 하나님 타령이냐? 그런 생각이야말로 진짜 최대의 신성神性 모독이라구! (Dictionnaire Philosophique, De Etiemble, Paris, 1967. pp 315.) '과학이 아닌 현상'까지 합리적으로 설명해 주던가, 아예 '과학'이라는 말을 꺼내지도 말던가. 이원론의 태생적 모순을 예리하게 지적한 것이다.
분리 패러다임은 신God의 이름을 빌려 모든 것을 자의적으로 단순하게 해석해 버린다. 대자연과 신을 분리하였으니, 이 세상의 다른 모든 것도 분리시켜 생각한다. 그 바람에 인간/자연, 인간/인간, 남성/여성, 정신/육체, 행복/불행 등등 모든 존재가 둘 이상으로 나뉘어 상호 대립 충돌하는 슬픈 관계가 되었다. 그리스 로마 신화에서 수없이 많은 신들이 등장하며 서로 대립 충돌하는 것도 그 이유 때문이다. 특히 우리 민족을 질곡으로 몰아넣은 유물론/유신론, 자본주의/공산주의는 가히 분리 패러다임의 끝판왕이라고 하겠다.
셋째, '평면' 공간.
수평선은 직선일까 곡선일까?
점 A와 점 B를 잇는 가장 빠른 선은 무엇일까? 직선일까 곡선일까?
'학문'을 가르치는 첫 시간이면 언제나 학생들에게 던지는 질문이다. 놀랍게도 아주 많은 학생들이 1초의 망설임도 없이 '직선'이라고 대답한다. 세상에, 네상에! 이, 럴, 수, 가! 우리의 사랑스러운 학생들은 아직도 중세의 서양에 살고 있었다. 아직도 철 지난 이원론의 옛날 '서양학'으로 교육 받기 때문이리라.
중세 이전의 서양인들은 지구가 평면 공간이라고 생각했다. 지구가 둥글다고 말하면 종교 재판에 회부되었다. 우리 누구나 다 아는 사실 아닌가. 그들은 왜 그렇게 생각했을까? 그들 생활 공간의 시야가 좁았기 때문이다. 울릉도 성인봉 꼭대기에 올라가 사방을 한 바퀴만 돌아보시라. 절대로 그런 소리를 못한다. 수평선은 직선이 아니라 곡선이고, 지구는 평면이 아니라 입체의 공간이라는 사실을 대번에 눈치챌 수 있다. 그러나 옛날 서양인들은 수평선은 직선이며 지중해는 평면 공간이라고 생각했다. 지중해는 우리나라 다도해처럼 섬이 많은 바다다. 다도해에서는 수평선이 직선처럼 보인다. 바다가 평면이라고 생각하게 된다. 왜? 시야가 좁기 때문에 나타나는 착시 현상이다. 지중해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엉뚱한 소리지만 나는 어렸을 때 소망 중의 하나가 울릉도를 가보는 것이었다. 지구가 둥글다고 배운 것을 확인해보고 싶었다. 한 점의 섬도 보이지 않는 망망대해를 바라보며, 수평선이 진짜로 곡선인지 확인하고 싶었다. 그리고 2003년 1월 13일. 2m의 눈이 쌓인 겨울 성인봉을 혼자서 어찌어찌 겨우겨우 기어올라갔다. 사방을 둘러보았다. 정말이었다. 수평선은 곡선이었고, 지구는 과연 둥글었다. 공연히 눈물이 흘렀다. 이원론의 우물에서 기어 나와 드넓은 세상을 바라보는 개구리의 기쁨이었을까.
2003년 1월 13일 낮 12시 정각의 울릉도 성인봉. 고대 서양인들이 여기에 올랐다면 패러다임이 바뀌었을 것이다.
'평면적 공간 무대'는 절대적 사유 방식을 탄생시킨다. 고대 서양인들은 평면적 공간 무대인 지중해의 잔잔한 바다 위에서 거칠 것 없이 직선으로 뻗어나가는 생활을 통해 진보적이고 적극적이며 도전적인 생각의 패러다임을 육성시켜 나갔다. 그러나 그것을 뒤집어 생각하면 정복과 침략과 약탈과 심지어 살인의 패러다임이 될 수도 있다. 상대방을 인정하지 않는 배타적이고 투쟁적인 절대성의 논리다. 서구 제국주의 열강의 동아시아 침략 역시 대자연을 정복의 대상으로 바라본 분리 패러다임이 낳은 필연의 결과다. 일제의 조선 침략 역시 해양 문화 특유의 분리 패러다임이라는 장작 위에 '서양학'이라는 발화제發火劑로 불을 지른 것이다.
'서양학'은 지중해라는 '평면 공간'에서 탄생한 분리 패러다임의 기반 위에서 발전한 것이다. 먼저 싹이 튼 것은 'philosophy'다. 분리 패러다임의 인간들은 생각이 단순하다. 그래서 매사를 좀 더 깊이 생각해 보자는 게 'philosophy'다. 이건 나중에 다시 본격적으로 언급할 예정이라 지금은 우선 통과!
가장 먼저 출발한 '서양학'은 '자연과학', 그중에서도 '기하학'이었다고 한다. 지중해라는 열린 공간을 통해 끊임없이 영역 확장을 시도했던 고대의 서양인들에게 항해술은 그 무엇보다도 중요한 기본이었으리라. 그래서 서구는 해양 문화라고 하는 것 아니겠는가. 여기에서 기하학이 맨 먼저 발전한다. 바다라는 '평면' 위의 점 A와 점 B를 잇는 최단 거리를 찾고자 한 것이다. (최영진, 상기上記 서적 참조) 유클리드의 기하학에서 시작하여 갈릴레이와 뉴턴의 역학체계로 이어지는 20 세기 이전 서구 과학의 발전은, 따지고 보면 바로 이러한 평면적이고 직선적인 생각의 패러다임에서 비롯되었다고 할 수 있다. 우주와 대자연은 수많은 부품으로 조립된 거대한 기계이고, 인간은 고도의 성능을 지닌 로봇 같은 존재라는 발상... 그 기반 위에 쌓아 올린 것이 '서양학'의 본질임을 알아야 한다.
직선과 평면은 현실에서는 존재하지 않는다. 이론상으로만 존재하는 가상의 선이요 공간이다. 작은 평면 공간에서는 직선처럼 보인다 할지라도 그건 착시 현상이다. 그 직선을 무한대의 넓은 공간으로 확대시키면 어떻게 될까? 점점 휘어져서 원이 될 것이다. 지구는 중력이 작용하는 동그란 입체의 공간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점 A와 점 B를 잇는 가장 빠른 선은 직선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곡선이고, 평면 공간처럼 보이는 지중해도 사실은 입체 공간인 것이다. 착시 현상을 절대적으로 믿는 것, 그게 분리 패러다임의 한계다.
'서양학science'은 20세기에 들어서서 몰락의 길을 걷게 된다. 여러 가지 원인이 있겠지만 근본 이유는 사상적 기반이 되는 '분리 패러다임'의 한계 때문이다. 지중해에서 익힌 항해술로 대서양 인도양 태평양으로 진출하다가, 마침내 마젤란이 지구를 한 바퀴 도는 것으로 지구가 평면 공간이 아니라는 사실을 확실히 깨달았기 때문이다. 그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새로운 패러다임이 필요했다. 그리고 '서양학' 중에서 최첨단을 달리는 '물리학'은 동아시아의 결합 패러다임과 융합하여 새로운 영역을 개척한다. 눈에 보이는 것만을 믿었던 20세기 이전의 자연과학을 '양陽의 과학'이라고 한다면, 그 이후 동과 서의 융합된 패러다임을 기반으로 하는 것은 '음陰의 과학science'이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최영진, 상기上記 서적 참조)
앞으로 우리는 '인문학' 대신 동아시아의 결합 패러다임에 기반한 '학문'을 해야 한다. 그리고 '양의 자연과학' 대신 '음의 자연과학'을 가르치고 배워야 한다. 자세한 것은 먼저 동아시아의 '결합 패러다임'에 대해 알아본 후에 다시 이야기하자.
[핵심 요약]
◎ 서양의 분리 패러다임은 지중해라는 자연환경이 낳은 것이다.
◎ 지중해는 시각적으로 '열린 공간'이다. 시각적인 환경은 논리와 분석을 중시하는 분리 패러다임을 낳는다.
◎ 지중해는 젖과 꿀이 흐르는 천혜의 자연환경이었다. 대자연을 경시하고 정복하려는 마음을 낳게 한다.
서양인은 '초자연'이라는 말을 만들어 정복할 수 없는 자연현상을 '자연'과 분리하여 생각했다.
그리고 '초자연'을 신의 영역이라고 치부했다. '신'과 '자연'을 분리한 것이다.
그 결과 이 세상 모든 존재를 분리하여 상호 대립하는 존재로 인식하였다.
◎ 고대의 서구인은 지중해를 '평면 공간'으로 인식했다. '서양학'은 그 기반 위에서 발전했다.
바다 위의 점 A와 점 B를 잇는 최단 거리를 찾고자 하는 노력이 '기하학'으로 이어졌다.
유클리드 기하학에서 갈릴레이, 뉴턴으로 이어지는 서구 자연과학은 한계에 부딪친다.
지구가 '평면 공간'이 아니라 '입체 공간'임이 증명되었기 때문이다. 분리 패러다임의 한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