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학 엑소더스의 길은 '학문'에 덧씌워진 세월의 이끼를 걷어내는 것이다. 먼저 식민지학문의 이끼를 걷어내야 한다. 우리에게 이미 너무나 친숙해진 그 용어들, 동양‧인문학‧문학‧철학‧종교‧신화... 그 위에 덧씌워진 일제 군국주의의 망령을 하나씩 지워내야겠다. 하지만 그것은 출발일뿐, 본격적인 여정은 권위주의의 이끼를 걷어내고 '학문'의 참모습을 보여주는 것에 있다.
'권위權威'란 좋은 것이다. 모두에게 인정받을 수 있는 실력과 인품을 갖추어 저절로 사회에 큰 영향력을 발휘하는 것이 '권위'다. '권위주의'란 나쁜 것이다. 실력은 쥐뿔, 인품은 사기꾼인 자들이 그저 타인들 위에 군림하고픈 욕망으로 '권위 있는 스승'의 이름을 팔아 복종을 강요하는 게 권위주의다.
'권위주의 학문'은 식민지 학문보다 세월의 이끼가 훨씬 더 두텁다. 아주 오래전 2천여 년 전부터 늘 우리를 억눌러왔다. 군림하고 지배하고 싶은 자들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늘 있어왔으니까. 지금도 '권위가 필요한 자'들은 '권위 있는 스승'인 공자를 팔아먹고, 노자 장자와 석가모니를 팔아먹으며 은근히 우리에게 복종을 강요한다. 사이비 목사들이 하나님과 예수를 팔아먹듯이. 19세기의 동아시아 '학문'이 고리타분한 한학으로 흘러서, 잘못된 서구의 인문학이 이 땅에서 판을 치게 만든 것도 따지고 보면 바로 '권위주의 학문' 때문이다. 그 때문에 현실과 괴리되어 원래 모습의 '학문'조차 개혁의 대상으로 전락했던 것이다. 그 권위주의의 이끼를 걷어내고 '학문'의 진면모를 보여주는 것, 그것이 인문학과 동양학 엑소더스의 최종 목적지다.
'권위주의 학문'은 현실과 괴리되어 있다. 보수적이고 비실용적이다. '서구의 인문학'은 딱딱하고 따분하다. 이론과 분석을 중시하기 때문이다. 강압적으로 찍어 누르는 '일제의 동양학'은 더 말할 나위가 없다. 기존에 우리가 접해 온 학문 아닌 그 사이비 학문들은 한결같이 재미없고 골치 아프다. 그러니 학생들이 공부를 좋아할 리가 만무하다. 그 속에서 삶의 가치와 의미를 발견하기는커녕 자포자기 현상을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세월의 이끼를 걷어낸 진짜 '학문'의 모습은 놀랍도록 싱그러울 것이다. 형식은 초콜릿처럼 보드랍고 달콤하며, 내용은 따스하고 깊이가 느껴질 것이다. 접하면 접할수록 피곤한 육체와 다친 마음이 치유되고, 삶의 의미와 가치를 느끼게 될 것이다. 바로 그 진짜 우리 것, '학문' 이야기를 해보자는 것이다.
인문학 또는 동양학 엑소더스의 이 길은 출발조차 쉽지 않다. 이제 와서 무엇을 어떻게 바꾼단 말이냐, 마뜩잖은 표정으로 슬그머니 돌아앉던 어느 저명하신 인문학자님의 모습이 자꾸만 떠오른다. 그게 우리 사회 기득권의 보편적 반응이리라. 그래도 떠나야만 한다. 일송정 푸른 솔, 천년 두고 흐르는 강가에서 말 달리던 선구자도 계셨거늘, 누군가는 떠나야 하지 않겠는가.
[ 정리 ]
◎ '인문학'과 '동양학'은 '우리 것'이 아니다.
'인문학'은 우리와 맞지 않는 서양 것이고, '동양학'은 우리 사회의 위기를 초래한 '식민지학문'이다.
◎ '인문학'과 '동양학'에서 탈출하여, 우리의 것인 '학문'으로 위기를 극복해 보자.
[ 표제 사진 ]
◎ 연변의 일송정 가는 길. 우측 상단이 일송정 정자. 참된 '학문'을 향한 길을 꿈꾸며.
[ 다음 꼭지에서는... ]
◎ '인문학/동양학'은 '학문'과 어떻게 다른가, 그 이야기를 해야겠다. 그러려면 먼저...
◎ '동東과 서西'의 생각의 틀은 어떻게, 왜 다른가, 그 이야기부터 해야겠다.
< 제1장. '동양'의 함정.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