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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오생 May 17. 2023

동양학 엑소더스 (상)

제1장 - '동양'의 함정 

'동양학'은 일제 식민지학문의 결정체다. 우선 그 명칭부터 치욕적이다. '동양'이라는 단어의 뜻을 알고 난 후 오랫동안 '동양학'을 화두로 붙잡고 있다 보니, 때로는 어디선가 그들의 목소리가 들려오는 듯했다.


"과거에는 동아시아 동쪽 먼바다 섬나라의 키 작은 왜인倭人이라고 우리를 멸시했지?

 으하하, 이제부터는 우리가 동아시아의 주인이다.

 우리 대 일본제국주의 생각의 틀로 동아시아의 사상과 역사와 문화를 새롭게 재편하겠노라." 


환청의 그 메시지가 섬뜩하다.




'동양학'의 근거지는 소위 '제국대학'이었다. 일제는 '새 시대'를 위한 '새로운 엘리트 양성 기관'으로 일본 땅에 5개의 제국대학을 세웠다. '아시아에서 벗어나 서양의 일원이 되겠다'는 이른바 '탈아입구脫亞入歐'를 기치로 내걸고 서양의 '최첨단 지식'을 갖춘 서양학 전문 인력 양성 기관을 만든 것이다. 그리고 1924년 우리나라에 6번째 제국대학인 경성제국대학을 설립한다.


(좌) 김세환,《끝나지 않는 식민지학문 100년》(박이정, 2004) 표지. (우) 식민지학문 세뇌의 본거지, 경성제국대학.


 만들었을까? 소위 '내선일체內鮮一體'라는 구호대로 일본인과 조선인의 동등한 교육을 위해서? 그럴 리가 없다. 일제 강점기가 시작되자 우리의 지식인들은 민족운동의 일환으로 근대적인 대학의 설립을 추진한다. 그러다가 3.1 운동을 계기로 1922년 무렵에는 전국적인 모금운동까지 벌인다. 일제는 바로 이 민족운동의 흐름을 저지하고 효율적인 식민 통치를 위해 1924년, 대학 입학 예비반인 예과豫科만으로 급히 경성제대의 문을 열었던 것이다.


경성제대의 대학 구성원과 대학 구조를 보면 그 취지와 성격을 확연하게 알 수 있다. 개교 당시 전체 교수는 57명, 그중 조선인은 5명이었다. 조선인 학생은 전체 150명 중 47명에 불과했던 것만 보아도 조선인 교육을 위한 학교 개설은 구실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금방 알 수 있다. 대학 구조를 들여다보면 그 의도가 더 분명해진다. 정치 · 경제 학부는 아예 없었다. 왜? 자칫 조선인의 독립 의식을 고취시킬 수 있다는 가능성 때문에. 이공학부는 1943년에야 개설한다. 왜? 조선인에게 선진 과학 기술을 교육하기가 꺼려져서. 그러다가 태평양전쟁이 막바지에 이르자 군수산업 지원을 위해 급히 개설했던 전시 체제 학부였던 것이다.


개교 당시부터 개설한 학부는 법문학부와 의학부뿐이었다. 하지만 의학부는 양의洋醫 양성이라는 수요 때문에 개설한 것이고, 법학과는 체제를 수호해 줄 판검사를 양성하여 식민지를 효율적으로 지배하기 위해 필요했을 것이다. 결국 경성제대를 설립한 핵심 목적은 철학과 · 사학과 · 문학과 등 3개 학과로 구성된 '인문학'에 있다고 볼 수 있다. 그 개설 목적이 무엇이었을까? 순수하게 서구인의 인지 체계가 담긴 '인문학'을 연구하고 교육하기 위해서? 그럴 리가 없다. 이런 학과들은 인간 세상을 바라보는 생각 패러다임을 배우며 가치관을 형성하는 전공 분야다. 다시 말해서 바로 여기가 일제 군국주의 중심의 세계관이 담긴 식민지학문을 우리 지식인에게 세뇌했던 본거지였다는 뜻이다.

 



'동양'이라는 단어는 '일제 군국주의 중심의 동아시아 세계'라는 뜻. 그 시작부터 이미 객관성을 상실한 언어다. 1926년, 경성제대는 ‘동양 문화의 권위’를 표방하며 본격적으로 출범한다. 그리고 1931년 9월, 일본 관동군은 만주사변을 일으켜 만주를 점령한다. 그해 10월, 제7대 총장 야마다 사부로山田三良는 부임하자마자 만주로 떠난다. 그리고 귀국 직후 '만몽(滿蒙) 문화연구회'를 결성하고, 교수 학생들에게 만주와 몽골 연구 답사에 적극 참여하게 한다.


그 후 경성제대는 ‘아시아 대륙문화의 개발자’라고 자기규정을 바꾸고, 만몽과 중국 대륙을 '국책 과제'로 삼는다. 일본이 일으킨 전쟁의 노획물인 ‘기회의 땅’ 만주와 대륙 침략에 대학의 사활을 걸었던 것이다. (정준영 서울대 규장각한국학연구원 조교수, [1930년대, 우리 시대의 뿌리를 찾아서] <전쟁 속의 학문, 식민지 경성제대의 현실> 참조. 『주간경향』1527호, 2023. 5. 15.)


경성제대는 일제의 동아시아 대륙 침탈의 사상적 본거지였다. 서양 '인문학' 속의 '철학'과 '사학'과 '문학'은 경성제대에서 조선과 중국 침략의 이론적 근거를 제시하는 '사이비 학문'으로 전락했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동양사학'이나 '동양철학'이 바로 그것이다. '동양철학'은 뒤에서 따로 이야기하자. 


'동양사학'이란 게 무엇인가. 메이지유신 이후 일본은『고사기古史記』와 『일본서기日本書紀』를 바탕으로 이른바 '황국사관皇國史觀'을 완성한다. "황국(일본)은 이 세상 모든 나라의 근본이며 뿌리다. 그 뿌리가 견고하면 가지와 잎은 더욱더 번영한다"는 내용이다. 무엇을 위해 만들었을까? 소위 '정한론征韓論', 즉 대륙과 조선 침략의 이론을 구축하기 위해 만든 군국주의 역사관이다. 일본은 대한제국의 국권을 강탈하자마자 역사 왜곡에 필요한 자료를 제외한 약 20만 권의 사료를 불태워버렸다. 진시황의 분서갱유가 무색한 희대의 무도한 사건이다. 그리고는 이른바 '조선사편수회'를 만들어서 '황국사관'을 근거로 동아시아 특히 조선의 모든 역사를 완전히 재편성한다. 그것이 바로 '동양사학'의 정체다. 


1985년 10월 4일 자 조선일보 기사. 이따금 이런 기사가 조선일보에 실려 사람을 당혹스럽게 만든다.


광복 후 서울대학교 동양사학과에서는 과연 어떤 역사를 가르쳤을까. 적어도 조선사편수회 출신 학자가 서울대 교수님이 되어 대한민국 역사학계의 '태산북두'로 군림했다는 사실만은 분명하다. 식민사관에 함몰된 대한민국 고위직 인사들이 대부분 서울대 출신이라는 사실이 과연 우연일까. 




'문학'의 상황은 좀 낫지 않냐, '동양문학'이라는 말은 없지 않느냐고 말하시는가? 그건 기존의 '문학'을 존중해서가 아니다. 아예 제도권에서 말살해 버렸다는 뜻이다. 다시 언급하겠지만, '문학'은 'literature'와 동의어가 아니다. 성격과 방법론이 크게 다르다. 그런데도 일제는 'literature'를 '문학'이라고 번역했다. 그리고 기존 '문학'은 '고전문학'이라는 명칭으로 과거의 시간 속으로 유폐시켜 버리고, 그 빈자리를 'literature'로 채운 후에 그것으로 조선 청년들의 정신세계를 '세뇌'했다.


1937년 중일전쟁이 발발하자 'literature', 일제가 말하는 그 '문학'은 본모습을 비로소 여지없이 드러낸다. 조선 청년에게 그토록 사랑받던 최남선이나 이광수 등의 수많은 '문인'들은, 도리어 그들을 사지死地로 내모는 일에 앞장선다. 젊은이들에게 죽음을 예찬하며 일제의 '성전聖戰'에 참여하라고 독려한다. 일제가 들여온 'literature'가 '동양학'이라는 반민족 친일 세뇌 수단의 하나에 불과했음이 만천하에 드러난 것이다.


만일 전통의 '문학'이 유사한 협박 상황에 부딪쳤다면 어떠했을까? 기존 '문학'은 원래 어떤 상황에서도 비굴하게 지조를 꺽지 않는 '선비의 정신'이었다. 이렇게 말이다.



오호라. 개돼지 새끼만도 못한 소위 우리 정부 대신이라는 작자들이 이익을 추구하고,

위협에 겁을 먹어 나라를 파는 도적이 되었으니,

사천 년 강토와 오백 년 종사를 남에게 바치고 이천만 국민을 남의 노예로 만들었으니…… 중략 ……

아, 원통하고도 분하도다. 우리 이천만 남의 노예가 된 동포여! 살았는가? 죽었는가?


장지연, <시일야방성대곡是日也放聲大哭>, 1905년 11월 20일 자 <황성신문> 사설에서

출처: [네이버 지식백과] <오늘 목 놓아 통곡하리> 항목



'학문'의 '문학'과 '동양학'의 '문학'은 엄청난 차이다. 그 함정에 빠지지 말자.


지금 거론한 장지연이나 최남선, 이광수와 같은 인물은 모두 변절자다. 초창기에는 나라와 겨레를 위한 독립 투쟁에 앞장섰던 인물들이었지만, 일제의 탄압과 핍박을 받고 종국에는 모두 변절하고 만다. 공자로부터 비롯된 전통 '학문'의 정신을 제대로 이어받지 못한 비극적 종말이었다. 최남선과 이광수의 선택은 특히 아쉽다. 그들은 처음부터 전통 '문학'이 아니라 'literature'의 길을 선택했기에, 점점 더 왜곡된 '동양학'의 함정으로 빠져들어갈 수밖에 없었다. 만약 그들이 전통 '문학'의 정신을 배우고 지켜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홍명희와 함께 조선 3대 천재 문인으로 불렸던 그들이니만큼,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이 소중한 나라의 보물이 되지는 않았을까.


'동양학'이란 들어가면 갈수록 점점 비뚤어지는 왜곡된 세계다. 설령 백번 양보한다 해도 이런 단어는 논의의 출발점부터 이미 일제 군국주의의 시각을 깔아놓고 있다는 점만은 부인하기 어렵다. 그런 단어를 우리가 왜 사용해야 한다는 말인가. 




[ 표제 사진 ]

◎ 경성제대와 구 서울대학교 본관. 동양학의 본거지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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