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대적인 것은 없다. 모든 동아시아인의 생각 틀이 결합 패러다임이고, 모든 서구인이 분리 패러다임이라는 이야기는 아니다. 동아시아에도 상대적으로 살기 좋고 시각적으로 열려있는 땅도 있으며, 지중해 연안에도 살기 힘들고 시각적으로도 닫힌 공간이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아울러 교통의 발달과 함께 점차 다른 자연환경 속에 사는 사람들과 접촉하며 생각하는 틀도 상호 영향을 받게 된다. 이른바 인문환경의 영향을 받아 생각의 틀도 제각기 개인적 인연을 따라 변화하게 되는 것이다.
서구인들은 지중해에서 배운 항해술로 대서양으로 진출하고 아프리카 대륙을 돌아 인도양을 넘어 19세기말 마침내 동아시아까지 진출한다. 여기서 진출한다는 말은 강력한 군사력으로 다른 민족과 국가를 식민지로 삼고 정치 경제적으로 지배한다는 뜻. 이때 일본은 재빨리 분리의 패러다임에 기반한 서양학을 받아들이고 그들 '서방 세계'의 일원이 된다. 제국주의의 멤버가 되어 동아시아 침탈의 현지 가이드 역할을 한 것이다.
제국주의 침략의 희생 국가 중에서 정신적으로 가장 큰 피해를 입은 나라는 단연코 우리나라다. 일제는 35년 강점기 동안 식민지 학문을 교육이라는 이름으로 우리의 '지식인'들을 철저히 세뇌했다. 그 결과, 해방 이후 지금까지도 그 '지식인의 후예'들은 여전히 우리나라 학계學界의 기득권자로 군림하고 있다. 지금도 이분법적 분리의 패러다임을 교육하며 한국인의 정신세계를 철저하게 둘로 갈라놓고 있는 것이다.
나는 진보일까, 보수일까? 이쯤 해서 다시 한번 생각해 보자.
먼저 다짜고짜 질문을 던진 그 친구에게 물어보고 싶다. '진보'가 무엇이고, '보수'는 또 무슨 뜻이냐고. 어쩌면 좌익 우익 하면서 '빨갱이 vs. 애국자' 같은 해괴한 논리를 펼지도 모른다. 대화 불가다. 빨리 헤어져 집에 가야 한다. 어쩌면 사전에 나오는 말을 할지도 모른다. '진보'는 사회의 전진을 추구하는 progressivism, '보수'는 전통적인 것을 옹호하는 conservatism이라고. 오케이, 대화 가능! 하지만 그건 이분법 논리다. '진보'와 '보수'는 영어의 번역 용어이기 이전에 한자 단어다. 엄연히 원래부터 가지고 있던 고유의 뜻이 있다.
'진보進步'는 '진일보進一步'의 준말이다. '한 걸음 더 나아간다'는 뜻. 어디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간다는 말일까? '까마득한 절벽에서 허공을 향해 한 걸음 더 나아간다', 즉 '백척간두百尺竿頭 진일보進一步'에서 나온 불교 용어다. 그러면 어떻게 될까? 산산조각이 난다. 그런데 몸을 던지라는 말이 아니라 자신의 생각, 고정관념을 던지라는 뜻이다. 그 어떤 위기 상황에서 자신의 선입견이나 고정관념을 완전히 박살내면 그때 비로소 돌파구가 생긴다는 뜻이다. "생각에 머무름이 없어야 한다 應無所住而生其心"는 《금강경》의 가르침과 일맥상통한다. 공부하고 수련하는 사람으로서 마땅히 가지고 있어야 할 자세다.
'진보'는 간절하고 절박한 심정으로 '내 생각의 틀'을 절벽에서 허공에 내던지는 것이다. 지리산 화엄사.
'보수保守'는 '전통의 가치를 지키는 것'을 말한다. '전통의 가치'는 눈에 보이는 형식이 아니다. 시대의 흐름에 따라 '온고지신溫故知新', 옛 것을 익히고 새것을 배우면서 그 참된 가치를 오늘날의 현실에 맞게 적용하여 발현시키는 것이다. 그래야 '전통'의 내용이 풍성해지면서 그 가치가 뼈대를 이루어 후세에 이어질 수 있다. 단순하게 옛 것의 형태만을 지키는 것은 '보수'가 아니라 '의고擬古', 그저 옛날을 흉내 내기만 하는 것이다. '보수' 역시 공부하는 사람으로서 마땅히 가지고 있어야 할 자세인 것이다.
이렇듯 우리 전통 학문에서의 '진보'와 '보수'는 전혀 대립되는 개념이 아니다. 산다는 것 자체가 치열하고 간절하게 공부하고 수련하는 것이므로, '진보'와 '보수'는 우리 모두가 갖추어야 할 아름다운 덕목이다. 결합 패러다임이란 바로 이런 생각의 틀이다. 여기에 싸우고 따질 것이 어디 있단 말인가? 좌익과 우익? 그런 게 뭔데, 우리가 왜 굳이 엉뚱한 분리의 사고방식을 끌어들여 언제까지나 대립과 충돌을 일삼아야 한단 말인가?
'신학문, 인문학, 식민지학문'은 분리 패러다임의 산물이다. 이것으로는 우리 민족이 하나가 되어 분단의 비극을 극복하고 새로운 미래를 열어갈 수 없다. 우리의 것인 '학문'은 결합의 패러다임이다. 어린아이와 같은 단순 논리의 이분법적 세계에서 벗어날 수 있는 지성의 비타민이다. 이 비타민을 섭취하여 조화와 중용, 간절함과 겸허함으로 다시 하나 되는 길을 걸어가야 한다. 하나 됨의 그곳이 바로 인문학 엑소더스의 종착역이다.
[ 핵심 정리 ]
◎ 서구의 인문학은 이분법적 분리 패러다임을 기반으로 탄생했다. 시각적이고 논리와 분석을 중시한다.
이 세상 모든 것을 분리하여 생각하고, 분리된 것들은 모두 서로 대립 충돌하는 관계로 인식한다.
◎ 동아시아의 학문은 결합적 패러다임을 기반으로 탄생했다. 청각적이고 지혜와 감성을 중시한다.
세상의 분리되어 보이는 모든 것들을 상호 보완하여 '하나'로 결합해야 할 음과 양의 존재로 인식한다.
◎ 분열과 갈등의 한국 사회는 일제가 심어놓은 서구 인문학의 이분법적 분리 패러다임의 소산이다.
우리 것인 '학문'은 결합의 패러다임이다. 이 지성의 비타민으로 다시 하나 되는 길을 걸어 나가자.
[ 표제 사진 ]
◎ 티베트 불교 닝마파의 본산지, 티베트의 사원 도시 바이위白玉에 찾아온 황혼.
삶과 죽음은 하나다. 빛과 어둠처럼 동전의 양면일 뿐. 진보와 보수도 그렇지 아니할까.
[ 다음 꼭지에서는... ]
◎ '학문'과 '신학문/인문학'은 어떻게 다른가, 그 얘기를 해보자.
<제2장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