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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릉도, 방랑의 추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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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정을 잊어버리셨나요?
by
소오생
Jan 21. 2024
제7장. 봅슬레이를 아시나요
[제1부] 2003. 1. 13.
현재 시간 2003년 1월 19일 오후 4시.
여기는 제 방 책상의 컴퓨터 화면 앞.
아직도 온몸이 붕 떠있는 기분이기는 합니다만 그래도 이젠 정
신이 쬐끔
들어오니까...
기억이 희미해지기 전에
지난번에 하다가 만 성인봉 뒷
이야기를 마저 쏘아드리겠습니다.
성인봉 정상에서 눈을 굴려 카메라 받침대를 만들어서
리모컨으로 몇 장 찍어보고 있는데... 어디선가 두런두런 말소리!
중년의 아저씨 두 분, 그리고...
가냘픈 체구의 수녀님 한 분이 올라오셨네요?
여기까지 말씀드렸죠? ^^;;
2003. 1. 13. 오후 1시 10분.
올라오신 분들을 잠깐 소개해 드릴까요?
대화를 잠시 엿들으니 도동 성당의 수녀님과 교우들이시네요.
겨울용 검은 등산복을 폼 나게 입으신 분은,
도동에서 민박집(동진 민박)을 하신다는 김상율 선생님.
벌써 한눈에 보아도 전문 산악인 같군요.
빨간 등산복을 입으신 또 한 분은... 사알짝 귀여운 체구의 성당 사무장 님.
이상 소개 끝.
근데 이분들은 나리 분지로 하산한다네요?
그래요?
저도 따라가고
싶은데
.
..
내려가는 길이 힘들까요? 얼마나 걸릴까요?
미끄럼만 잘 타믄 금방 내려가지예.
미끄럼? 히야, 고것 재밌겠다...
그렇긴 한데,
출발할 때 신신당부하시던 고덕진 어르신 말씀이 귀에 쟁쟁 울리네요?
그 반대쪽, 나리 분지로 가믄 큰 일 나! 글루는 눈이 엄청 쌓여서 절대 가믄 안 뒤여.
울릉도 명 가이더 어르신 말씀을 어길 수도 없고, 이걸 워쩐댜?
에이, 하지만 믿음직한 김상율 선생이 앞장선다는 사실을 아시면 어르신두 용서해 주실 게야...
근데 핸펀 배터리가 맛이 간지라 어르신께 연락 불가.
처음 본 분들에게 빌려 쓰자니 차마 입이 안 떨어지네요...
에라, 얼릉 내려가서 전화드리면 안 되겠나?
어르신 심려 끼쳐드리는 지도 모르고 제멋대로 생각하는 한심한 울릉도 짜가 김삿갓... ㅠㅜ
아래 점선이 필자가 미끄럼 타서 내려간 곳.
잠시 후.
그리하여 하산을 하는데,
나리분지 신령수를 향해 급경사로 이어진 계곡의 눈밭에 조심스레 발을 밟아보니...
이크크~ 태하령 정상 뒷길처럼 몸이 거의 허리까지 푸~~ 욱 빠지누먼요?
게다가 60도는 됨직한 급경사이어서
상반신이 앞을 향해 금방이라도 떼구르르~ 굴러가 버릴 듯.
윽~ 넘 위험하네요...
간신, 간신히 몸을 빼서 원 위치! 어휴...
흑의의 싸나이, 김상율 협객(^^)은 어찌 하시나 살펴보니,
히야~ 마대麻袋를 가져오셨네요?
지난번에 제가 겨울 울릉도에 오려면 마대 하나씩 준비하는 게 좋겠다고 말씀드렸죠?
무슨 용도인지, 이젠 눈치채셨겠죠? ^^
흑의의 협객은 마치 숙달된 조교처럼...
1) 마대를 깔고 앉아서...
2) 배낭을 돌려서 앞으로 껴안더니만,
3) 온몸을 완전히 뒤로 드러눕히고는,
4) 부릉부릉~~ 시동을 걸듯, 손바닥을 노로 삼아 눈바다를 헤치고 조금씩 조금씩 내려갑니다.
그 바로 밑으로는 60도의 아찔한 급경사!
으~~~
보기만 해도 쩌릿쩌릿, 긴장감에 온몸이 저려오네요.
좌측 하단 부분에서 점프하기 직전. 왼쪽 능선 끝에 희미하게 추봉이 보인다. 2003. 1. 13.
앗, 그 순간... 점프~!
우와, 이~~ 얏호!
우리의 김상율 선수, 그야말로 쏜, 살, 같, 이 내려가는군용!!!
응?
점점 더 가팔라지는 내리막 길을 스피드를 더하며 점점 더 무섭게 떨어지는데,
하하하, TV에서만 보던 겨울 스포츠 종목 봅슬레이가 바로 이거 아냐?
[각주]
이어서 수녀님도 도전!
마대에 누으시더니만 히야,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바로 스타트!
가냘픈 몸매 탓인지 속도는 별로 나지 않지만...
나풀나풀 검정 수녀복을 휘날리며
급경사의
하얀
눈밭을
미끄러져 내려가
는
그
모습이,
땅 위로 임하시는 천군 천사 같으시네요!!!
다음은... 어랏? 제 차례네요? 두근두근...
잠시 중계방송!
예, 이번엔 드래곤 선수가 나서는군요?
아니, 근데 장비가 영 불량하군요. 마대도 없이 괜찮을랑가 모르겠습니다.
엇? 말씀드리는 순간, 드래곤 선수, 겁도 없이 경사지에 몸을 던졌습니닷!
예~ 지금 온몸이 썰매가 되어 바람을 가르고 내려가는군요!
잠시 드래곤 선수 얼굴 표정을 클로즈업하여 슬로비디오로 잡아볼까요?
끼야~~~ 악!!! (^___________^)
유쾌, 상쾌, 통쾌의 절정이올시당!!!
얼굴은... 할아버지네요! 눈썹이랑 머리카락이 온통 하얗습니다.
표정은... 하핫, 이건 완전히 다섯 살 장난꾸러기 알라군요!
봅슬레이를 타면 회춘이 되는 모양입니다.
연세 드신 분들, 비아그라 먹지 말고 울릉도 성인봉 봅슬레이 경기장으로 빨리빨리 오시기 바랍니다.
앗, 드래곤 선수, 갑자기 몸이 부~웅 뜨는군요?
일 미터쯤 허공을 날았다가 다시,
털썩~~!
또다시 쌔애앵~~~ 질주를 계속하고 있습니다!
아마도 푹 패인 곳을 빠른 스피드로 지나다 보니 몸이 자주 뜨는 것 같습니다.
속도는 시속 70km, 80km, 예, 점점 빨라지는군요.
앗, 또 허공에 부~~ 웅 뜨고,
다시 털썩~~
앗, 드디어 드래곤 선수, 무서운 속도로 선두로 치고 나오는군요!
왕초보가 위험하지 않을까요? 저러다가 큰일 나겠습니다!!
안 되겠다, 브레이크!
두 발을 눈 속 깊이 파묻으며 양손을 활짝 벌려 눈더미 속에 파묻으며 10여 미터 내려가니,
끼이~~~ 익!
2003. 1. 13. 오후 1시 20분
나리분지에서 바라 본 성인봉. 2003. 1. 13.
계곡을 빠져나와 성인봉을 바라보니 바로 위에 아찔한 높이로 솟구쳐있네요.
높이로만 따진다면
이곳부터 어림잡아 대충 400m 정도 더 높아 보입니다.
마침 표지판이 보이네요. 여기부터 정상까지 거리는 4km!
시계를 들여다보니 지금 시간 1시 20분!
나그네 여러분,
4km 산길을 단 십 분에 주파했다니, 믿으시겠어요?
아니, 세상에 이렇게 즐거운 하산 길이 있다니!
하하하하!!!!
등산을 나름 꽤 해봤다는 드래곤 산행 역사를 완전히
새로
써야겠네요~~
십 분쯤 기다리니 수녀님도 무사히 하산 성공!
수녀님 얼굴에도 하나 가득 피어난 함박웃음!
연신 눈을 뭉쳐 우리들에게 던지시네용~~ 크크크
나만 알라가 된 줄 알았더니, 모두들 동심으로 돌아갔군용?
퍽!
애고~
나두 한 방 맞았네!
이상으로 봅슬레이 중계방송을 마칩니다.
캐스터에 울릉 짜가 드래곤이었습니당!
수녀님, 거기서 뭐하시어요? 눈을 뭉치고 계신 장난꾸러기 수녀님. 뒤에 추봉이 보인다. 2003. 1. 13.
산삼 먹은 물, 나리분지의 신령수를 마시다가 물속에 그만 풍덩~~
그 얘기는 맨 처음에 미리 말씀드렸죠? 통과!
20년 뒤의 나리분지 신령수. 옛날과는 달리 발이 빠지지 않게 잘 정비가 되었다. 2022. 10. 22.
나리분지에서 내려오며 섬백리향을 보고파 두리번거렸던 얘기도 했죠?
여기도 얼릉 통과! ^^
섬백리향 군락지. 20년 전에는 눈에 덮혀 보이지 않았다. 2022. 10.22.
섬백리향. 들국화의 일종. 밤에만 진한 향기가 난다고 한다. 2022. 10.22.
나리분지로 들어섰습니다.
기암 괴봉으로 둘러 쌓인 사방을 둘러보니 끝없이 펼쳐진 설원!
담백한 겨울 풍광 속에 스며든
달콤한 초봄의 향기가 어디선가 밀려와 우리의 온몸을 부드럽게 휘감아 도는군요.
눈 덮힌 나리분지의 억새 투막집. 2003. 1. 13.
평소의 억새 투막집. 2022. 10. 22.
투막집과 나리 분지 (1)
투막집과 나리 분지 (2)
생각보다 나리 분지는 꽤 넓더군요.
신령수 있는 곳부터
나리 분지 초입에 자리 잡은 마을까지
콧노래를 부르며 하얀 눈길을 삼십 분쯤 걸었을까요?
사람 발자국에 다져진 눈길을 걷는 데도 발이 무릎까지 푸~욱, 푹!
어쩌다가 수녀님 뒤에서 걸어가게 되었는데요, 수녀님 발자국을 보니...
엇? 저기는 눈이 다져진 모양이지? 조금밖에 안 들어가네?
그래서 저도 그 발자국을 그대로 밟아보았죠.
으악~~
쑤~~~ 우~~~ 욱!
허벅다리까지 들어가잖앗?
흑흑...
하늘이시여,
수녀님은 발목도 안 들어가게 하시더니만, 저에게는 왜 이런 시련을 주시나이까...
발을 억지로 뽑을 때 밀려오는 이 비애, 이 슬픔이여... 다요트, 다요트를!! ㅠㅠ
2003. 1. 13. 오후 2시 20분
신령수 물에 빠진
축축한 발을 끌고 30분쯤 걸어 나오니 마을이 나타나네요.
양지바른 길목에 주저앉아 준비해 간 휴지로 젖은 신발의 습기를 뽑아내고 양말을 갈아 신었지요.
그 사이에 세 분은 먼저 하산!
나리분지 마을. 2003. 1. 13.
나리분지 마을에서 바라본 성인봉. 2003. 1. 13.
울릉 나그네, 짜가 김삿갓은 또다시 대자연의 메시지를 조용히 들어봅니다...
괴테가 말했다던가요?
자연이야말로 가장 위대한 책이라고.
이 책의 페이지마다 쓰여 있는 모든 글귀에서 우리는 가장 심오한 소식을 얻을 수 있다고...
(상) 나리분지에서 바라본 성인봉 능선 (하) 나리분지에서 파노라마 기능으로 찍은 성인봉. 2022. 10.22.
2003. 1. 13. 오후 4시
천부로 내려오는 길은 제법 길더군요.
천천히, 느그작느그작, 그러나 부지런히 조금씩 발길을 옮기다 보니
하하, 어느새 천부의 초입이군요?
잠시 길가에 주저앉아 위스키 한 잔으로 오늘을 되새기며 마무리 세리모니!
이크, 택시가 들어오는군요?
길가로 비켜
앉으려
는데...
교수님 아이싱교?
끼익, 차가 멈춰 서며 문득 들려오는 낯익은 목소리!
엇
? 이게 누구야? 고덕진 어르신 콤비인 배 기사님 아냐?
(엊그제 같이 한 잔 했었죠. ^^)
안을 들여다보니...
하하하!
아까 성인봉을 서둘러 올라갔다가 총알 같이 내려갔던 용감무쌍한 경주 김 선생님 일가가 타고 있군용?
퍼뜩 나리분지 다녀올팅께 어데 가지 말고 버스 정류장에 고대로 안자 계시소!
돌아갈 때 같이 가이십더!
이 길로 쪼매만 더 내려가믄 해변에 공중벤소 있는 데가 정류장 아임니꺼.
딴 차 타믄 안 됩니데이!
콧잔등이 시큰거린다. 고맙고 정겨운 울릉도 인심...
배 기사님이 기다리라고 했던 천부 버스 정류장. 2022. 10. 21.
저녁!
들어가자마자 어르신이 복분자 술을 들고 오시네요?
하하! 아니 그래, 이건 기적적이여!
으떠케 그러케 눈이 많은 나리 분지로 내려오나 글씨?
참, 선상님 대단허네, 대단혀...
(에구, 챙피.. ^^;;)
난 또 것두 모르구 네 시가 되도록 안 돌아오길래 119에 신고할려고 했다니께?
은갱이두 선상님처럼 겨울엔 이렇게 다니지 못했어.
허허, 선상님이 처음여, 처음!
죄송스럽고 황송하고 감사하고 고마운 마음에 주고받는 복분자 술.
그 아름다운 술과 인정에 취해 울릉도의 밤은 깊어만 가고...
저동의 밤. 2022. 10. 18. 수평선에 오징어잡이 배의 불빛이 보인다.
[
응원의 댓글
]
섬백리향 : 봅슬레이 타고 싶다 (2003-01-19 22:31:23)
선생님 글을 읽고 있자니,
다시 울릉도 들어가서 성인봉에서 봅슬레이를 함 하고 올까..
그런 생각이 잠시 머리를 스쳤습니다
운동화에 아이젠하나만 박으면 다 될 것 같은데..
으아~~ 부럽다.. 선생님.. 부러워여..
*********************
크리슈나 ( 2003-01-20 13:09:21 )
자유!!! 그리고 자유인!!!
그러나 늘 끈질기게 발목을 잡은 채 놓을 줄 모르는 현실~~~
지난가을에도 몇몇 지인과 네팔에 가기로 모든 준비를 마쳤으나
어김없이 나타나는 그 피치 못할 사정!
이제 선생님의 기행문으로 목이나 축이려 합니다...
[ 각주 ]
동계올림픽 슬라이딩 종목에는 봅슬레이, 루지, 스켈레톤의 3종목이 있다.
봅슬레이는 여러 명이 썰매를 타는 종목.
루지는 누워서 썰매를 타는 종목.
스켈레톤은 엎드려서 썰매를 타는 종목.
(좌) 봅슬레이 (중) 루지 (우) 스켈레톤
그러므로
필자가 탄 미끄럼은, 굳이 따지자면, 봅슬레이가 아니라
루지
와 비슷한 형태겠다.
봅슬레이가 제일 많이 알려져서 무심코 잘못 표기한 것이다.
^^;;
루지로 정정할까 했지만, 발음할 때 2글자보다는 4글자가 더 리듬감이 있어서 고치지 않았다.
세 종목 중 루지의 속도가 제일 빠르다고 한다.
루지는 두 다리 사이에 쿠펜 kufen이라는 방향 조정 장치가 있다.
필자처럼 성인봉에서 미끄럼을 타고 내려올 때는 쿠펜이 없으므로 아래와 같은 요령이 필요하다.
(1) 방향을
조절할
때:
한쪽의
팔과
다리를
눈속에
넣어서
그
저항으로 방향을 조절한다.
(2) 멈출 때: 두 팔과 두 다리를 모두 눈속에 집어 넣어서 그때 발생하는 저항력으로 멈춘다.
적설량이 최소 2m 이상인 경우에만 타야 한다.
[ 표지 사진 ]
◎ 나리 분지. 오른쪽 억새 투막집이 눈에 덮혀서 거의 보이지 않을 지경이다. 2003. 1.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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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릉도, 방랑의 추억
06
제5장. 일요일엔 참으세요
07
제6장. 아, 성인봉!
08
제7장. 봅슬레이를 아시나요
09
제8장. 파도, 그리고 인터넷
10
제9장. 무지개의 장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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