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부] 2003. 1. 14.
함박눈이 펑펑 쏟아지는군요.
바다에는 폭풍주의보도 내렸답니다.
마치 어제 힘든 성인봉 등산을 마쳤으니,
오늘 하루는 푹 쉬라는 하늘의 뜻인 듯. (꿈보다 해몽이! ^^)
근데 며칠 동안 매일 부지런히 걸어 다녔더니
하루 쉴 생각을 하니깐 온몸이 근질근질하네요?
움~~~ 오늘 하루를 알차게 보낼 무슨 좋은 프로그램이 없을까...
때마침 창 밖에 머얼리 파도에 가려 나타났다간 사라지는 작은 어선 모습이 보이네요.
어르신, 오늘 같은 날도 출어를 하는 모양이지요?
출어는 무슨~, 저동 항으로 피항을 하는 기여!
저 어선이 지금 파도 땜시 올라갔다가 내려갔다가 하잠시?
여게서 보면 별 게 아닌 거 같지만 배를 타고 있으면 저 파도가 참 엄청나지~~
파도? 그래 맞아. 파도 구경을 가보자!
집채만 한 파도! 이런 때가 아니면 언제 또 볼 수 있겠어?
그리하여 또다시 신발 끈을 질끈 동여매고, 근방에서 가장 파도가 많이 친다는 내수전으로 출발!
내수전까지는 민박집에서 걸어서 불과 십 분 거리.
으~~ 근데 어제 그제 봄날같이 따사롭던 날씨와는 영 딴판이구먼요?
쌔~~ 애~~ 앵!
살을 에이는 모진 바람이 정신을 버쩍 나게 만드네요!
읏~~~ 추버라...
내수전으로 가는 해안도로의 한 모퉁이를 돌아서니,
이야~~ 정말 장관, 또 장관!
눈보라 치는 푸른 수평선 끝에서 새하얀 포말을 머리에 얹은 채 줄지어 달려오는
파도, 그리고 또 새로운 파도, 파도의 장쾌한 선율線律!
문득 소동파蘇東坡의 시 한 구절이 떠오릅니다.
바다처럼 드넓은 장강의 적벽에 부딪치는 파도를 보며 노래한 구절입니다.
큰 강, 동쪽으로 흘러간다.
천고의 풍운아들, 파도에 쓸려간다.
(중략)
어지러운 바위, 무너지는 구름.
거센 파도 들이치니 천 겹 만 겹 눈보라가 일어나네.
그림 같은 강산이여! 사라져 버린 영웅호걸이여!
大江東去, 浪淘盡, 千古風流人物。 (중략)
亂石崩雲, 驚濤拍岸, 捲起千堆雪。江山如畫, 一時多少豪杰 !
- 소동파, <염노교(큰 강 흘러간다) 念奴嬌(大江東去)>에서.
저는 특히 '亂石崩雲, 驚濤拍岸, 捲起千堆雪' 이 부분에 묘사된 작가의 호방한 스케일을 참 좋아합니다.
'난석붕운 亂石崩雲'은 '뭉게구름처럼 생긴 강가의 바위들'을 묘사한 말이구요.
'경도박안 驚濤拍岸'은 '놀란 파도가 강가의 그 바위들에 부딪치는 장면'입니다.
'권기천퇴설 捲起千堆雪'은 '회오리바람이 일어나 천 겹으로 쌓인 설원의 눈을 휘말아 올리는 광경'이지요.
강가에 파도가 부딪치는 그 장면을 바라보며 동파는 생각합니다.
역사 속에 명멸明滅했던 영웅호걸을 떠올리며 시간의 의미를 곰곰 생각하지요.
그런데 우리나라 어떤 시인은 해안에 부딪치는 파도를 보면서 '양치질'에 비유했다지요?
그 시인은 잔잔한 다도해의 파도만 보았던 것 아닐까요?
울릉도의 이 파도를 보았더라면 훨씬 더 호방한 묘사로 우리의 마음을 웅장하게 해 주었으리라 믿습니다.
아무튼 동파가 묘사한 그 구절보다도 더 장관입니다.
망망대해의 한겨울, 검푸른 성난 파도...
해안가 뭉게구름 바위에 부딪치자 시베리아 설원雪原에 일어나는 회오리바람인 듯,
하늘 높이 솟구쳐 눈보라와 물보라를 동시에 뿌리네요!
촤알~ 싹,
쿵!
쏴아~~~
파도가 빚어주는 대자연의 교향악을 귀 기울여 듣노라니 뭉클 샘솟는 정체 모를 그리움.
물보라처럼 솟아나 눈보라처럼 휘날리는 이 그리움의 정체는 또 무엇일까요.
파도야 어쩌란 말이냐
파도야 어쩌란 말이냐
임은 뭍같이 까딱 않는데
파도야 어쩌란 말이냐
날 어쩌란 말이냐
- 청마 유치환, <그리움 2>
쏟아지는 하얀 눈이 점점이 박혀있는 짙푸른 겨울바다에
알지 못할 누구엔가 그리움의 편지를 띄워봅니다.
민박집 고덕진 어르신의 분부받자와,
저동에는 한 군데밖에 없다는 그 PC방에서,
한 번도 만나본 적이 없는 섬백리향 이 은경 님의 사이트에 들어가 글을 올리고 왔습니다.
<프롤로그 - 20년 전의 편지> 참조.
아휴~ 그 어쭙잖은 글 한 편 쓰는데 왜 이렇게 오랜 시간이 걸린단 말일까요.
네 시간 걸렸습니다. 제 빈약한 글빨에... 난 그만~ 울~고 싶어라...
근데요, 빨간 고기(메바리) 몇 마리 사들고 (빈손으로 들어오긴 좀 그렇잖겠어요?^^;;)
PC방에서 돌아오니, 고덕진 어르신 말씀:
그래, 슨상님, 은갱이한텐 우찌 했수?
하하, 어르신 분부대로 이제 막 글 올리고 왔죠. 보고 말씀 드리자마자,
그으~래? 가만있어봐, 그람 우리 한 잔 안 할 수 없지?
얼굴을 활짝 펴시며 대낮부터 복분자 술병을 들고 오시네요!
하하, 어르신께서 몹시 신이 나신 모양이네요? 다소 상기된 표정마저 보이시누만요?
히야, 이렇게 좋아하실 줄이야! 그럴 줄 알았으면 진작 글 올리는 건데... 저도 덩달아 신이 났지요!
자, 이거 한 잔 하고 나서 그거 프린트 좀 하고 오자구.
어르신, 보시고 싶으세요? 그럼 지금 당장 저랑 같이 PC방에 가시죠, 뭐. 술은 돌아와서 하시죠.
그래? 그람 그럴까?
그 당장에 신발을 신으시네요! 하하하.
근데, PC방에 가보니 프린터 장치가 없네요? 주로 게임 용으로 사용한다나 어쩐다나...
PC방이 아니라 알고 보니 게임방이었네요. 쩝... ^^;;
아무튼... 그러자 어르신, 조금도 망설임 없이 택시를 타고 군청 소재지가 있는 도동으로 향하시는군요?
저동에서 도동까지는 택시로 이천 원!
평소엔 돈 함부로 쓰지 말라며 우리에게도 택시 타지 말라고 극력 권하시던 그 어르신께서
이렇게 서슴없이 택시를 타실 줄이야!
크~~ 이너넷의 위대함이여~~!!!
결국 우리는 여기저기 돌아다니다가 도동 우체국에 가서야 프린트를 할 수 있었답니다.
인터넷에 무척이나 신기해하시는 어르신!
그 어르신 소개를 잠깐 할까요?
바다라곤 구경도 할 수 없는 내륙, 충북 음성이 고향이신 고덕진 어르신.
사업 실패로 처가인 울릉도에 와서 일흔 연세가 될 때까지 23년 동안 어부 생활을 하셨다는 어르신.
감자와 옥수수로 끼니를 때우면서도 근면 성실한 생활로 저축왕 표창도 받으시고,
모범 어부로 저동 마을 사람들에게 감사패도 받으시고,
그래서 마침내 신문에 대서특필 되셨다는 고 덕진 어르신.
그래서 끝내 자제 분들을 훌륭하게 키우셨다는 어르신.
그 어르신 육성을 또 한 번 들어볼까요?
남들은 예순 살만 되믄 배를 안 타. 힘이 딸리니께.
근디 나는 그 어부생활을 일흔까지 했어!
배 안 타니 뭍에서는 못 살겠고, 여게서는 심심허고, 해서 민박을 하는 거여.
겨울 울릉도를 찾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답니다.
그래서 대부분 민박집은 겨울에는 파리 날리고 여름 한 철 보고 지낸다고 하네요.
그런데 제가 머무르는 아흐레 기간 동안 어르신의 이 허름한 고바우 민박집은 언제나 미어터졌답니다.
어르신의 그 도타운 인정이 입에서 입으로 입 소문으로 이어지다가,
인터넷에 오르고, 또 다른 사이트에 오르내리다가,
섬백리향 이은경 님의 사이트에 본격적으로(?) 주인공이 되어 등장하시게 된 거래요.
그러다가 오늘 저와 함께 처음으로 컴퓨터 앞에 마주 앉아
제가 어르신을 소개하는 글과 사진을 직접 보시게 된 거죠.
어찌나 기뻐하시는지요!
어찌나 행복해하시는지요!
저도 무척이나 기쁘고 행복했답니다...
그리하여 그날 저녁에도 또다시 복분자 파티!
어르신의 명콤비, 울릉도의 명 기사, 배학식 기사 님도 전화로 call!
배가 못 떠서 아직 돌아가지 못하고 있는 옆방의 용감한 경주 김 선생님 부부도 어서 오시어요~~!
자, 그러지 말고 어여 쭉 드셔~
연신 그 귀한 복분자술을 권하시는 어르신의 얼굴에 피어나는 행복한 웃음!
따르릉~~
엇, 제가 이너넷에 올린 글을 보고 머얼리 뭍에서 섬백리향 이은경 님이 전화를 걸어왔네요? 하하하!
백리향님도 얼렁 이리 오셔서 이 맛갈진 복분자 술 한 잔 하시지요?
복분자와 함께,
피어나는 인정과 함께,
훈훈하게 익어 가는 울릉도의 밤이올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