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섬에 착공 57년 만에 드디어 일주도로가 완공되고, 비행장을 건설 중이라는 뉴스를 들었습니다.
내년(2023년)에는 대한민국 제4회 ‘섬의 날’을 그 섬에서 개최한다고도 한다네요.
1963년 울릉도 일주도로 착공. 2001년 [내수↔저동/남양/천부/섬목]구간 완공. 2019년 [섬목↔내수(녹색 점선)] 완공.
섬의 날? 그런 게 있었나? 찾아보니 8월 8일이군요. 2018년 문재인 정권 당시에, 숫자 '8'이 무한(∞)한 섬의 가능성을 상징한다는 의미에서 그날로 제정했답니다. 우리 대한민국은 영토의 면적은 작지만, 세계 10대 섬 보유국 중의 하나죠. 자그마치 3,300개나 된다네요. 그중에 유인도는 494개.(2007년 통계) 매년 줄어들고 있답니다. 인류의 지속 가능성 위기는 대한민국의 섬부터 찾아오고 있다는 이야기. 그래서 섬의 가치와 중요성을 일깨우기 위해 만든 법정기념일이었군요.
제1회 '섬의 날'은... 2019년에 우리나라에서 섬이 제일 많은 동네인 전남 목포시/신안군이 삼학도에서 공동으로 개최했군요. 2020년은 코로나로 열리지 못했고, 2021년에는 경남 통영시에서, 2022년은 전북 군산시에서 개최했다는 뉴스. 2022년 8월 8일? 이런, 바로 얼마 전에 지나갔군요. 미리 알았더라면 가보았을 것을. 고군산열도 일대는 얼마 전 새만금 제방과 연륙교 연도교로 연결되어 아주 쉽게 찾아가 볼 수 있답니다.
노적봉과 삼학도. 2018. 11. 16.
통영 여황산 북장대에서 바라본 통영 시내. 2023. 10. 20.
대장도 정상에서 바라본 고군산열도. 2019. 5. 19.
그런데 내년(2023년)엔 울릉도에서 제4회 섬의 날을 개최한다구요?
갑자기... 심장이 마구 뜁니다. 가슴이 다시 설레기 시작합니다. 그 섬에 또다시 가고 싶습니다.
제 사이트는 스무 번의 성상을 거치는 동안 어디론가 사라져 버렸는지라 한참 동안 자료를 찾아보았습니다.
여기 있군요. 응? 아니, 그런데... 이럴 수가 있나요?
2003년 1월? ㅠㅠ
5, 6년 전 일인 줄 알았는데... 세상에... 벌써 거의 20년 세월이 지나갔네요?
충격이었습니다. 놀란 입을 다물 수가 없었습니다...
그 당시 묵었던 숙소는 고덕진 어르신이 운영하시는 고바우 민박집. 울릉도를 소개하는 ‘섬백리향’이라는 사이트에서 알게 된 곳이었죠. 부모님보다도 더 부모님 같으신 분... 저를 정말 따뜻하게 맞아주셨죠. 울릉도가 자연 사랑 인간 사랑이 넘치는 제 마음속의 유토피아가 될 수 있었던 것은 전적으로 어르신 덕분이었습니다.
몇 번인가 명절이 되면 선물도 보내 드리고 전화 통화도 종종 했습니다. 언젠가 대학교 입시 면접날, 어르신께서 전화를 주셨던 기억이 납니다.
아이고, 슨상님~ 잘 지내고 있쟈? 근디 오널 어떤 냥반이 왔는디, 아니 글씨 슨상님이 인터넷인가 거게 올린 거를 프린트해서 책으로 맹글었네 그랴. 두 권 맹글어서 하나는 날 주고, 또 하나는 자기가 가꼬 댕기면서 슨상님이 걸었던 길을 고대~로 따라서 다니겠다네 그랴. 여기 내 사진도 나왔어~ 하하하, 그것 참...
아직도 귀에 생생한 어르신의 목소리... 그게 언제 일이었을까요? 5, 6년이나 되었을까요? 그러고 보니 그 후로는 통 연락을 못 드렸네요. 어떻게 지내실까. 처음 뵈었을 때 연세가 일흔일곱이셨는데 20년이 지났으니... 혹시? 불길한 생각이 들었지만 곧 머리를 좌우로 흔들었습니다. 아냐 아냐. 그렇게 정정하셨는데. 나보다 훨씬 건강하셨고, 홍길동처럼 방방 날아다니셨잖아... 안색도 늘 발그스레, 온몸에 힘찬 기운이 넘쳐흐르셨잖아...
전화를 걸었습니다. 뚜르르.... 띡...
아... 아예 전화가 걸리지도 않네요. 하긴, 20년 전 전번인데될 리가 없지요. 인터넷을 검색했습니다. 고바우 민박... 아, 여깄다. 지금은 고바우펜션으로 바뀌었군요. 다시 새로운 전번으로 전화를 걸었습니다. 어느 아주머니? 할머니께서 투박한 경상도 사투리로 전화를 받으십니다.
아, 울 시아버지 말씀하시능교? 진즉에 돌아가셨지예. 그게 은제 일인데예.
네에? 뭐라구요??
2022년 10월 17일 (월)
강릉으로 가는 고속버스에는 저 혼자뿐입니다. 이렇게 좋은 호화 리무진 버스에 승객이 저 혼자라뇨. 저 혼자 때문에 시간을 낭비하는 기사님께도 죄송하고, 기후 위기로 인류는 지속 가능성마저 위험에 처해 있다는데 저 혼자 때문에 이렇게 휘발유를 낭비하다니... 나라와 인류와 지구에게도 죄를 짓고 있네요. 이래저래 속상하고 가슴이 아픕니다. 여행을 떠나면서 이렇게 가슴이 아프고 마음이 무거운 적은 처음인 것 같습니다.
대체 저는 그동안 무엇을 하고 있었던 걸까요?
무슨 짓을 하느라 어르신이 타계하신 줄도 모르고 세월을 보냈던 걸까요?
한숨을 쉬며 20년 세월을 더듬어 보았습니다.
아, 그렇네요. 그 세월의 전반부에는 동티베트 땅과 '샹그리라 Shangri―La'에 꽂혀서 일 년이면 3, 4개월을 그 땅에서 방랑했었군요. ( '샹그리라'에 대해 궁금하신 분은 <제5장. 일요일엔 참으세요> 참고해 주세요.) 후반부 기간에는 학교에서 보직을 맡아 하루하루 정신없이 보냈던 것 같습니다.
그래도 그렇지, 어떻게 모를 수가 있었을까요. 저 자신이 용서가 되지 않습니다. 아버지의 임종도 못 지켜드리고 뒤늦게 귀향하는 탕아의 심정이 이러할까요... 어르신은 어디에 묻히셨을까요. 그렇게 사랑하시던 울릉도의 동쪽 바다가 내려다보이는 저동 뒷산 어드멘가 따스한 양지녁에서 주무시고 계실까요? 도착하는 대로 산소를 찾아뵙고 복분자 대신 소주라도 한 잔 올려드리며 어르신의 그 바다를 하염없이 바라보고 싶습니다.
강릉에 도착하니 저녁입니다. 시내버스로 갈아타고 호젓한 해변 마을에 내렸습니다. 멀리 백두대간 너머로는 검붉은 노을이 떨어지는데, 나 홀로 걷는 텅 빈 들녘에는 추적추적 가을 빗방울이 떨어집니다. 점점 굵어지는 빗방울... 하늘도 저를 꾸짖고 있네요.
[여행 팁]
▶ 20년 전에는 울릉도를 가려면 무조건 포항으로 가야 했다. 그곳에서 하루 묵고 아침 일찍 배를 타는 방식. 2022년 10월 현재에는 5가지 방법이 있다. 미리 예약해야 한다.
(1) 뉴씨다오펄 호: 포항영일만 밤 출발, 사동 아침 도착. 크루즈선. 자동차 탑재 가능. 6시간 30분 소요.
(2) 썬라이즈 호: 포항 출발, 도동 도착. 쾌속선. 3시간 소요.
(3) 썬플라워 호: 후포 출발, 사동 도착. 쾌속선. 4시간 30분 소요.
(4) 씨스타 1호: 묵호 출발, 도동 도착. 쾌속선. 2시간 40분 소요.
(5) 씨스타 5호: 강릉 아침 출발, 저동 낮 도착. 쾌속선. 3시간 소요.
필자는 씨스타 5호를 탔다. 강릉에서 하루 자고 아침에 타야 하는데, 기상 사정으로 배가 오후 2시에 출발한다는 연락을 전날 밤에 받았다. 그럴 줄 알았더라면 오늘 오전에 출발했어도 됐을 텐데... 하지만 어쩔 수 없다. 울릉도를 가려면 뱃시간은 수시로 변경될 것을 각오해야 한다. 순례자의 마음이 필요하다.
▶ 강릉 여객선 터미널은 안목 커피거리 끝의 드넓은 주차장 왼쪽 한 구석에 있다. 정기 여객선이래야 울릉도를 왕복하는 씨스타 5호 하나뿐이어서 그런지, 방파제 밑 후미진 곳에 자그맣게 자리 잡고 있어서 얼른 눈에 띄지 않는다. 방파제에서 터미널로 내려가는 길은 없다. 행여 착각해서 방파제 위로 가면 먼 거리를 다시 돌아와야 하니 유의해야 한다.
점선이 강릉 여객선 터미널. 미리 위치를 확인하지 않으면 많이 헤맬 수 있다.
2022년 10월 18일
씨스타 5호에 탑승했습니다. 20년 전에 탔던 선플라워호는 배 후미에 바깥공기와 통하는 흡연실 공간이라도 있었지만 이 배는 정말로 완전히 밀폐된 고속여객선이군요. 육안으로 수평선을 보겠다는 마음 따위는 아예 포기해야 합니다. 그래도 창가에 앉아 닦이지 않는 창문을 닦아보며 하릴없이 수평선을 찾아봅니다.
아무 생각 없이 수평선을 바라보았습니다. 그렇게 물멍을 때린 시간이 얼마나 지나갔는지 모르겠네요. 수평선을 본 거니까 '수멍'이라고 해야 되나요? 승객 여러분, 이제 곧 울릉도 저동항에 도착합니다... 장내 방송이 흘러나와도 웬일인지 제 시선은 수평선에서 떨어질 줄 모르는군요... 그때였습니다.
어, 저게 뭐지?
뿌우연 창문 밖으로 보이는 그것은... 무지개였습니다. 20년 전, 울릉도를 떠날 때 저를 전송해 준 바로 그 무지개입니다. 그 무지개가 저를 마중 나왔군요. 가슴이 쿵쿵 뛰었습니다. 눈물이 나올 것 같습니다. 이제야 돌아온 탕아를 그래도 반갑게 맞이해 주시는 고덕진 어르신의 함박웃음이 보입니다. 어르신의 따스한 목소리가 귓가에 생생하게 들려옵니다.
아이구 슨상님, 오셨서? 그랴, 잘 왔어. 잘 한기여! 아이, 그래 을매나 장해?
저동 항구입니다. 20년 전에는 육지를 오가는 배는 도동에만 있었는데 지금은 이렇게 어르신이 계신 저동으로 바로 들어올 수 있군요. 가슴이 마구 뜁니다. 울릉도는 어떻게 변했을까요? 고바우민박은 또 어떻게 바뀌었을까요? 어르신은 어디에서 쉬고 계실까요? 배에서 내리자마자 고바우민박을 찾습니다. 아, 저기 있군요. 단번에 찾았습니다. 단체 사진 속에서도 사랑하는 님은 금방 알아보듯이.
무지개의 응원을 받으니 마음이 조금은 가벼워집니다. 20년 전처럼 30kg 배낭을 메었더라면 가뿐했을 텐데, 이제는 그럴 체력이 안 되니 질질 캐리어를 끌고서 나름 씩씩하게(?) 고바우민박을 찾아갑니다.
(좌) 2003년의 고바우민박 (우) 2022년의 고바우펜션
주인아주머니께서는 어르신의 며느님이었습니다. 20년 전, 어르신과 함께 촛대바위에서 일출을 보고 오는 길에 어판장에서 오징어 다섯 마리를 주셨던 그분입니다. (참고 : <제2장. 일출에서 일몰까지>
산소예? 울릉도엔 그런 거 업심더. 육지에 모셨지예.
제일 먼저 어르신의 묘를 어디에 쓰셨는지 여쭤보았습니다. 그런데... 아, 이럴 수가. 울릉도에선 묘지를 쓸 수 없어서 육지에 모셨다는군요. 맥이 탁~ 풀렸습니다. 온몸에 힘이 빠지는군요. 저는 이제 어디를 가야 하나요...
우리는 흔히 사진을 찍어서 '기념'을 합니다. 자신의 기억을 사진에 의지하려는 것이겠죠. 그런데 사진은 오랜 세월이 지나면 언제 어디서 찍은 것인지조차 기억하지 못하는 경우가 너무나 많더군요. 저는 언제부터인가 '소리'로 '기념'을 합니다. 그때의 그 분위기, 그 느낌, 그 소리를 기억하려고 노력합니다. 그렇게 해서 한 번 뇌리에 박힌 소리는 시공을 넘나들며 시시때때로 귓가에 맴돌더군요.
돌아가신 분의 목소리가 제일 잘 들리는 곳은 고인의 무덤이라고 하더군요. 그래서 부모님 산소를 찾아가면 못난 이 자식과 함께 기뻐하고 슬퍼하시던 수십 년간 당신들의 살아생전 그 모든 목소리가 들립니다. 처음에는 아주 천천히, 이따금, 하나씩, 가물가물 들려오다가, 마침내 수많은 소리들이 꼬리를 무는 기억의 주마등과 함께 천둥처럼 귓가에 들려옵니다. ( 참고 <당신이 '기념'하는 방법은>)
어르신의 목소리를 듣고 싶었습니다. 당신의 무덤 앞에서 그 낭창한 목소리를 들으며 술 한 잔 올리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육지에 모셨다니... 그럼 나는 오늘밤 어디를 찾아가야 그 따스한 목소리를 들을 수 있는 걸까요?
저동의 밤을 헤치고 뒷산 어구에 올라가 보았습니다. 여기 어디쯤 어르신의 묘가 있을 줄 알았는데... 어둠만큼이나 마음도 어둡습니다. 아, 촛대바위가 보이는군요. 어르신의 재촉을 받고 달음박질로 달려가 장엄한일출의 순간을 목격한 바로 그곳입니다. 지금은 밤에도 조명 시설을 해놓았으니 저기를 가봐야겠군요.
바로 여기입니다.
장엄한 불기둥이 저 아득한 수평선에서 불끈 솟구쳐 흐르는 그 순간에 말씀하시던,
고덕진 어르신의 그 목소리가 쟁쟁 울려옵니다.
증말 잘 오셨어, 하, 이거 참 좋구먼!
일 년 삼백육십오일 중에 일출 볼 수 있는 날은 오십사일밖에 안 뒤여.
근데 오늘같이 좋은 날씨가 없구먼? 슨상님 금년에 운수 대통하신 기여!
아, 이거 제대로 보고 간 사람이 거의 없구먼?
아, 근데 해돋이 보고 간 사람 중에 잘 되지 않은 사람이 또 없구먼?
슨상님 소원도 꼭 이뤄지실 거여~~
내가 고향이 충청돈디, 울릉도만큼 살기 좋은 데가 읍서!
그래서 여그서 삼십 년째 사는 거여! 아, 물 좋지, 흙 좋지, 공기 좋지, 도둑 없지!
여그서 하루라도 더 있으믄 하루라도 더 이익이여!
어르신, 편히 쉬세요...
[여행 팁]
▶ 울릉도는 물가가 비싸다. 식사 한 끼가 보통 18,000원이다.(2022년 10월 기준) 웬만한 식당은 혼자 가면 퇴짜를 놓는다. 2인분부터 시작이다. 혼자서 여행하려면 자구책이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