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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오생 Nov 22. 2023

22. 당신이 '기념'하는 방법은

[ 제6부. 소오생의 耳順 ]

※ 이 글은 앞선 글 〈연지에 띄워보는 그리움의 소리 편지〉의 다섯 번째 부분입니다.




공자가 말한 '이순耳順'의 핵심은 '소리'에 있다. 앞선 글 참조. 

그런데 '소리'란 어떤 것인가? 어떤 특성을 지니고 있는가? 여태까지 살펴본 내용을 정리해 보자.


( 1 ) 소리는 '내면성'을 지니고 있다. 모든 것의 본질이다.

( 2 ) 소리는 '결합성'을 지니고 있다. 감정을 전달하는 최적의 수단이다.

( 3 ) 소리에는 귀에 들리는 '현상의 소리'와, 귀에 들리지 않는 '내면의 소리'가 있다.

( 4 ) 소리에는 '영성靈性'이 있다. 모든 종교는 소리의 영적 특성을 적극 활용하고 있다. 기독교의 소리가 보다 현상적이라면 불교의 소리는 깊은 곳에서 울리고 있는 내면의 소리다. 석가모니는 임종 시에 내면의 소리가 잘 들리는 4곳의 장소를 기념 터로 알려주었다. 


여기서 '기념'이란 말은 무슨 뜻일까? 생각해 보았다. 

아래 글은 필자의 생각을 정리하여 편지 형식으로 작성해 본 것이다.



연지에 띄워보는 그리움의 소리 편지 ( 5 )



선배님. 석가모니는 우리에게 네 곳의 소리의 기념 터를 일러주었습니다. 문득 의문이 생겼습니다. ‘기념記念’이란 대체 무슨 뜻일까…, 왜 하필이면 그 네 곳을 기념 터로 삼았을까…, 그런 곳에 가면 더 기억이 잘 나고 더 생각이 잘 난다는 뜻일 텐데, 그렇다면 인간의 기억은 문자가 아닌 소리에 의존한다는 것일까…, 궁금증이 꼬리에 꼬리를 물었습니다.



내면의 소리로 바라보는 기념의 장소 


선배님. 어떤 사람들은 기억하는 일을 오로지 문자의 기록에 의존하려 합니다. 수업시간에 선생님이 하는 이야기를 정신없이 그대로 받아쓰는 학생들이 어디 한 두 명입니까? 하지만 그런 사람들일수록 시험만 끝나면 모든 것을 깡그리 다 잊어버리지요. 그들에게 무슨 학풍의 형성을, 얼마나 기대할 수 있겠습니까!


자신의 기억을 사진에 의지하려는 사람들도 많이 있습니다. 아름다운 대자연의 절경이나 유서 깊은 문화유적지를 찾아가서, 그저 정신없이 사진 몇 장 찍고서는 다시 관광버스에 올라 총총히 길을 떠나버리는 사람들이 어디 한 두 명입니까? 그러나 그런 사람들일수록 세월이 지나면 언제 어디서 찍은 사진인지조차 기억하지 못하는 경우가 너무나 많지요.


선배님. 기억이란 소리에 의존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현상의 소리가 아닌 내면의 소리 말입니다. 한자의 ‘염念’이란 글자의 의미를 곰곰 생각하다 보면 더욱 그러한 확신을 가지게 됩니다. 이 글자가 무슨 뜻인지 아십니까? 전에는 막연하게 ‘생각하다’는 뜻 정도로만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소리’에 대해 관심을 가지다 보니 이 글자와 ‘소리’의 상관관계에 저절로 주목하게 되더군요.




‘염念’이란 글자를 사용하는 단어는 대단히 많지요. 기념記念, 상념想念, 전념專念, 염불念佛 등등, 우리와도 무척 친숙한 단어들입니다. 한번 더 생각해 보니 그 모두가 ‘소리’와 너무나도 밀접한 관계가 있더군요.


다소 엉뚱한 것 같지만, 우선 ‘공부’ 이야기부터 해볼까요? 중국어로 ‘공부하다’는 ‘念書[niànshū]’입니다. 그런데 이 단어에는 또 ‘소리 내어 책을 읽다’는 의미도 있지 않습니까? 그냥 눈으로 책을 읽는 행위는 ‘看書’나 ‘讀書’라고 하지, ‘念書’라고 하지는 않지요. 이것은 무슨 말일까요? ‘공부’란 다름 아닌 ‘소리 내어 책을 읽는 행위’라는 뜻 아니겠습니까? 


공부는 소리로 하는 것이었습니다. 책을 읽으며 나의 내면세계 안에 그 책의 작가를 모셔와 서로 대화를 주고받는 ‘소리의 행위’를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염念’은 바로 곧 ‘내면의 소리’였습니다. ‘내면의 소리를 생각하며 정신을 집중하는 행위’를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예컨대 ‘상념想念’이란 단어는 ‘내면의 소리를 생각하다’는 말이지요. 그러므로 ‘선배님을 생각하며 상념에 빠진다’는 말은, 선배님과의 만남의 시간을 되새기며 주마등처럼 스쳐 가는 그때의 그 목소리를 다시금 뇌리에 떠올려 복원해 본다는 뜻이 되겠지요.


‘전념專念’이란 말은 또 무슨 뜻이겠습니까? 정신을 오로지 하나로 집중하여 사물의 내면에 흐르는 소리를 마음으로 바라본다는 뜻이겠지요. 그러므로 제가 ‘선배님이 당부한 일에 전념한다’는 말은, 선배님의 당부대로 외로운 현대인의 가슴속에 흐르는 내면의 소리를 듣고자 정신을 하나로 집중하여 이렇듯 소리의 글을 쓰고자 하는 일을 뜻하는 말이 되겠지요.


‘염불念佛’의 의미도 생각해보지 않을 수 없네요. 염불…, 스님들이 목탁을 두드리며 불경을 암송하는 행위입니다. 그러나 다른 차원에서 그 의미를 생각할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불佛’이란 깨달은 자, ‘붓다’의 음역音譯입니다. 결국 ‘깨달음’이란 뜻이지요. 무엇에 대한 깨달음일까요? 들은 것은 부족하지만, 저는 삶과 우주의 이치에 대한 ‘깨달음’이라고 배웠습니다. 그 깨달음을 얻기 위해 ‘염念’, 즉 ‘소리’를 활용하는 것이 ‘염불’의 의미인 셈입니다.


그렇다면 ‘소리’가 없으면 삶의 이치도 깨닫기 어렵다는 뜻이 되지 않겠습니까? 그렇다면 삶과 우주의 원리를 깨치기 위해 소리로 정신을 집중하는 모든 행위를 다 ‘염불’이라고 할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목탁을 두드리며 소리 내어 불경을 읽는 것도 물론 그 방법 중의 하나겠지요. 그러므로 삶이란 무엇인가, 너무도 궁금하고 너무도 가슴이 아파서, 피를 토하듯 언제나 소리를 생각하고 소리의 글을 쓰고자 한다면 그것 역시 염불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요? 선배님, 제 생각이 터무니없는 억지일까요?


인간의 기억은 이렇듯 청각효과에 크게 의존합니다. 그러나 평범한 인간들의 정신 집중 능력에는 어쩔 수 없는 한계가 있지 않겠습니까? 기억의 보존을 위해서는 어쩔 수 없이 일정 정도 시각적 요소에 도움을 요청할 수밖에 없겠지요. 그러나 그 시각적 요소는 인간의 청각 효과를 최대화시키고, 시각 효과는 최소화할 수 있는 그런 성격이어야 할 것입니다. 자칫 청각 효과는 전혀 없고 시각 효과만 있는 것, 그리하여 인간을 미망과 아상我相에 빠뜨리는 그런 성격이어서는 절대 안 되겠지요.


그렇다면 인간의 청각 효과를 최대한으로 도와줄 수 있는 시각적 요소는 무엇일까요? 석가모니가 추천한 것은 문자도 아니고 그림도 아니었습니다. 장소였지요. 자연환경이었습니다. 네 곳의 기념 터였습니다.




기념記念’이란 무엇일까요? ‘기념’은 ‘기억할 기記’, ‘내면의 소리 념念’! 내면의 소리를 기억하는 것입니다. 정신을 집중하여 사물의 내면에 흐르는 소리를 마음으로 듣고 기억하는 것, 그것이 ‘기념’의 뜻입니다.


우리는 흔히 글로 메모하고, 사진을 찍고, 물건을 주고받아 기념을 하지요. 그러나 그런 기념은 참된 기념이 아닙니다. 자신의 온 정신을 집중하여 그때의 그 소리와 그 분위기와 그 느낌을 기억하기가 귀찮아서, 시각적인 것에 자신의 기억을 대신 맡겨두는 나태한 행위에 불과합니다. ‘기념’이란 내면의 소리를 기억하고, 영혼을 기억하는 일이었습니다. 그렇게 기억해 둔 소리와 영혼을 어찌 잊을 수 있겠습니까? 그렇게 기억해 둔 선배님의 목소리와 영혼을 어찌 잊을 수 있겠습니까?


선배님. 저는 그 네 곳의 기념 터가 석가모니와 같은 위대한 성현에게만 해당되는 특별한 성격의 땅이 결코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어리석은 우리 모든 인간들에게도 공통적으로 적용되는 곳, 언제나 귀 기울이면 그립고 따사로운 목소리가 마음으로 들려오는 추억의 장소라고 생각합니다.


우리들이 태어나고 자란 곳, 어머니의 품속과 같은 땅, 고향! 사람답게 사는 이치를 일깨우고 가르쳐 준 그리운 학창 시절, 우리들의 정든 모교母校! 우리들의 꿈을 실현해 주고 내 존재의 가치를 확인할 수 있는 곳, 직장! 그리고 우리들의 육체가 묻혀 편히 쉬는 곳, 나의 무덤! 그렇게 해석할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고향을 찾아가면 어린 시절 활기차게 뛰어놀던 나의 소리가 들려오고 어머니의 따스한 목소리가 가슴에 스며듭니다…. 모교를 찾아가면 꿈 많던 학창 시절, 존경하는 선생님의 진리로 떠나는 목소리가 지금도 그 강의실 안에서 쟁쟁 울려옵니다…. 사회생활을 처음으로 시작하던 첫 직장의 그 장소를 찾아가면, 꿈과 희망을 찾아 씩씩하게 행진하는 나의 기운찬 맥박 소리가 다시금 온몸을 뒤흔듭니다….


그리고 부모님 산소를 찾아가면, 못난 이 자식과 함께 기뻐하고 슬퍼하시던 수십 년간 당신들의 살아생전 그 모든 목소리가 들립니다. 처음에는 아주 천천히, 이따금, 하나씩, 가물가물 들려오다가, 마침내 수많은 소리들이 꼬리를 무는 기억의 주마등과 함께 천둥처럼 귓가에 들려옵니다…. 네 곳의 기념 터 중에서도 소리가 가장 잘 들리는 곳은 아마도 무덤이 아닐까요. 그곳은 시각적인 장소가 아니라 소리를 듣는 청각의 장소였습니다.     



선배님. 불교 이야기를 하고자 하는 것이 아닙니다. 저는 불교를 종교로 믿지는 않으니까요. 소리 이야기를 하고자 할 뿐이며, 소리를 듣고자 할 뿐입니다. 간절한 정성으로 마음의 귀를 열고 현상의 세계에서 들려오는 그 모든 소리를 듣고자 할 뿐입니다. 영혼의 눈을 뜨고 나의 내면에 들어가 선배님의 목소리를 듣고, 또 삼라만상에 흐르는 그 모든 내면의 소리를 듣고자 할 뿐입니다.


그러나 고백하지 않을 수 없군요. 부끄럽게도 저는 아직도 그 내면의 소리가 잘 들리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실망하고 포기할 수는 없겠지요. 이제는 기념의 장소를 찾아가서 그 소리를 들을 것입니다. 그곳을 찾아가서, 눈을 지그시 감고 나의 내면세계로 침잠하여 깊은 곳에서 우러나오는 ‘나’의 목소리를 들어보겠습니다. 선배님과 성현들의 숨소리 맥박 뛰는 소리, 영혼의 소리를 들어보겠습니다. 삶과 사랑과 학문과 대자연과 우주의 목소리를 들어보겠습니다.


그런데 선배님.

저는 어디로 찾아가야 하나요?

어디를 찾아가야 선배님의 그 청아한 목소리를 들을 수 있는 걸까요?

저의 기념 터는 어디입니까?  


― 계속 ―    




[ 표지 사진 ]

◎ 경기도 남양주 사릉 인근의 할아버지 할머니, 아버지 어머니를 모셨던 산소. 

그곳에 가면 못난 자식들과 함께 기뻐하고 슬퍼하셨던 부모님의 살아생전 그 모든 목소리가 다정하게 들려왔다. 그러나... 도저히 납득할 수 없는 해괴한 도로 계획에 수용되어 2009년 11월 21일, 다른 묘지공원으로 이장하게 되었다. 아버님의 고향은 북한에 있는 강원도 이천. 이 산소는 사실상 우리 가족의 고향이나 다름없었으니, 4가지 소리의 기념 터 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두 가지를 한꺼번에 상실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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