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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오생 Nov 21. 2023

21. 소리의 영성과 종교

[ 제6부. 소오생의 耳順 ]

※ 이 글은 앞선 글 〈연지에 띄워보는 그리움의 소리 편지〉의 네 번째 부분입니다. 글의 내용을 부각해 보기 위해 새로운 타이틀을 내걸었습니다.




공자가 말한 '이순耳順'의 핵심은 '소리'에 있다. 앞선 글 참조. 


'소리'란 어떤 것인가? 어떤 특성을 지니고 있는가? 여태까지 살펴본 내용을 정리해 보자. 

( 1 ) 소리는 '내면성'을 지니고 있다. 모든 것의 본질이다. 

( 2 ) 소리는 '결합성'을 지니고 있다. 감정을 전달하는 최적의 수단이다. 

( 3 ) 소리에는 귀에 들리는 '현상의 소리'와, 귀에 들리지 않는 '내면의 소리'가 있다. 


그 외에도 소리에는 '영성靈性'이 있다. 모든 종교는 소리의 그 영적 특성을 적극 활용하고 있다. 아래의 글은 '현상의 소리'와 '내면의 소리', 그리고 '영성'과 '종교(특히 기독교와 불교)'의 함수 관계에 대한 필자의 생각을 편지 형식으로 정리해 본 것이다. 



연지에 띄워보는 그리움의 소리 편지 (4)



선배님. 소리에는 또한 영성靈性이 있는 것 같습니다. 대부분의 종교에서 의식이나 예배를 행할 때 소리가 큰 역할을 담당하고 있는 것도 그 때문이 아닐까요? 하지만 소리에도 현상과 내면의 소리가 있듯, 영성에도 서로 다른 차원의 영성이 있는 것 같습니다. 무당의 푸닥거리 소리에서 들려오는 샤머니즘적인 영성, 그리고 지성과 감성이 결합된 지고지순한 경지의 소리에 내재된 서로 다른 차원의 영성이 존재하는 것 같습니다.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      


기독교는 성령의 종교라고 합니다. 성경을 보면 신앙은 듣는 것에 의한 것이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각주1]

문자는 사람을 죽이고 성령은 사람을 살린다는 말씀도 있습니다. [각주2] 그런데 성령이란 대체 무엇일까요? 저는 소리의 또 다른 모습이라고 생각합니다. 현상의 소리가 아닌, 내면의 소리가 지닌 그 어떤 모습이라고 생각합니다. 


선배님. 성령의 은사가 충만하게 넘친다는 우리나라의 이른바 부흥집회라는 곳에 가본 적이 있으십니까?


“오늘 이 자리에서 여러분, 옛~, 쑤 믿고 구원받으시기 바랍니다~!”


악을 쓰는 듯한 고함소리와 함께 찬송 소리, 박수 소리, 방언하는 소리…, 그곳은 바로 곧 거대한 소리의 집회입니다. 그러나 그곳에 난무하는 소리가 과연 참된 성령일까요? 성령은 그러한 현상학적인 소리가 아니리라 생각합니다. 예수님은 인간을 구속하는 세상의 모든 율법주의자들을 향하여 외칩니다.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 [각주3]


그렇습니다. 진리의 말씀은 분명 우리 인간을 자유롭게 만들 것입니다. 그러리라 굳게 믿습니다. 하지만 그 말씀이 문자화되는 순간, 인간의 영혼과 호흡, 생명과 자유는 그 글자 속에 갇혀버리게 마련이지요. [각주4] 그러므로 예수님이 말씀하신 그 진리는 문자가 아니라 소리에 담긴 진리임에 틀림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인간을 구속하는 것이 과연 문자뿐일까요? 아닐 것입니다. 현상학적으로 우리 귀에 들려오는 소리 역시 마찬가지로 인간을 구속합니다. 무릇 표면적인 모든 현상들은 인간으로 하여금 미혹의 세계 속에서 자의적으로 기분 내키는 대로, 제멋대로 착각하게 만들어버리기 마련 아니겠습니까? 그러므로 예수님이 말씀하신 그 진리는 부흥집회장에 일순 난무하는 그런 현상의 소리가 아니라, 시공을 뛰어넘어 언제 어디에나 변함없이 존재하는 내면의 소리에 담긴 것임에 틀림없을 것입니다.


기독교는 소리의 종교입니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성경의 첫 페이지를 펼치면 장중한 목소리가 하늘에서 들려오는 듯합니다. 하나님은 문자가 아닌 말씀으로 천지를 창조하지 않으셨습니까? “기쁘다~ 구주 오셨네, 만백성 맞으라~!” 크리스마스 새벽, 예수님은 천군 천사의 찬송가 소리와 함께 이 땅에 오셨더군요.


그러나 그 소리는 내면의 소리여야 합니다. 한 순간 나타났다가 사라져 버리는 단순한 현상의 소리가 아니라, 언제 어디서나 우리들 마음속에 늘 존재하는 내면의 소리가 되어야 합니다. “나의 사랑하는 책, 비록 해어졌으나…” 어렸을 때부터 어머님의 무릎 위에 앉아 눈을 동그랗게 뜨고 듣던 찬송가의 멜로디가 아직도 귓전에 생생히 들려오는 이유는, 그것이 내면의 소리가 되었기 때문 아니겠습니까.


그러나 기독교의 소리가 내면의 소리가 되어야만 하는 가장 결정적인 근거는 아마도 십계명의 두 번째 계명이 아닐까 싶습니다. “우상을 섬기지 말라!” 너무나도 유명한 말 아닙니까? 그런데 왜 이런 계명이 등장했어야만 했을까요?


현상을 중시하는 헬레니즘은 회화繪畫와 조각이 발달한 시각문화였습니다. 그래서 그리스 로마인들은 수많은 신들의 모습을 그림과 조각으로 형상화시켰지요. 인간이 자기 멋대로 조각을 만들어놓고 신으로 섬기는 어리석음을 저지른 것입니다. “우상을 섬기지 말라!” 그것은 바로 곧 시각의 미망에 사로잡히지 말라는 선언이었습니다. 


시각뿐만이 아닙니다. 모든 현상에 미혹되면 있는 그대로의 과학적 진실을 바라보지 못하고 아집과 미망에 사로잡히기 마련이라는 경고였습니다. 당연히 현상의 소리가 아니라 내면의 소리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는 의미가 되지 않겠습니까?


기독교는 내면의 소리입니다. 내면의 소리를 추구하는 소리의 종교가 되어야 합니다.     



[각주1]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로마서 10: 17)


[각주2] “그가 또한 우리를 새 언약의 일꾼 되기에 만족하게 하셨으니 율법 조문으로 하지 아니하고 오직 영으로 함이니 율법 조문은 죽이는 것이요 영은 살리는 것이니라.” (고린도후서 3: 6)


[각주3] “예수께서 자기를 믿은 유대 사람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가 나의 말에 머무르면, 참으로 나의 제자가 되고, 진리를 알게 될 것이요,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할 것이다." (요한복음 8:31-32)


[각주4] “예수께서 그 자라나신 곳 나사렛에 이르사 안식일에 늘 하시던 대로 회당에 들어가사 성경을 읽으려고 서시매” (누가복음 4: 16)와 같은 구절에서 예수가 문자 해독 능력을 갖추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는 아무것도 기록으로 남기지 않았다. (신약성경은 예수가 쓴 것이 아니라 후세 사람들이 쓴 것이다.) 그만큼 예수가 문자보다는 청각효과를, 그것도 현상의 소리가 아닌 내면의 소리에서 비롯된 청각효과를 중시했다는 의미 아니겠는가. 불경佛經 역시 마찬가지였다. 초기 불교의 신도들은 문자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스승 석가모니의 ‘진리의 말씀’을 문자로 기록하지 않고 수백 년 동안 소리로 보존하여 후대에 전승시켜 내려갔다. 



모든 형상을 소리로 바라보라!      


선배님. 소리를 추구하는 종교는 기독교만이 아닐 것입니다. 어쩌면 불교야말로 진정한 소리의 종교인지도 모릅니다. 기독교의 소리가 보다 현상학적이라면 불교의 소리는 훨씬 더 깊은 곳에서 울리고 있는 내면의 소리이기 때문입니다. 아니, 엄밀하게 말해서, 불교는 종교라고 말하기 어려운 부분이 있으므로 ‘소리의 종교’라기보다는 ‘소리를 듣는 것’, 또는 ‘소리’ 그 자체라고 말하는 게 더 옳을지도 모르겠군요. 적어도 석가모니 당시의 초기 불교는 그러했을 것입니다.


이러한 개념 정의는 일견 잘 납득되지 않을지 모릅니다. “형상, 소리, 냄새, 맛, 접촉에 대한 욕망을 이겨내라!” 석가모니는 분명 그렇게 오온五蘊을 부정하고 모든 감각적인 것을 믿지 말라고 재삼재사 강조하였으니까요. 그래서 후세의 『금강경』에서도 그의 주장을 이렇게 정리하고 있지요. 


만약 형상으로 나를 보려 하거나 음성으로 나를 구하면, 이것은 그릇된 길이니 결코 여래를 보지 못한다.

若以色見我, 以音聲求我, 是人行邪道, 不能見如來. 『金剛經, 法身非相分』


형상과 음성에 사로잡히지 말라! 그것이 불교의 기본 입장이지요. 세상을 시각에 의존하여 그저 현상학적으로만 바라보려는 헬레니즘이나, 청각효과에 크게 주목했던 헤브라이즘에 비교하여 볼 때, 형상이나 소리에 대한 불교의 부정적인 입장은 무척 단호해 보입니다. 그러나 불교가 부정적인 입장을 보였던 소리는 ‘현상의 소리’이지, ‘내면의 소리’가 아니었습니다. 『금강경』에는 이런 말도 있지 않습니까?  

    

무릇 형상이 있는 것은 모두 허망하다.

만약 모든 형상을 형상 아닌 것으로 본다면 곧 여래를 본다.

凡所有相, 皆是虛妄. 若見諸相非相, 卽見如來.


“형상을 ‘형상 아닌 것’으로 바라보라! 그래야만 여래를 볼 수 있다!” 그것은 무슨 말일까요? 그 ‘형상 아닌 것非相’이란 게 도대체 무엇일까요? 저는 그것이 ‘내면의 소리’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므로 그 말은 이런 뜻이 아닐까요? “눈에 보이는 형상을 눈에 보이는 그대로 믿지 말고, ‘내면의 소리’로 바라보라! 그래야만 있는 그대로의 과학적 진실의 세계를 엿볼 수 있다!”


소리에는 내면성이 있습니다. 소리는 감정을 전달하는 최적의 수단입니다. 소리는 순식간에 우리들의 내면으로 파고들어 어느새 우리의 마음과 하나가 되지요. 그러나 그렇다 할지라도 인간의 귀에 들려오는 현상 세계의 소리는 듣는 이로 하여금 오해와 착각에 사로잡히게 만드는 경우가 너무나 많습니다. 사랑하는 연인들이 일순 마음에 없는 소리로 서로를 상처받게 하는 일이 어디 한 두 번이던가요? 석가모니는 그러한 현상 세계의 소리에 현혹되지 말라고 한 것 아니겠습니까?


그러나 석가모니는 내면의 소리를 부정한 적은 없습니다. 아니, 명쾌하게 언급하지만 않았을 뿐 오히려 내면의 소리를 적극 강조했던 것 같습니다. “형상을 ‘형상 아닌 것’으로 바라보라!” 현상에 미혹되지 말고 그 내면의 본질을 바라보라! 그 말은 바로 곧 내면의 소리를 들으라는 이야기 아니겠습니까?




선배님. 삼라만상의 모든 내면의 소리는 시공의 블랙홀을 타고 하나로 통해있는 것 아닐까요?


나 자신의 내면에 들어가 눈을 감고 고요히 명상에 잠기면 그 모든 소리를 다 들을 수 있다고 하더군요. 그 모든 소리가 한꺼번에 들려오면 백팔 번뇌가 일어나겠지요. 하지만 고맙게도 사랑하는 옛 님의 목소리 하나만 들려오면 밤새도록 그 목소리와 정겨운 대화를 나눌 수 있을 것입니다.


인간이면 누구나 지니고 있는 본성의 목소리도 들려옵니다. 그 목소리와 더불어 삶의 가치와 의미에 대해 진지한 토론의 시간을 가져보기도 합니다. 대자연의 바람소리 날숨소리 파도소리 들숨소리가 들려옵니다. 이 세상 모든 동식물의 내면에서 울려 나오는 소리, 그리고 마침내 우주의 내면과 하나로 호흡하는 소리가 들려옵니다….


이렇게 눈을 감고 조용히 삼라만상의 내면에 흐르는 소리를 듣는 것, 그 소리를 들으며 삶과 우주의 이치를 관조하는 것, 그것이 바로 불교의 본질이라고 말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선배님 생각은 어떠십니까?

 



물론 석가모니가 내면의 소리에 대해 명쾌하게 설명한 적은 없습니다. 그러나 임종을 맞이하여 마지막으로 행한 최후의 설법을 들어보면 그는 분명 그 특성을 아주 잘 깨닫고 있었습니다. 석가모니는 죽음의 순간이 다가오자 히란냐바티강에 유유히 흘러가는 강물을 바라보다가, 사라沙羅나무 아래 침상을 준비하고 드러누워 조용히 죽음의 순간을 기다리지요. 25년 동안 시중을 들어왔던 아난은 스승이 마지막 떠나가는 길을 지켜보며 크게 슬퍼합니다. 이제 스승께서 떠나고 안 계시면 나는 어떡하느냐, 무엇을 의지하고 살아야 하느냐, 눈물과 한탄의 질문을 던집니다.


석가모니의 대답은 이랬지요. “법에 의지하라! 다른 것에 의존하지 말아라!” 그 말은 무슨 뜻일까요? 저는 이렇게 해석합니다. “소리에 의지하라! 눈에 보이는 것에 의지하지 말아라!” “현상을 믿지 말고 내면의 소리에 의지하라!” 그렇게 풀이하고 싶습니다.


여기서 ‘법’이란 무엇일까요? '진리의 말씀'이겠지요. 그 실체는 세속의 언어를 초월한 로고스, 즉 ‘소리’ 일 것입니다. “생명이란 여타의 감각에 의해서 보여지고, 만져지고, 느껴지는 것이 아니다. 소리에 담긴 참된 정신, 그것이 영원한 생명이요, 진정한 법신法身이다.” 그런 말 아니겠습니까? “나의 육체는 사라지지만, 나의 영혼이 담긴 나의 목소리는 영원한 생명으로 남아있다. 그 소리를 너희들은 언제나 마음으로 바라보라!” 그러한 선언 아니겠습니까?


그 이치를 미처 깨닫지 못하고 있었던 석가모니의 시자侍子 아난은 그래서 여전히 슬프고 여전히 허전하였답니다. 스승님, 그래도 무엇인가 눈으로 기념할 만한 것이라도 남겨주십시오. 그것이라도 있어야 의지가 되지 않겠습니까…. 마치 헤어지는 연인들이 서로의 사진을 주고받고 정표情表를 남겨 마음의 위안을 삼으려는 듯, 아난은 어리석기 짝이 없는 우리 중생들을 대신하여 석가모니에게 매달립니다. 그러자 석가모니가 다시 조용히 대답하지요. 아마도 빙그레, 웃음을 띠지 않았을까요.


아난아. 그렇게 슬퍼하지 말아라. 정녕 그렇다면 나를 기념할 수 있는 장소 네 군데를 가르쳐주마. 내가 태어난 곳, 내가 깨달음을 얻은 곳, 내가 그 깨달음을 처음으로 너희에게 일러준 곳, 그리고 내가 입멸하는 이곳을 기억하고 기념하며 의존해 보아라.


석가모니는 충직한 아난에게 그렇게 일러줍니다. 그가 그 네 곳을 기념하라고 가르쳐 준 뜻은 어디에 있을까요? 그곳에 가면 내 목소리를 보다 잘 들을 수 있을 것이다. 현상학적으로 눈에 보이는 것에 의존하려 하지 말고, 그곳에 가서 눈을 감고 그대의 내면에서 흐르는 나의 목소리를 들어 보라. 나의 정신, 나의 영혼, 나의 법신과 하나로 만나라! 마음의 귀로 듣고 온몸으로 느끼며 시공을 초월한 곳에서 그 법신을 조용히 관조하라! 아마도 그런 뜻이 아니었을까요?


선배님. 불교의 4대 성지聖地는 소리의 기념 터요, 소리의 성지聲址였습니다. (1) 석가모니가 태어난 룸비니 Lumbini. (2) 깨달음을 얻은 보드가야 Bodhgaya. (3) 처음으로 설법한 초전법륜의 장소 사르나트 Sarnath. (4) 반열반에 들어간 입멸의 터, 히란냐바티강의 맞은편 언덕 쿠시나가르 Kushinagar!


그 4대 성지는, 시각 의존도를 최소한으로 줄이면서 청각 효과는 최대화시킬 수 있는 장소들이었습니다. 시각에 의존하지 않고 내면의 소리로 삶과 우주를 바라보는 그런 장소들이었던 것입니다.


초기불교에는 그리하여 소리만이 존재합니다. 불경佛經이나 불상佛像과 같은 시각적인 요소는 훗날 헬레니즘과 헤브라이즘의 영향을 받아 대승불교에서 등장한 것이고, 초기불교에는 그런 현상학적인 것이란 아예 없었지요. 글로 쓰여진 경전은 이미 진리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눈에 보이는 부처님의 불상과 같은 것은 갠지스강의 물결과 아지랑이 같은 허깨비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소리는 불교의 모든 것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선배님 생각은 어떠신지요?


― 계속 ―




[ 표지 사진 ]

◎ (좌상) 중국어 성경, (좌하)『법화경』, (우상) 필자의 사경 노트, (우하) 찬송가 199장.

내 삶의 기념 터, 연지蓮池의 흔적이다. 이곳에서는 이상하게도 돌아가신 어머니 목소리가 들려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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