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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오생 Nov 23. 2023

23. 연지에... 소리 편지(완)

[ 제6부. 소오생의 耳順 ]

※ 이 글은 앞선 글 〈연지에 띄워보는 그리움의 소리 편지〉의 마무리 부분입니다. 


※ [ 표지 사진 ]

◎ 전남 보성 대원사의 연지. 티베트박물관과 티베트 백탑이 매우 이국적이다. 대원사에는 연지가 두 곳이 있는데 모두 아주 인상적이다. 티베트백탑이 비추이는 이 연지는 주로 방생에 사용된다.




공자는 《논어論語 · 위정爲政》에서 "(나는) 예순 살이 되자 귀가 순하게 되었고, 일흔 살이 되자 마음 내키는 대로 행동해도 법도에 어긋나지 않게 되었다 六十而耳順, 七十而從心所欲不踰矩"라고 말했다. 


여기서 '이순耳順'의 핵심은 '소리'다. 앞선 글 참조. "최소한 예순 나이에는 삼라만상에 내재된 그 모든 소리를 듣는 훈련을 해야 한다. 그래야만 저물면서 빛나는 일흔 나이의 싱그러운 리즈 시절을 맞이할 수 있다." 나는 공자의 말을 그렇게 해석한다.  

 

'소리'는 삼라만상 모든 것의 본질이다. 동아시아 전통 공부 방법은 그 이면에 숨어있는 내면의 소리를 듣는 것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런데 삼라만상의 그 수많은 내면의 소리를 어떻게 모두 다 들을 수 있다는 말일까? 지구상에 인간만 해도 수십 억 명이요, 대자연의 동식물을 다 따지자면 갠지스강의 모래알보다도 더 많을 텐데? 또, 저 무한한 우주는? 그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내면의 소리를 어떻게 다 듣는다는 말인가? 결론부터 말하자면, 충분히 가능하다. 오로지 나 자신의 내면세계에 들어가 '나'의 소리를 들을 수 있기만 하면 된다.




우리 학교 독문과에는 차 교수님이라는 여선생님이 계셨다. 선생님께서는 1년에도 3~4권의 저서와 수십 편의 논문을 발표하시는 등, 왕성한 연구 활동으로 후학들의 귀감이 되어주셨다. 특히 지적 호기심이 대단하셔서 한참 연배가 높으셨지만 내게 수시로 의견을 구하곤 하셨다. 연구실이 바로 옆인지라 하루에도 몇 번씩 오셔서 동아시아적 관점을 물어보곤 하셨는데, 하루는 문을 벌컥 열고 느닷없이 질문을 던지셨다. 


"선생님, 공자는 하나를 들으면 열을 안다고 말했다는데, 그게 어떻게 가능해요? 나는 하나를 들으면 절반도 모르는 경우도 많은데?"


우선 '하나를 들으면 열을 안다(聞一知十)'는 공자가 아니라 그 제자인 자공子貢이 한 말이다. "안회顔回와 너의 재주를 비교하면 어떠냐"는 스승의 질문에, "안회는 하나를 들으면 열을 알지만, 저는 하나를 들으면 겨우 둘을 아는 정도입니다. 回也聞一以知十, 賜也聞一以知二."라고 대답했다는 이야기. 《논어 · 공야장 公冶長》하지만 이 장면에서 누가 그 말을 했는지, 그게 중요한 건 아닐 터. 어떻게 하나를 들었는데 열을 알 수 있느냐, 그것이 키포인트 아니겠는가. 




일제강점기 이후 지금까지 우리가 가르치고 배우는 것은 지식과 정보 습득을 위주로 하는 '서양학 science'이다. 서양학은 모든 것을 시각적 현상적으로 분리시켜 생각한다. 때문에 '하나'와 '둘'이라는 지식과 정보는 그 어떤 알고리즘이 주어지지 않는 한, 어떠한 관계도 없이 그저 분리되어 존재할 따름이다. 따라서 '하나'라는 지식과 정보를 배운다 해도 '열'은커녕 '둘'을 알 수도 없다. 


그에 비해 동아시아 전통의 '학문'은 모든 것을 유기적 총체적으로 생각하는 결합의 패러다임이다. 세상 모든 것을 현상적으로 바라보지 않고 내면과 본질을 들여다보려고 한다. 예를 들어보자. 공자의 제자 증삼(曾蔘; 증자)은 "나는 하루에 세 번 나 자신을 성찰한다. 吾日三省吾身"고 말했다.《논어論語 · 학이學而》여기서 '성찰한다 省'는 말이 바로 '자신의 본질을 들여다보는 행위'다. 다시 말해서 '나의 내면의 소리를 듣는 행위'다. 


‘나’라는 존재가 인간인 이상, 있는 그대로의 ‘나’를 알게 되면 그 어떤 '인간'에게도 적용될 수 있는 보편적 진실을 알 수 있게 된다. 나아가 '인간'이 우주와 대자연의 한 구성요소인 이상, 인간 존재의 보편적 진실을 알게 되면 자연스럽게 우주와 대자연의 내재원리도 깨칠 수 있다는 이야기다. 


나의 내면의 세계는 시간과 공간을 초월한 4차원의 세계, 인간과 우주가 하나로 통하는 블랙홀의 세계다. 모든 것이 하나로 결합된 총체적이고 입체적이고 종합적인 멀티(Multi-)의 세계다. 나의 내면을 들여다보고 그 깊은 내면에서 울려 나오는 소리를 들으며 삶과 우주의 이치를 관조하는 것, 그것이 바로 동아시아의 전통적 공부 방법이었다. 




차선생님께서는 곧 '소리'에 홀딱 빠져 들어오셨다. 독문학자와 중문학자들을 모아 한국미디어문화학회를 만들고, 선생님 댁에서 한 달에 한 번씩 모여 '소리'에 대한 세미나를 졌다.  각자 논문 한 편씩 써서《소리》라는 책도 발행하였는데,〈연지에 띄워보는 그리움의 소리 편지〉는 그때 쓴 글이다. '소리'라는 감성적인 미디어를 다루는 만큼 관념적 현학적이고 분석적 논리적인 형식을 피하여 다분히 감성적인 문체인 서간체(書簡體, 편지) 형식으로 써보았다. 아쉽게도 《소리》라는 책은 겨우 20권 정도 찍어내어 세상에 제대로 알려지지도 못했다. 아쉬움에 여기 아카이빙 하여 둔다. 80대의 싱그러운 리즈 시절을 누리고 계실 선생님께서 오래오래 건강하시길 빈다. 



연지에 띄워보는 그리움의 소리 편지 ( 6 )



선배님. 높은 하늘이 수정처럼 눈부시게 반짝이는 아침입니다. 한층 소슬해진 바람결에 가을이 성큼 다가와 있네요. 유난히도 뜨거웠던 지난여름. 그러나 일주문 밖 드넓은 연지蓮池에 하나 가득 하얀 연꽃 꽃 피웠던 무더위는 작별인사도 없이 바람처럼 떠나갔습니다. 법당 앞뜰에는 어느새 국화꽃 향기가 은은합니다. 말없이 우뚝 선 저 석탑에도 이제 곧 무서리가 내리고 낙엽이 지겠지요. 



연지의 목소리당신은 누구십니까



선배님. 침묵이 흐르는 저 탑塔 앞에서 조용히 소리를 듣던 그때 그 초가을 날의 아침을 기억하십니까? 선배님은 절에 가면 언제나 먼저 탑을 찾았지요. 천천히 탑을 돌며, 몇 번이고 탑을 돌며, 탑에서 들려오는 그 무언가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던 선배님 모습은 너무도 인상적이었습니다. 그 연유를 물어봐도 그저 빙그레 웃던 선배님, 참 보고 싶군요….


알고 보니 ‘탑’은 ‘무덤’이란 뜻이었습니다. ‘무덤’이란 뜻의 범어梵語인 ‘스투파 stūpa’를 음역 한 것이었지요. 다른 사람의 무덤이 아니었습니다. 석가모니의 무덤입니다. 무덤! 그곳이 어떤 곳이던가요. ‘소리’가 머무는 ‘소리의 기념 터’ 아니었습니까? 부처님의 무덤, 탑! 그곳은 석가모니의 소리, 그 영원한 법신이 머무는 곳이었습니다. 그러므로 불자佛者들은 법당 안에 엄숙히 앉아 계신 부처님 불상을 찾아가 인사를 드릴 일이 아니라, 먼저 탑을 찾아 부처님의 목소리를 들어야 하는 것 아닐까요?

지리산 화엄사의 석탑. 석가모니의 목소리를 듣는다...

그러나 선배님. 제가 불교를 종교로 생각하지 않아서일까요? 저의 기념 터는 탑이 아니라 연지蓮池인 듯합니다. 연꽃 피는 계절이 아니라도 저는 언제나 그곳에 가서 소리를 듣습니다. 그 어느 곳의 연지에 가더라도 정갈한 향기 속에 퍼져오는 신비로운 영혼의 소리가 들려오기 때문이지요. 선배님, 사랑하는 그 님의 그리운 목소리인 듯, 돌아가신 어머님의 따스한 미소인 듯, 연지에서 들려오는 그 소리의 정체는 도대체 무엇일까요.

 

선배님, 누구나 잘 알듯이 연꽃은 불교를 상징하는 고결한 꽃입니다. 그러나 저는 연꽃보다도 그 꽃이 피어나는 곳, ‘연지’의 의미를 먼저 생각해보고 싶군요. 연꽃은 누구에게나 사랑받지만, 더러운 진흙 뻘 밭으로 이루어진 연지는 그렇지 못하니까요. 


연지는 아프고 괴롭고 힘든 우리들의 삶, 그 자체입니다. 직시하기에는 너무나 힘들기에, 누구나 짐짓 외면한 채 지나쳐버리고 싶은 우리들 자신의 어두운 세계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청정한 불국佛國 세계를 상징하는 고결한 연꽃도 진흙 밭의 연지가 아닌 곳에서는 결코 피어나지 못한다는 사실을! 불교 최고의 경전이라는 《묘법연화경 妙法蓮華經. 그 이름은 연꽃 속에 피어난 진리의 말씀, 참된 영혼의 소리라는 뜻이지요. 하지만 그 진리의 로고스도 연지가 아닌 곳에서는 들려오지 않는 소리였습니다. 

보성 대원사의 두 번째 연지. 

선배님, 흔히 《법화경 法華經으로 불리는 그 경전의 가장 큰 가치와 의의는 참된 구도자, 관세음보살의 출현에 있다고 배웠습니다. 그런데 무슨 까닭인가요, 저는 관세음보살이라는 말을 들으면 언제나 그의 신비로운 미소가 떠오르는군요. 고통의 바다에서 신음하는 중생들의 아픈 소리를 듣고 그들을 구원해 준다는 관세음보살! 그는 무엇으로 아픔을 치유해 주는 것일까요? 미소! 그 신비로운 미소가 아닐까요? 


그 미소에서는 벼락 치는 소리가 들립니다. “머무는 곳 없는 그곳에 마음을 둘 지어다!” 벼락같이 울리는 《금강경의 소리, 내 인식의 세계에 벼락을 내리치는 소리입니다. 내 모든 인식이 형해화形骸化 된 무아無我의 세계가 열리는 소리입니다. 


무아 세계의 미소! 중생을 구원하고 나 자신을 구원하려면 먼저 내 인식의 세계를 송두리째 없애야 하나 봅니다. 시시비비를 따지는 인식의 세계가 사라지고 오로지 따스한 포용의 세계만이 존재할 때, 중생들은 비로소 편한 마음으로 다가와 그가 내미는 손을 잡을 수 있을 테니까요. 아, 저는 언제나 제 인식의 세계에 벼락을 내리칠 수 있을까요. 몇 번이나 천길 낭떠러지에서 몸을 던져야 그 순간이 찾아올까요.


그 미소에서는 우주가 폭발하는 거대한 굉음이 들립니다. 나 자신의 우주가 폭파되는 《화엄경의 소리입니다. ‘화엄華嚴’은 ‘꽃으로 아름답고 장엄하게 장식한다’는 뜻이지요. 우주에 하나 가득 아름다운 꽃비가 펄펄 내리는 광경, 그것이 ‘화엄’의 세계입니다. 그 ‘꽃비’는 ‘나’의 파편입니다. ‘나’에게 벼락을 내리쳐 ‘나’ 스스로를 폭파시킬 때 탄생하는 그 수많은 ‘나’의 파편이 꽃비 되어 우주를 아름답게 장식하는 것이겠지요. 화엄 세계의 미소! 그것은 나 자신을 온전히 희생하여 새로운 우주를 탄생시키는 소리였습니다. 아, 저는 언제나 내 몸을 온전히 폭파시킬 수 있는 것일까요. 언제나 그 희생의 경지를 엿볼 수 있는 것일까요. 

포용과 희생의 그 미소는 귀로 듣지 않고 마음으로 관조할 때 탄생하는 내면의 소리입니다. 관세음보살觀世音菩薩! 그 구도자의 이름은 청세음聽世音이 아니라, 관세음觀世音이었습니다. 타인과 현상세계의 내면을 마음으로 관조하고, ‘나’ 자신을 온전히 희생하여 그 숱한 모순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포용하는 따스한 미소. 그것이야말로 영혼의 소리, 우주의 언어가 아닐까요? 


하지만 그 내면의 소리를 들을 수 있으려면 현상의 소리를 들어본 청각의 기억이 있어야 하는 법. 자기 자신의 모순된 삶의 뼈저린 체험을 통해 세상의 괴롭고 아픈, 그 모든 소리를 들어본 기억을 지니고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래야만 중생들의 표정만 보아도 그 내면에 흐르는 아픈 소리를 절실하게 공감하며 들을 수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 아팠던 체험이 없으면 그 내면의 소리를 어찌 마음으로 바라보고 구원의 손길을 내밀 수 있겠습니까! 


선배님. 그래서 저는 맑고 고운 연꽃보다 진흙 뻘 밭의 연지를 더욱 사랑합니다. 즐거움과 기쁨의 노래가 넘쳐흐르는 청정 세계보다 괴롭고 아픈 현실 세계의 가치를 더욱 존중하고 싶습니다. 세상의 모든 괴로움과 아픔이 모인 진흙 연못, 연지. 그곳은 제 삶의 현장입니다. 그곳이 제 목소리가 들리는 영원한 저의 기념 터이자, 저의 무덤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그런데…, 선배님. 

궁금한 게 있습니다. 여쭤보고 싶은 게 있습니다. 

선배님. 당신은, 누구…, 십니까? 


연잎에 구르는 이슬방울을 바라보며 당신의 목소리를 음미해 봅니다. 

마음의 귀를 열고 삶과 자연과 우주의 내면에 흐르는 당신의 그 목소리를 들어봅니다. 


바람소리 구름소리 물소리 새소리, 우주와 대자연에 가득 찬 생명의 소리…, 당신의 목소리가 들려옵니다. 

사랑하는 내 님의 다정한 그 목소리, 정다운 벗님들의 정겨운 웃음소리, 

화목한 가족들의 기뻐하고 슬퍼하는 목소리, 강의실 안 사제 간의 따스한 감성의 목소리...


그리고 이 글을 쓰고 있는 제 마음과, 

이 글을 읽고 계시는 독자 여러분의 하나 된 마음속에 흐르는 훈훈한 목소리…, 

당신의 목소리가 들려옵니다. 


선배님, 당신은 시공을 넘나드는 우주의 메시지, 영혼의 소리일 것입니다. 

메말라가는 우리들의 감성을 일깨워주는 싱그러운 생명의 소리일 것입니다. 

분열과 대립의 골을 메우고 우리들의 마음을 하나로 묶어주는 아름다운 사랑의 소리일 것입니다. 


선배님, 당신의 그 모든 목소리를 하나씩, 하나씩, 저기 저 연지에 띄워봅니다. 

언젠가 나의 연지에 하나 가득, 눈부시게 하얀 연꽃이 만개하기를 소망하면서…. 

맑은 햇살 속에 가을의 소리가 영글어가는 나른한 오후입니다.


―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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