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이 곳에 왔을 때 다정히 인사하며 말을 걸어준 금발머리, 파란 눈의 엄마가 있었다. 덴마크에서 온 가족으로 남편의 직장 때문에 딸 셋과 함께 말레이시아에 오게 된 엄마였다. 나의 두 아이와 덴마크 엄마의 두 딸이 각각 같은 반이 되면서 접점이 많아 친해지게 되었는데 이 엄마와의 대화는 늘 내게 새로운 깨달음을 주었다.
아.. 이래서 북유럽이 교육, 문화 여러 면으로 배울 점이 많은건가? 복지 강국 선진국인건가? 싶은 순간이 참 많았다.
덴마크 엄마와 나눈 몇 가지 대화 예시를 들자면...
나 : 우리 둘째 아이가 영어를 아직도 못해서 너무 걱정이 돼.
덴마크 엄마 : 영어를 한 마디도 못하던 아이가 이 곳에서 와서 학교에서 종일 영어로 수업을 듣고, 공부를 배우니 그것만으로 정말 놀랍지 않니? 정말 대단하지 않니? 난 우리 아이가 속도는 느리더라도 꾸준히 나아지고 있다고 믿어.
나 : 우리 둘째 아이는 배움의 속도 자체가 느린 아이야. 그래서 친구와 비교되고 자존감이 낮아질까봐 걱정돼.
덴마크 엄마 : 우리 둘째 아이도 그런 편이야. 간혹 스스로 친구와 비교하면서 실망하는 아이에게 난 항상 그 아이의 장점에 대해 이야기 해.
- 넌 사람들에게 친절하게 인사를 잘 하잖아.
- 넌 이야기를 재미있게 하는 재주가 있어.
아이가 내게 묻지. '엄마, 그것도 장점이에요?'
'그럼 그건 아무나 가질 수 없는 정말 특별한 장점이야. 넌 너만의 장점을 가졌단다. '
난 아이에게 이렇게 말해주고는 해.
한국에서 엄마들과 나눈 주된 주제는 아이의 부족한 점에 대한 고민이었다. 엄마들끼리 서로 우리 아이는 이런게 부족하다면서 공감대를 형성하고 서로를 위로해주기도 하며, 어디선가 들은 적 있는 성공 사례를 공유하고 솔루션을 함께 고민했다.
어떻게 하면 수학을 더 잘 할지, 운동을 잘 할지, 또는 내성적인 성향을 바꿔줄지.
유튜브, 블로그, 인스타 등 각종 콘텐츠를 보면, 아이를 잘 키우기 위해 해야할 것들에 대한 지침으로 가득하다. 우리 아이를 잘 키우고자 노력하는 엄마들을 위한 것이겠지만..이상하게 이런 콘텐츠를 보다보면 내면의 불안함이 스멀스멀 올라오고는 했다.
그래, 공부습관을 잡아줘야한다는데 우리 아이는 잘 하고 있는걸까.
그래, 지금 독서를 이렇게 해야한다는데 우리 아이의 문해력이 또래에 비해 너무 뒤쳐지는 것은 아닐까.
그래, 키 크려면 몇 시 전에 자야한다는데 우리 아이가 너무 늦게 자는 것은 아닐까. 등등
아이에 대해 온갖 불안과 걱정만 토로하는 내게 덴마크 엄마는 언제나 다른 시각을 제시하고는 했다. 덴마크 엄마처럼 생각하면 될텐데..나는 왜 이렇게 아이의 부족한 점에 대해서만 생각하고 걱정할까 싶어 스스로 반성한 적이 한두번이 아니였다.
그래, 우리 아이는 이미 잘 하는게 충분히 많아. 이 아이만이 가진 장점이 있어.
그걸 믿고 기다려주면 되는데 나는 왜 계속 불안해하는걸까.
사실 이건 경쟁이 만연한 한국 사회와 그렇지 않은 덴마크 사회의 차이로 기인하는 것일테다. 판사의 삶이나 목수의 삶이나 평소 삶의 질이 크게 다르지 않다는 덴마크에서는 소위 말하는 의사, 판검사가 되기 위해 경쟁적으로 공부하지 않는다. 대학을 꼭 가야한다고도 생각하지 않는다. 그런 사회에 살기에 느긋한 태도도 가질 수 있는게 아닐까. 덴마크 엄마와 이야기를 나누다가 "넌 혹시 유토피아에 살고 있니?"라고 묻기도 했다. 큰 소리로 웃으면서 아니라고 우리도 이슈가 많다고 말하는 덴마크 엄마였지만 한국과 확연히 다른 사회 제도와 분위기가 부러울 수 밖에 없었다.
우리 아이들은 앞으로 한국의 교육을 받으며 자라나겠지만 덴마크 엄마의 교육 태도만은 꼭 배우고 싶다. 훗날 우리 아이가 어른이 되었을 때, 한국이라는 작은 나라를 벗어나 전세계 곳곳에서 다양한 배경과 문화 속에 자란 사람들을 만나게 될텐데...그들의 삶을 대하는 여유와 느긋함도 아이가 알았으면 한다.
국제학교에서도 Year 6 즉, 6학년이 되면 Primary school 졸업식이 크게 진행된다. 졸업에 맞춰 학교 곳곳에 6학년 아이들의 꿈과 계획에 대한 글들이 전시된 적이 있었는데, 이 때 비슷한 대답을 적은 많은 아이들 사이에서 덴마크 엄마의 첫째 아이의 답은 굉장히 인상적이었다.
나의 꿈과 목표, 어떤 미래를 꿈꾸는지에 대한 질문이었는데 말레이시아 대다수의 아이들과 한국 아이들, 아시아 아이들의 대답은 거의 동일했다.
공부를 열심히 해서 좋은 대학에 갈 것. 성공적인 비즈니스맨이 될 것. 의사가 될 것. 변호사가 될 것.
돈을 많이 벌 것. 등등
비슷한 대답 속에서 덴마크 아이의 답변은 바로, 사랑하는 가족들과 행복한 삶을 살아갈 것. 내가 좋아하는 말을 한 마리 가지고 살아갈 것. 어려운 사람을 도우며 살아갈 것 등이었다.
와...이 아이는 정말 본인이 꿈꾸는 삶 자체에 대해서 이야기하는구나 싶었다. 이루고 싶은 꿈과 목표를 직업으로 적은 아이들과 다르게, 살고 싶은 인생을 적은 덴마크 아이의 답변이 다르다는 생각이 들었다.
대학생 시절, 휴학을 하고 베트남으로 3개월 봉사활동을 간 적이 있었다. 그 때 덴마크에서 고등학교를 갓 졸업하고 온 5명의 아이들이 있었는데, 베트남에 온 이유를 묻자 대학에 진학하기 전에 내가 하고 싶은게 뭘지 찾고 싶어서 다양한 경험을 쌓는 중이라고 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면 바로 대학에 가거나 재수를 해야하고, 이마저도 늦어지거나 다른 선택을 하면 주위의 우려깊은 시선을 감당해야하는 한국과는 정말 다르구나 싶어 놀라워했던 그 때의 기억이 떠올랐다.
당장 한국에 살면서 덴마크 아이들과 같은 삶의 속도를 갖기는 어렵다. 그래도 우리 아이에게 괜찮다고, 그래도 된다고, 늦어도 된다고 말해줄 수 있는 부모가 되고 싶다.
지금껏 인생을 살아보니 알지 않겠는가. 그 때 20대 초반의 나이가 얼마나 어렸는지. 대학을 1~2년 늦게 들어간다고 큰일나지 않는다는 것을. 회사 취업 조금 늦게 한다고 인생이 어떻게 되지 않는다는 것을.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