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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람바 Mar 16. 2024

공감으로 가는 길

어떤 상황에서나 감정적이기보다 감성적이고 싶다. 배가 고플 때나 하루가 고될 때에도 감성적인 사람이고 싶다. 그래야 공감을 잘할 테니까. 라고 생각해 왔고 얼마 전 그 생각이 깨졌다. 그 이유는 감정에 구애받지 않고 공감하는 사람을 보았기 때문이다.


 MBTI가 자기소개서에도 써지는 오늘날에서도 감정이라는 것이 E나 I처럼 이분법적으로 나눌 수 없다고 생각한다. E인데도 I처럼 보이기도 하고 I인데도 E처럼 보이기도 하는데 그럼에도 나는 경험상 T(사고형)와 F(감정형)인 사람들은 쉽사리 구분이 된다고 생각한다. 요즘 유행하는 말로는 '너 T야?' 하는 말처럼 E와 I는 그 구분이 보이는 부분에서 나타나는 성향이 크지만 반대로 보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T와 F는 조금만 말을 섞어도 대부분 그 성향을 파악 가능한 것 같다.


물론 경험상 내가 본 상황 중 더 많이 본 경우에 대한 이야기고 다른 경우도 있겠지만 말하고 싶은 건 '너 T야?'라고 묻는 말속에는 '너 왜 이렇게 공감을 못해?'라는 말로도 해석되기 때문이다. 어느 순간 T는 현실적인 사람이라기보다 공감을 못하는 사람이 되어버렸고 F는 그와 반대로 공감을 잘하는 사람으로 여겨지는 것 같다. 여기서 한 지인을 보고 나는 확실히 저 말은 틀렸다는 걸 알았다.


그 사람과 전화를 하며 대화를 하는데 주제는 위로받고 싶은 상황이 있었는가? 였다. 우선 그 상황에 서로를 대입해 보며 상대방이 힘들 때 어떻게 위로해 줄 것인지 얘기해 보았다. T가 90%가 나오는 그 사람에 대답은 의외였다. 자신은 위로하는 방식이 조금 다르다며 우선 자신이 아는 맛있는 밥집이나 디저트를 사 먹일 거라고 얘기했고 천천히 상대방이 얘기를 하면 들어주고 안 하면 그냥 있겠다고 했다.


그 사람과는 다르게 F가 90%가 나오는 나는 그동안 누군가를 위로할 때 상대방이 뭐가 힘든지 얘기를 해보라고 물어본 뒤 그에 맞게 위로가 될 만한 얘기들을 해주었다. 그런데 뭔가 나이를 먹어가면서 사람들이 받는 상처들이 사회에 나가면서부터인가 누군가에게 드러내기를 꺼려하고 또는 그 상처가 낫지 못하고 패여 점차 시간이 지나 무뎌진 사람도 많다는 걸 알았다.


누군가는 어릴 적 입은 상처를 드러내기 싫어 가면을 쓴 '나'를 만들고 감추지만 또 누군가는 그 상처가 계속해 드러나 아픔을 남들한테 호소하는 자기 연민에 빠지는 사람들도 있었다. 그래서인지 어느 순간 내가 위로하는 방식으로 타인의 이야기를 듣기 힘들어졌고 위로가 될 만한 말들도 생각이 나지 않게 되었다. 그런데 그 사람은 현실적인 사람인지라 이렇게 얘기하더라 '나는 굳이 안 물어보고 맛있는 거 사 먹이러 가'라고 얘기했다. 나는 조금 의아해하며 '그게 다인가?' 하는 생각이 들 때쯤 그 사람은 설명해줬다.


맛있는 걸 먹으면 기분이 좋으니까, 그 사람이 말하기 힘든 일일 수도 있으니까. 그 사람 말을 먼저 들어줄 수 있으니까, 같이 있어줄 수 있으니까 같이 저 짧은 말 안에 많은 생각들이 있었다. 나는 그제야 위로라는 게 꼭 위로가 되는 '말'뿐만이 아니라 다른 형태의 모습이 있다는 걸 알았다.


나는 초등학교 6학년이 될 무렵 스마트폰이 나왔고 학창 시절 대부분 스마트폰과 함께 지냈다. 그 시절도 요즘같이 SNS나 커뮤니티의 발달로 인해 소통이 자유로워진 세상 속 오히려 나를 포함해 상대적으로 소통의 부재를 겪는 사람들을 많이 봐왔다. 거기서 오는 외로움이나 아픔들이 있고 특히나 청소년기에는 더욱이 학생이라는 신분에 대인관계로는 학교나 학원에서 만난 친구들이 대부분일 것이고 그들이 소통하는 SNS나 커뮤니티에 영향을 가장 많이 받을 시기에 나는 위로하는 법을 배웠다. 소통의 부재로 아픔을 겪고 위로받고 위로해 주며 위로하는 법을 배운 나는 어느 순간 상대와 내가 대화를 해야지 소통하는 것이고 위로를 해주고 또, 받을 수 있다고 생각해 왔던 것 같다. 그런데 살다 보니 그게 아니었다.


사연이 없는 사람은 없다. 각기 다른 삶의 무게로 함께 무거워진 마음과 생각들이 자연스럽게 입 또한 무거워지게 만들었고 그렇기에 다른 방식의 위로도 필요하다. 대화가 아닌 다른 형태의 위로. 굳이 그 사람에 아픔을 끄집어내지 않고도 할 수 있는 위로 그 사람처럼 당장의 '맛있는 걸 먹으면 기분이 좋으니까' 같은 현실적인 답 속에서도 배려가 전제가 되어 구태여 아픈 기억을 상기시키지 않고 상대가 말할 수 있을 때까지 기다려주며 옆에 있어주는 걸로도 위로가 되는 것처럼 말이다.


공감은 배려가 전제가 되어야 하고 하나의 형식에 갇혀하는 것이 아니다. 물론 상황 따라 나의 지인처럼 하는 위로가 정답이 아닐 수 있다. 누군가는 맛있는 걸 먹고도 기분이 좋지 않을 수 있고 혼자 있는 게 위로가 될 수도 있고 다양한 방법이 있겠지만 나는 하나의 형식에 갇힌 나의 위로방식에 틀을 깨준 그분께 감사하다. 위로는 공감으로 가기까지 배려가 길처럼 깔려 가야 한다는 걸 알게 되었고 이런 것들이 전에 쓴 글에서 얘기했듯 배려하는 사람인 것이다. 그렇기에 공감은 F나 T로 나누는 것이 아니라 배려하는 사람이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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