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정부에서 지인이 놀러 와서 어린이날 행사도, 어버이날 행사도 정신없이 지나갔다.
지인을 보내고서 연휴 마지막 오후, 폰을 꺼내 들었다.
"어머님, 목욕탕 가실래요?"
"느그, 뭐, 손님 왔다면서?"
"오전에 갔어요. 그래서 목욕탕가실랑가해서."
"지금 대파 묶는 디?"
"언제 끝날 것 같아요?"
"곧 끝날 것 같은 디?"
"그럼 모시러 갈까요?"
"그라면 대파 끝나고 전화하든지 할랑께."
"네. 챙기고 있을 게요."
전화를 끊고 욕실로 가서 이것 저것 담았다.
아이들 속옷, 남편 속옷, 내 속옷.
샴푸는 챙기고, 때 타월도 챙겨야겠지.
치약도 챙겨야 하나.
목욕 가방을 다 챙길 즈음, 폰이 울렸다.
"아부지가 태다준단다, 글로 바로 와라잉."
"아, 아버님은 목욕 안하세요?"
"느그 아버지는 목욕탕 싫어한께."
"알겠어요~ 금방 갈게요."
이 때문에 어머님께 목욕가자 처음 연락드렸었다. 아버님은 예전부터 목욕탕을 좋아하지 않아 가시지 않는 다. 시골에 살고 대중교통이 좋지 않으니 운전면허 없으신 시어머니도 덩달아 목욕탕을 자주 갈 수 없다. 그러니 남편도 목욕탕 추억은 없다고 늘 목욕탕에 가면 아들과 우유 들고 짠을 한다.
왜 아버님은 목욕탕을 싫어하게 되신걸까 생각하다 보니 금세 목욕탕에 도착했다.
남자팀과 만날 시간을 약속하고 우리는 여탕으로 발을 옮겼다.
여탕으로 들어가면 나는 분주해진다. 매번 거절하는 어머님 몰래, 하지만 발 빠르게 나가시 등록을 해야 한다. 나는 예전부터 따뜻한 곳에선 힘을 잘 못썼고 어지러워 주저앉기 일쑤였다. 그러니 어머님께 목욕가자고 해놓고도 시원하게 등도 밀어드리지 못한다. (밀긴 하는 데 시원하게 가 어렵다.) 그래서 나는 나의 부족함을 채우고자 때밀이를 이용한다. 그 덕에 어린 딸아이는 아파하지 않고 때를 밀 수 있으니 다행일지도.
그렇게 오늘도 어머님 앞에서 미적거리며 옷을 벗고 딸아이 손을 어머님께 쥐어 욕탕 안으로 보낸 뒤 신속히 때밀이를 등록했다.
뜨뜻한 탕 속에서 딸아이 좋아하는 계란도 먹이고 우유도 먹이고 어머님과 이런저런 수다도 떨다 보면 시간이 순식간에 흘러간다.
"69번!"
멀리서 우람한 체격의 때밀이 아주머니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늘 느끼지만 저분들은 진짜 대단한 분 들이신 듯.
"어머님, 어머님 먼저 가서 때밀이 받으세요."
"아이고, 또 했냐. 맨날 뭣허러 저런 데 돈을 쓴다냐."
"제가 밀어드림 좋은 데, 아직 제가 힘을 못 길렀어요. 운동해서 좀 더 힘을 길러서 그땐 제가 꼭 밀어드릴게요."
"됐다야, 내가 밀면 된당께."
"아이참. 저거 환불도 안되요."
나의 등쌀에 어머님이 가고 나는 아이와 앉아 아이의 고사리 같은 손을 시작으로 흰 지우개가루 같은 때를 벗기기 시작했다.
쫑알쫑알 쉬지 않는 아이의 이야기를 들으며 때를 밀고 있으니 아이가 목욕탕을 좋아하는 이유를 알 것 같았다. 내가 이렇게 아이의 이야기를 가만히 들어주었던 적이 언제였더라.
어느덧 아이의 두 팔과 등을 밀어갈 때쯤이었다.
"69번!"
한번 더 번호가 메아리쳤다.
목욕탕에 아이를 혼자 두는 건 참 무서운 일이다. 하지만 여탕에서는 감사하게도 (특히 젊은 할머니들) 아이를 좋아하고 관심 있게 지켜봐 주시는 분들이 많다. 걱정 말고 다녀오라시며. 보통 어머님과 교대할 수 있도록 미리 때밀이 아주머니께 양해를 구하는 데, 오늘은 주변분들의 친절함 덕분에 마음 편히 때 밀러 갔다.
때 밀러 누워있을 때면 왜 이렇게 긴장되는지. 아마도 아주머니가 요구하는 포즈를 잘 맞추지 못해서일 테지.
내 긴장감을 눈치챘는지 아주머니가 말을 걸어왔다.
"어디 사람이요? 경상도쪽인갑지?"
"아, 네."
"어버이날이라고 시어머니 모시고 왔대?"
"아... 어버이날이라기보단... 아, 뭐. 그래요."
"착한 며느리고만."
"... 제가요?"
"그라지, 착한 며느리지."
"아... 저희 시어머니가 흔치 않은 시어머니여서요."
"흔치 않은 시어미니는 어떤 시어머니대?"
"아.. 뭐, 그냥. 대한민국에 흔치 않아요."
어머님의 친절함을 일일이 다 말하기엔 너무 많아서 둘러댔다. 때밀이 아주머니는 그런 내 반응을 나의 불편함으로 생각하셨는지 이후부터는 말이 없으셨다.
내가 착한 며느리일까라는 생각에 빠져든 나도 구태여 뭐라 더 말을 붙이지 않았다.
나는 부족한 게 많다. 요리 잘하는 며느리들은 시댁에서도 솜씨를 발휘하고 잘 못하더라도 대부분 보탬이 된다. 그런데 나는 보탬이 되려 해도 늘 멀뚱멀뚱 서있는 게 고작이다. 음식이 마무리될 때쯤, 어머님은 맛있는지 확인하실 때 내 입으로 쏙 넣어주실 뿐이다. 집안행사로 장을 보러 가셔도 내가 좋아하는 메뉴를 누가 말하지 않아도 먼저 챙겨주신다. 하다못해 내가 좋아하는 밀키스(음료수)까지도 따로 준비하신다.
하루빨리 실력이 늘어 보탬이 되고 싶은 데 내가 전할 수 있는 건 장 보실 때 보탬이 되시라 몇 푼 넣지도 못한 봉투를 건네는 게 다다. 어찌 정성 들여 음식 하는 며느리들에게 견줄 수 있을까.
오늘의 때밀이도 세아를 밀어주듯 어머님의 때를 밀어주며 같이 두런두런 이야기를 하는 그런 며느리들에게 나는 견줄 바가 못된다. 우리 어머님 등짝은 내가 책임질 거라 해놓고 제대로 밀지도 못하고 지쳐 냉수만 들이켰던 첫 목욕이 떠오른다.
그야말로 나는 돈밖에 쓸 줄 몰랐지, 내가 직접 어머님을 위해 할 수 있는 게 있기나 할까 싶다. 며느리 특강 때문에 밥 못 챙겨 먹는다고 좋아하는 육개장 한가득 끓여서 얼려 남편 손에 보내시는 분.
며느리 바빠서 애들 밥 못 챙겨 먹이면 또 그거 속상해한다며 곰탕 한가득 고아서 얼려 남편 손에 보내시는 분. 물가 올라서 마트 가면 몇 개 안 집어도 돈 많이 나온다며 갈 때마다 쌀이며 양파며 파며 잔뜩 쥐어주시는 분. 생김치 좋아하는 며느리라고 김치 익을 때쯤 생김치 따로 해서 남편 손에 보내주시는 분. 부부간의 금술은 둘의 시간 확보에 있다는 걸 어디서 보시고(아가씨의 입김일지도 모르겠다.) 주말에 애들 두고 둘이서 어디라도 다녀오라 등 떠밀어 주시는 분. 어쩌다 반찬 갖다 주러 아파트 주차장까지 오셔도 절대 집으로 올라오지 않으시는 분. 기어이 어머님 아버님 손 당겨 집으로 모시고 올라오면 외식하자고 부엌에도 못 들어가게 하시는 분. 그런 분이 바로 우리 어머님이다.
내가 받아온 어머님의 사랑에 내가 해드릴 수 있는 게 없어 죄송한 순간이 많다. 그야말로 돈만 쓸 줄 아는 한심한 며느리. 그 돈도 많이 벌어 많이 드릴 수 있음 말도 안 한다. 쥐꼬리만큼 쓰면서 어머님 정성에 퉁치자니 늘 면목이 없다. 이번 어버이날에도 식사대접을 계획했는 데 내손으로 차린 식사는 아직 엄두가 나지 않는 다.
착한 며느리들은 어떻게 해서든 더 노력하지 않았을까. 내년에는 나도 착한 며느리가 되어 봐야 할 텐데. 각오를 다지기엔 아직도 조금은 두렵다. 오늘 남편에게 도움을 청해봐야겠다.
진짜 착한 며느리가 되어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