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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봉보로봉 Jun 24. 2016

왕갈비와 냉면, 그리고 할아버지

나도 사랑을 드릴게요


할아버지를 비롯, 돌아가신 할머니 아빠 엄마 우리 남매 셋, 친가 친척들 모두 냉면을 좋아한다. 누구 하나 빠지지 않고 좋아하는음식이 양념게장과 냉면이다. 명절에는 꼭 게장을 담궈 먹는데, 게장이없으면 안 오겠다는 소리들을 할 정도로 우리 가족이 모이는 이유가 되기도 한다. 다른 반찬은 없어도 좋다. 게장 하나로 온 가족이 싱글벙글. 배터지게 게장만 먹는 날이다. 매울까 봐 함께 내놓는 불고기는 점심에도 저녁에도 거의 그대로 다시 데워지고 또 다시 데워져서 상에 오른다. 그 옆엔 게 껍질만 수북이 쌓여간다.

‘명절에 게장’이라면, 생일에는 ‘냉면에 왕 갈비’다. 어렸을때는 할머니께서 시내에 있는 ‘에버그린’ 이란 경양식 집에 데리고 가주셨다. 어두운 조명에 나이프와 포크, 두꺼운 천 냅킨앞에 아이들의 볼은 상기되었고,나비 넥타이를 한 웨이터는 어린 우리에게도 크림 수프와 야채 수프 중 어느 것으로 하겠냐고 물어봐 주었다. 항상 크림수프를 골랐지만, 잠시 고민하는 척 하는 것이 즐거웠다. 일 년에 한 두 번 할머니 덕에 폼 잡는 날이었다.  

우리가 어느 정도 자란 후에는 ‘분위기’ 보다 ‘맛’이 있는 가게로 이동했다. 할아버지 할머니도 msg 가득한 크림수프는 더이상 싫으신지 “너희들 가고 싶은데 가자” 라고 하셔도 냉면 집에 가면 티가 나도록 좋아하셨다. 자연스럽게 우리 가족은 할아버지 집 근처의 냉면집에서 많이 모였는데, 매운 것을 좋아하시는 함경도 출신의 할머니는 회냉면, 남자들은 대부분 물냉면, 어린 입맛들은 비빔냉면으로 갈라졌다. 그리고 냉면은 항상 ‘고기와 함께 나오도록’ 주문해서 먹었다.

육수의 맛 같은 건 잘 모르는 아이들은 비빔냉면의 달콤한 고추장소스와 돼지갈비의 양념 맛에 푹 빠져 놋그릇을 긁어가며 먹었다. 고기도 항상 추가. 얇게 저민 무와 고기를 번갈아 가며 냉면에 싸서 먹으면 냉면도 고기도 입안에서 사르르 녹아 없어진다

결혼을 하고 미국에 간 사촌오빠부부, 러시아에 발령이 난 사촌언니부부, 스페인에 있는 남동생, 김포에 사는 우리부부, 평촌에 신혼 집을 차린 동생 부부, 어쩌다 보니 커서는 너무 멀리 떨어져 살게 된 우리들. 모두 차도 있고, 대접할 수 있는 돈도 벌지만, 생일이면 테이블 두 개를 붙여 가며 꼭 다같이 모이던 시절은 이제 지나가고 말았다. 손녀들끼리 모시고 가게 될 때도 있고, 거기에 남편들이 함께 일때도 있다. 아이가 있는 가족이 함께하면 좀 더 시끌시끌 해진다. 분위기는 다르고 모시고 가는 사람은 달라도 할아버지를 모시고는 냉면에 왕 갈비를 먹으러 간다. 그것만은 그대로이다.  

지난번 가족모임 때는 서울에 오래 된 냉면집이 있다고 해서 할아버지를 모시고 온 가족이 갔다. 냉면 가격이 다른 집들보다 비싼데도 일층에는 대기하는 할아버지 할머니로 문전성시였다. 하긴, 5천원정도 더 비싸다고 해도 아침 저녁으로 변하는 서울 한복판에 이렇게 수 십 년씩 그대로 있는 냉면집이 있어 친구들과 ‘항상 가던 곳’에서 만날 수만 있다면 나도 그 돈이 아깝지 않을 것 같다. 고기육수가 아닌데다, 쫄깃하지도 않고 뚝뚝 끊기는 면이 나는 아무래도 생소한데 할아버지는 “이렇게 메밀이 들어가야 냉면이지” 하고 기분 좋게 맛있게 드셨다. 나도 기분이 좋았다.

우리 모두 기분이 좋았다.

얼마 전 부모님의 사정으로 할아버지가 우리 부부와 3주간 함께 지내고 가셨다. 할아버지는 안방 베란다에서 죽어가던 5개의 화분의 가지들을 문구용 가위 하나만 가지고 정리하셨는데, 갑자기 아이들이 생기 넘치고 예뻐졌다. 물만 준다고 되는 게 아니야, 얘네들도 사랑을 줘야 돼, 하고 오전 내내 만져주셨던 덕분이다.


할아버지가 계신 3주 동안 그 화분의 나무들은 정말 사람인 양 잎도 반들반들, 생글생글, 기분 좋아 보였고 예뻐 보였다. 방법을 물으니 시든 잎은 보기 좋게, 적당히 잘라주고, 라고 하시는데 그 비결이 어디서 많이 듣던 것이다. 시어머니께 맛있는요리 비법을 물을 때마다 하셨던 말씀, “간 보면서 적당히, 맛이 있게” 와 비슷하다. 화분 손질도 요리처럼 관심을 가지고 살피고, 가위를 들고 해보고 또 해봐서 세월로 “적당히”의 지점을 찾아야 하나보다. 사랑이라는 것이 그렇듯이. 사람 대하듯, 나무마다 다르게 돌봐줘야 하는 거다.  

냉면을 좋아하시는 할아버지를 위해 지내시는 동안 당연히 근처의 냉면 집에 모시고 갔다. 나는 냉면 맛, 육수 맛 이라는 걸 잘 몰라서 할아버지와 이 가게 저 가게를 모시고 갈 때마다 이 집 괜찮네, 이 집은 틀렸네 라는 말을 들어도 차이를 알 수가 없었다. 설렁탕을 함께 파는 가게에 가야 고기 육수가 진짜다 라는 일종의 정보를 알고 있는 정도다. 할아버지가 진짜 냉면집은 이런 쇠 젓가락 같은 건 주지 않지, 라는말씀에도 오오오, 그렇군, 하고 납득하면서도 가끔은 “요즘은 다, 그래요” 란 말로 자꾸 할아버지를 설득하려고 한다. ‘맛집’이라고 사람이 바글바글해도 틀렸다, 라고 하시면 괜히 서운해져서 ‘요즘은’을 무기로 맛있는 거라며 설득하곤 했다.

자꾸 ‘옛날에는’ 하고 말씀하시면 심술이 나서 그냥 우리 정성을 좋아해주시면 좋을 텐데 하고 그러는 것이다. 하지만 할아버지와 지내면서 점점 느꼈다. 내가 좋아하는 대로 대접하는 것은 대접하는 것이 아니다. 나무들에게 필요한 것을 살펴서 해주듯이, 누군가를 돌 볼 때는 원하는것이 무엇인지 진지하게 들어야 한다. 나처럼 설득하려고 들지 말고 말이다.  

냉면 맛이란 거, 잘 모르지만ㅡ

그 옛날 msg 덩어리인 크림수프가 최고라고 좋아하는 손주들을 생각해 경양식 집에 꼭꼭 데려가 주신 할머니 할아버지처럼, 내가 냉면 맛을 더 잘 알게 되어도 할아버지가 맛있다는집, 제대로라는 집으로 기쁘게 함께 갈게요.

할아버지가 그러셨던 것처럼,

나도 사랑을 드릴께요

할아버지가 좋아하는 냉면집에 또 같이 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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