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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봉보로봉 Jul 15. 2016

음식사진

사진을 구호품삼아 나를 달랜다


사진 앨범을 보는 것을 좋아한다. 가히 취미라고 할만하다. 방과 거실에 현상한 사진을 잔뜩 붙여놓고서 보고 또 본다. 벌써부터 추억으로 살면 안 되는데 사진들을 보고 있으면 참으로 좋아서 한 없이 바라보고 있다.


붙여놓은 사진 중에는 음식 사진도 있다. 여행 중에 먹었던 예쁘고 맛있던 요리와, 같이 여행간 사람들과 그 시간이 좋았던 곳의 음식 사진도 있다. 사진기로 찍은 것도 있고 휴대폰으로 찍은 것도 있어 화질도 제멋대로이고 뭐 대단하게 멋진 것도 아니지만 내가볼 거니까 상관없다고 여기고 현상해서 붙여놓는다.


요즘은 인스터그램같은 SNS에 먹으면서 바로 올리고, 수시로 답글과 좋아요를 확인하면서 감상을 나누기도 하지만, 나는 그것과는 별도로 여행을 마치면 꼭 사진을 현상해서 앨범을 만들고 꺼내보고 붙이고 (씹고 뜯고 맛보고) 즐기는 시간을 갖는다.


최승자 시인은 청춘 이후로는 그리움이 유일한 정신적 구호품이라 했다. 겨우 일주일 지낸 파리, 처음 만난 사람들, 잠깐 스쳐간 도시, 이런 것들이 그리울 리 없다. 그립다고 생각한다면 참으로 가볍고 얇팍한 감상이라 부끄럽기까지 한데, 그런데도 그리움 비슷한 것을 느낀다.


여행 중 일주일 동안 파리에 있었다. 런던에서는 친구 나오코의 집에 머물렀고, 파리에서는 호텔이 아닌 아파트를 렌트했다. 주인은 내 나이대의 여자로 웹 디자인 관련한 회사에 다닌다고 했다. 그녀는 근처에 집이 하나 더 있었고, 이 아파트에서는 작은 방을 사용했다. 내가 큰 방과 욕실, 주방을 사용할수 있었다. 주인은 문을 열어준 날을 제외하고 한 번 정도 들렀다. 창문을 열면 무채색의 다른 집 지붕이 보인다. 내가 머무는 집은 4층이다. 엘리베이터는 두 사람이 들어가면 꽉 찰 만큼 작았다. 호텔 룸 키가 아닌 열쇠고리가 달랑거리는 열쇠로 문을 잠그고 문 앞에서 마주친 이웃집 사람과 쑥스럽게 봉쥬흐 라고 인사도 건넸다. 파리 여행을 시작하는 토, 일요일은 나오코가 함께 와서 지냈고, 월요일 오후 늦게 동생이 왔다. 일요일 밤 혼자 잠든 나는 월요일아침 느지막이 일어나 동네를 한 바퀴 돌고 슈퍼마켓에 다녀왔다. 공원은 쥐죽은 듯이 고요하다. 도착한 토요일에는 장이 서서 정말 북적거렸는데, 월요일인 오늘은 전혀 다른 공간이다. 둘 다 볼수 있어서 여행자로서는 운이 좋았다고 생각했다.


와인은 물만큼 싸고 보라색이 아닌 초록색 자두가 있다. 다 먹을 수 있을지 모르면서 자두 한 바구니와 믹스 커피, 냉장 포장된 파스타,lorina라고 써있는 병에 담긴 레모네이드, 복숭아 맛 요거트와 본마망의 시트론 타르트를 사서 돌아왔다. 동생이 도착하는 저녁까지 돌아다니지 않고 방에서 뒹굴 생각이다. 침대에서 책도 읽고, 부엌에서 주인이 마련해 둔 차도 타 마셨다.

방에는 파란색 책장이 있다. 그 위에 오늘 장 본 것들을 올려놓고 사진을 찍었다. 그 사진은 지금 책상 앞에 붙어 있다. 동생이온 후로는 아침에 나가서 밤에 들어왔기 때문에 거의 밖에서 식사를 했다. 모처럼 아파트를 빌렸는데 이렇게 멍하게 창 밖을 보고 있는다든지, 장을 봐서 냉장고에도 넣어 둔다던 지, 차를 타서 마시고 뒹굴 거리는 것은 이날 반나절뿐이었다. 파란색 책장위에 놓고 찍은 것들을 볼 때마다 기분이 좋아진다. 지인이 튀니지에서 기념으로 사다 준 대문 모양 거울도 파란색인데, 사진 속 책장의 파란색도 그렇고 흔히 쓰는 파란색이 아니라서 (대문이고 책장이고 여기서는 통으로 칠하는 색이 아니라서) 이국적으로보인다. 슬렁슬렁 돌아다니던 주택가와, 마트에서 라벨과 포장을 구경하는것 만으로도 즐거웠던 오전 전부가 되살아난다. 사진을 보면서 껌의 단물이 빠질 때까지 씹듯, 나는 그것을 구호품 삼아 나를 달랜다.


초록색 자두는 굉장히 달았다. 설익어서 초록색이 아니라 익은 색이 초록이라는 것이 신기했다. 도착한 동생이 가고 싶다고 표시해온 식당 두 군데 중 한군데는 그저 그랬고, 한군데는 맛도 가격도 좋고 식당이 있던 곳의 골목도 참 예뻤다. 첫번째 식당에 다녀온 후, “그러니까 애써 찾아가봤자야” 라고 핀잔을 주었던 나는 두 번째 가게에서는 “오기 잘했네” 그랬다. 두 군데 모두 사진을 찍어 두었다.    


우리가 조잘거리던 이야기들은 모두 날아가고 그 대신에 사진이 내 책상 앞에 걸려 있다. 멋진 풍경과 함께 서로를 찍어 준 것도 있지만, 꽤 많은 사진들의 프레임 안의 우리는 손에 아이스크림을, 크레페를, 커피를, 와인을 들고 있고, 국수를, 키슈를, 스테이크를 입으로 가져가고 있다. 사진 속에는 아주 종종, 우리가 먹은 것들이 주인공인양 우리 자신보다 가운데에서 스포트라이트를 받고 있다.   


벌써부터 추억으로 살면 안 되는데,

사진들을 보고 있으면 참으로 좋아, 한 없이 바라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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