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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싱클레어 Aug 03. 2024

망각의 기능

어떤 기억은 잊고 싶어 할수록 선명해진다

기억이 서서히 흐려지며 산화되는 것이 슬프고 못내 아쉬워서 잊히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분명 어떤 기억들은 끌어안고 있고만 싶다. 잊지 않고 오래도록 간직하고 싶은 그런 추억들.


반대로 잊고 싶어도 잊히지 않는 기억들도 있다. 나는 아쉽게도 할머니만큼 좋은 두뇌를 이어받지 못해서 한 번의 경험만으로 모든 걸 체득하여 내 것으로 만들진 못한다. 잘하는 것보다 못하는 게 너무 많고 암기력도 썩 좋지 않다.


그런데도 남들에 비해 사소한 일을 잘 기억하는 건 몇 안 되는 소질 중 하나였다. 물론 내세울 수 있는 정도는 아니지만 일부 사람들에 비해 기억의 유통기한이 약간 더 길었던 경우가 종종 있다 보니 그냥 그런 셈 치게 된 것이다. 


나 정도는 대다수가 가지고 있는 능력일 수도 있다. 자랑할만한 것도 아니고 매체에서의 생애 모든 기억 트럼프 카드를 배치 순서를 전부 암기하는 그런 희귀한 케이스는 전혀 아니었다. 심지어 슬프게도 영단어나 용어 등, 공부에 필요한 기억력은 좋지 않은 편이다.


이런 점은 내게 좋은 점도 있었지만 안 좋은 점들도 많았다. 사소한 실수, 내가 받은 상처와 아픔, 또는 내가 남에게 한 잘못들이 뇌리에 잊히지 않고 쌓이고 쌓여 점점 무거운 탑을 쌓아갔다.


마음속에 무언가 콱 얹혀있는 느낌. 꼭꼭 씹어 꾸역꾸역 삼키려 해도 목이 메어 넘어가지 않고 숨통을 조여 온다. 답답함과 구역감이 해소되지 못하고 내 몸 장기들을 눌러 밟는다.


정신의 고삐를 쥔 채 달려 나가야 할 때 발목을 붙잡고 정체되게 만드는 그 기억들은, 잊어보려 도망쳐도 같은 자리로 돌아오게 만드는 주술이라도 걸린 듯하다.


과거는 과거대로 흘러가게 남겨둬야 한다는 걸 머리로는 알지만, 현재의 내게 영향을 주는 것들이 과거에 머물러 있어 가끔씩 숨을 참고 깊은 심연으로 들어가게 될 때가 있다.


심연 속 나는 지금보다 어리고 미숙하다. 그곳에 사는 사람들 모두 지금보다 젊은 생명력을 띤다. 때로는 다시 돌아가고 싶다고 느끼게 될 정도로.


최초의 기억은 엄마 등의 포근한 감촉과 땅에서부터의 높이감을 느끼는 나의 감각이다. 더 나아간 다음 기억은 장난감을 뚫어져라 쳐다보고 움직여보는 나의 시선, 한글을 읽기 시작하는 어린 목소리.


다음 기억은 어린이집을 가기 싫어하는 나, 그리고 선생님께 큰 소리로 이름을 불리며 혼나서 내 이름이 싫어졌던 기억, 발표회 때 무대를 올라가다 미끄러운 바닥에 넘어져 웃음거리가 됐지만 창피함과 긴장감을 참고 끝까지 혼자 시를 낭송해야 했던 나를 불편하게 하는 것들 투성이던 어린이집.


고모 댁에 놀러 갔다가 사촌 오빠의 심한 장난 때문에 머리를 콘크리트 바닥에 세게 부딪혔던 날. 잠시간 눈앞이 새하얗게 안 보이고 아무런 생각도 나지 않던 매우 어지럽고도 혼란스러웠던 감각.

상황을 키우고 싶지 않아 울지 않고 참은 탓에 병원에 가지 않아 함몰된 채 남게 된 내 뒤통수. 그리고 그 뒤로 꾸준히 찾아온 두통, 불안과 불면증.


혼날 때마다 머리가 멍해지며 땅이 흔들거리는 것처럼 느껴지던 느낌. 무서워서 눈물이 멈추지 않고 흐르고 할 말이 많았지만 꺼내지 못하고 삭히고만 있던 마음속 피어난 발칙한 반항심.


결국 어느 시점부터는  화를 쏟아내며 버릇없게 앞뒤 안 가리고 상처되는 말들을 부모님께 하고 만다. 그러나 밖에서는 당연히 해야 할 말조차 한 번 제대로 못 하고 참고 또 참기만 해서 손해를 보기도 하고, 답답한 아이로 여겨진 아이러니.


이사 오기 전 초등학교의  단짝 친구와의 소중한 기억, 전학 온 뒤 마주한 달라진 동네 분위기와 겉도는 내 모습. 그리고 원치 않게 질 나쁜 친구를 만나며 인생을 소모했던 시기를 통해 훗날 자기혐오와 자괴감에 빠지게 된 학생시절까지.


요즘에 와서는 오랜 우울과 방황으로 뇌기능이 저하된 탓인지 예전만큼 장소와 상황에 대한 기억이 좋지 못하지만 어릴 적 기억들은 왠지 잊히지 않았다.


지금까지의 기억들 중에서도 좋은 것도 분명 있었지만, 왜인지 나쁜 기억들만 뇌리에 깊게 남는 것 같다. 10년이 더 된 기억이 날 괴롭혀 죄책감을 느끼게 하고, 나를 이 세상에서 가장 쓸모없고 못된 사람으로 만든다.


어떤 미숙함은 남에게 피해를 주고 나 자신도 그로 인해 상처 입는다. 더 똑똑하지 못해서, 더 강단 있지 못해서, 더 현명하지 못해서, 더 사교적이지 못해서, 더 착하지 못해서, 더 잘하지 못해서...


여러 가지 결핍들에 대해 내가 더 하지 못했거나 갖지 못했기 때문인 것만 같아서 '더 -한'을 채우는 단어들의 반대말이 전부 나 같기만 해서, 어쩐지 나는 영영 그런 사람이 되지 못할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던 것이다.


내가 되고 싶은 이상적인 면모와 능력을 지닌 주변인을 보면 부럽고 추켜세우기 바쁘다. 그러면 그럴수록 질투심과 열등감은 더욱 짙어진다.

그리고 이내 자책과 자괴감, 부모님에 대한 죄송함과 나 자신에 대해 인생을 좀 더 잘 살아내지 않았다는 것에 대한 질책 아닌 질책을 하게 된다. 이럴수록 원하는 방향과는 점점 더 멀어진다는 것을 눈치채지도 못한 채 상황은 악화되어가기만 했다.


자신의 의지가 반영되었든 의도치 않게 남에 의해하게 되었든 간에 결국 나 자신이 한 일이라는 것이, 결국 내 인생이 흘러 흘러 온 것이 지금 이 모습, 이 상황이라는 것이 못내 아쉽고 한스럽게 느껴지는 것이다.


이렇게 밖에 할 수 없었니? 다른 선택지도 있었잖아. 다르게 살아볼 수 있었잖아. 이런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종국엔 현실을 도피하기 시작한다.


 "넌 그걸 아직도 기억하고 있냐. 이젠 좀 잊어라"라는 말. 나도 정말 하고 싶지만 쉽지 않은 망각, 뇌의 가지가 어떻게 뻗어 나가느냐에 따라 생각의 흐름이 프로그래밍된다는데 나는 코딩이 잘못된 채 출시된 불량 휴머노이드처럼 살고 있는 듯하다.


뇌가 성장하는 학령기 때 너무 공부를 게을리하고 자극적인 미디어만 본 탓일까? 우울과 불안은 내가 이뤄놓은 것이 없고 망상에만 젖은 탓일까? 이미 글러먹은 뇌라면 이를 되살릴 방법을 찾아 뭐든 해보고 싶다.


망각은 때론 슬프지만 잘만 기능하면 내면의 평정을 유지시켜 준다고 생각한다. 너무 많은 걸 동시에 생각하면 어느 것 하나도 제대로 해내기 어렵고, 실패와 좌절로 인한 절망감과 후회를 남기는 것 같다.


어떤 문제는 복잡하게 보기보단 간단명료하게 생각했을 때 쉽게 풀린다. 이때 망각은 너무 심각하거나 얽매여 머뭇거리지 않게 돕는다.


인생 전반이나 생명유지에 꼭 필요한 것이 아니라면, 고통스러운 기억과 아픔은 고이고이 담고 있는 것보다 날려 보내는 것이 좋다. 알면서도 내가 붙잡고 있는 건지 그냥 잊히지 않는 건지 쉽지가 않다.


눈치나 할 일을 잘하는 것과 단순하게 일을 바라보는 것과는 다른 문제로, 가끔은 좀 더 단순하게 살아가는 게 더 정신건강에 유익하고 행복에 가까울 거라고 짐작해 본다.


망각은 내가 있는 현재와 현실을 보다 선명하게 바라볼 수 있게 하는 기능을 갖는다. 인간의 기억도 컴퓨터처럼 코어 기억만 남긴 채 필요 없는 건 지울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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