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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자이너는 자주 실망하는 사람이다

여전히 기대하고 있기 때문

by 김태길

디자이너로 일하다 보면 자주 실망하게 된다. 그건 누가 잘못해서 생기는 일이라기보다, 일의 구조가 본래 그렇게 되어 있기 때문이다. 한 번 정리된 화면은 다음 주에 다시 수정되고, ‘이제 확정이에요’라는 말은 며칠 지나지 않아 바뀌며, ‘이건 마지막 수정이에요’라는 문장은 대체로 마지막이 아니다. 이런 일들은 매번 반복되지만, 이상하게도 그때마다 마음이 조금씩 흔들린다. 익숙해졌다고 생각하면서도, 매번 새삼스럽게 실망하게 되는 건 어쩌면 이 일을 계속 하겠다고 선택한 사람들의 숙명 같은 것이다.


기획안을 처음 받았을 때는 늘 희망이 있다. “이번엔 사용자 흐름이 명확해요.” “이번엔 수정이 많지 않을 거예요.” 그 말들을 들으면 잠시 마음이 가벼워진다. 이번엔 덜 바쁠 거라고, 이번엔 파일이 깔끔하게 유지될 거라고, 이번엔 폰트가 바뀌지 않을 거라고, 그런 근거 없는 낙관이 생긴다. 하지만 대부분의 경우 그 희망은 오래가지 않는다. 새로운 요구가 생기고, 일정은 앞당겨지고, ‘급하게 수정 하나만’이라는 말이 반복된다. 피그마를 열고 또 닫는 사이, 수정 기록이 늘어나고, 그중 절반은 이유조차 명확하지 않다. 그러면서도 매번 기대를 접지 못하는 건, 이상하게도 그 과정이 완전히 싫지는 않기 때문이다.


회의는 언제나 조용히 시작된다. “이 부분은 조금 더 직관적으로 바꾸면 좋을 것 같아요.” 그 말이 나오면 잠시 멈칫하게 된다. 직관이라는 단어는 언제 들어도 어렵다. 모두가 직관적이길 바라지만, 그 기준은 사람마다 다르다. 어떤 사람은 컬러를 보고, 어떤 사람은 동선을 보고, 또 어떤 사람은 그냥 그렇게 느낀다고 말한다. 그럴 때면 잠시 머릿속이 복잡해진다. ‘내가 만든 건 직관적이지 않은 걸까’라는 질문이 스스로에게 돌아오고, 그다음엔 어김없이 파일을 열어 다시 정렬을 시작한다. 그렇게 다시 정리하고, 수정하고, 덜어내는 과정 속에서 조금씩 실망이 쌓인다. 하지만 동시에, 이번엔 다를 거라는 작은 기대가 또 생긴다.


가끔은 그 기대가 나 자신을 향하기도 한다. 어떤 날은 화면이 마음에 들지 않고, 어떤 날은 아무리 봐도 개선점이 떠오르지 않는다. 그럴 땐 잠시 피그마를 닫고 싶어진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마우스를 움직이게 된다. ‘이건 그래도 맞춰야지’ 하면서, 조용히 정렬 버튼을 누른다. 디자이너는 결국 자기 자신에게도 기대를 한다. 완벽해야 한다는 강박과, 그걸 지키지 못했을 때의 실망을 동시에 안고 산다. 그래서 종종 스스로에게 실망하면서도, 다음 화면을 열어 새로운 시도를 한다.


결국 실망은 일의 일부다. 오히려 그것이 이 일을 계속하게 만드는 동력인지도 모르겠다. 기대가 없으면 실망도 없고, 실망이 없으면 다음 시도도 없기 때문이다. 어쩌면 디자이너는 계속해서 실망하면서 앞으로 나아가는 사람일지도 모른다. 이 일이 결국 완성되지 않는다는 걸 알고 있으면서도, 다음 버전이 조금 더 나아질 거라 믿기 때문이다. 그래서 오늘도 피그마를 연다. 그리고 또, 조금 실망할 준비를 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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