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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처니 Jun 01. 2024

규칙과 규율 포용과 격려

알잖아요. 아이는 텍스트대로 자라지 않는다는 걸.

 “기상! 기상! 우혁아 일어나!”

준비해 놓은 사과 한 조각을 들고 부산을 떨며 아이의 방으로 입장한다.


 이미 새벽부터 큰 아이의 수월한 1차 등교를 마친 상태다. 이제 난이도 ‘상’인 이 아이의 무사한 등교를 위해 임무를 수행해야 한다.      


 6년 전, 우혁이가 9살이 되던 해에 머리를 여는 두 번의 수술을 했다. 뇌가 어느 정도 안정화될 때까지의 약 5년이라는 시간 동안 너랑 나, 우리 가족은 지독하게 고독하고도 불안했다. 여러 합병증으로 대학병원으로 협진을 오가는 중엔 아이와 데이트도 많이 했다. 울며 웃기 달인의 태연함으로 아이 앞에서 늘 오버쟁이를 자처했던 나지만, 병원 일정을 마치고 아이와 데이트를 즐기는 그 시간만큼은 묵묵히 제 할 일을 하고 있을, 이제 막 11살을 맞이한 큰 아이가 자꾸 눈앞에 어른거렸다. 큰 아이의 간식을 챙겨 돌아오는 것으로 위안을 삼는 일은 이때부터 시작 된 것 같다.


 아이는 입속으로 훅 들어온 사과를 설겅설겅 씹으며 잠에서 깨어난다. 아닌 척 쿨하게 아이를 깨우지만 내게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사실은 그렇지 않은 아침이다. 우선 신속하게 아이의 몸짓을 살핀다. 이 아이의 아침 상태에 따라 오늘 내 일정을 진행해도 될지 안 될지 정해지기 때문이다. 다행히 표정과 몸짓에 꾀가 없어 보인다.      


 아이가 개두술을 한 후 만 5년이 넘어가면서부터 빈번하던 아침 두통이 다행히도 줄어들었다. 그래도 아이를 깨우는 아침엔 여전히 불안한 마음이다. 분명 꾀병을 부린 날도 있고, 내가 아이의 상태를 잘 못 읽어 내몰 듯 등교 시켰다가 토하고 온갖 고생을 한 후에야 돌아오게 만든 경우가 허다했다.


 헛다리짚어 아이를 의심하는 실수를 저지르고 자책하고 싶지 않지만 앞으로도 종종 헛다리는 짚게 되겠지. 이제는 중 2인 자체로, 자주 눈을 내리깔며 까칠한 태세를 취하는 일도 빈번하다. 눈을 내리깐 네가 아직 아기상이라는 걸 너는 모르는 것 같다.     


 아이의 상태에 따라 내 일정을 취소해야 했던 일들을 기억하며 숙제하듯 미안한 마음을 갚아볼까 생각하다 이내 생각을 접고 마는 일은 내게 자주 반복되는 일상이다. 불안하게 미안함을 갚으려 애쓰기보다 한결 마음 편한 대기조를 자처한다. 우선순위. 지금 필요한 건 뭐? 바로 우선순위다. 단연 1위는 아이다.


 아이가 학교에 등교한 후 청소기를 돌리면서도 한결같이 핸드폰은 바지 주머니에서 대기 중이다. 시끄러운 청소기 소리가 전화벨 소리를 집어삼킬세라, 이 몸뚱이를 휘감고 있는 두툼한 지방이 진동의 느낌마저도 차단할세라 불안해할 바에야 그냥 손에 움켜쥐고 불편한 청소를 한다.     


 사람이 마음이 편해야지.

 언제 걸려올지 모를 두려운 전화를 받아야 하기에 폰을 손에 쥐고 있는 게 낫다며 쿨한척하는 나는 사실, 여전히 불안하다. 9살이 된 아이가 당연히 뛰었을 때, 축구를 좋아할 때 혼내는 몹쓸 엄마가 되어 눈물을 삼키며 그림자처럼 따라다니던 시절과 비할 수 없는 또 다른 종류의 불안함이다.         


 아침에는 등교와 출근으로 모든 길이 바쁘고 부산스럽다. 9시가 되면 비로소 우리 집 반려견 포도와 치이지 않는 아침 산책을 할 수 있다. 모두가 각자의 자리로 돌아간 동네는 한산해진다. 궁둥이를 실룩거리며 걷고 있는 사랑스러운 포도를 바라보며 미소 짓는다. 나도 모르는 사이 촉각은 주머니 속 핸드폰을 향해 있어 불안하지만, 동시에 한산함을 느낄 수 있는 이 짧은 시간이 무척이나 행복하다.      


 간절히, 그리고 간신히 이어가고 있는 내 일에 대하여 처리할 일이 남아 있어 노트북을 열었다. 커피도 한 잔 탔다. 하필 9시 50분이다. 왜 지금 시계를 본 걸까. 못 봤다. 못 봤다 치자. 화장실에서 볼일만 봐도 몇 분은 훅 지나가던데 왜 내가 본 9시 50분에서는 바늘이 멈춰 있는건지 너의 쉬는 시간이 내겐 공포의 시간이 되어 웃프다.     


 익숙한 담임선생님 전화에 의도치 않은 심호흡은 알아서 내 몸을 가다듬어 주었다. “엄마, 나 1교시부터 머리가 아프고 힘들어.” 아이의 말에 짜증과 걱정이 동반한다. 헛다리를 짚고 싶었는지도 모를 한계로 인해, 아이 얼굴에 핏줄이 터질 때까지 토를 하고서야 잠들게 만들고 자책했던 사람이 바로 나임을 잊지 않기 위해 온 감각으로 파악하려 애쓴다. 오늘 학교에서 특별하게 할 일이 있는지 묻고, 선생님께 말씀드리도록 했다. 이내 수화기는 선생님에게로 넘겨졌다. “아이를 조퇴 시켜주시면 집에서 쉬도록 할게요.”      


 “정신적인 문제야? 신체적인 문제야?” 조퇴하고 돌아온 아이에게 물었다. 1교시 도중 화장실에 가서 토했다는 얘기에는 더 이상 추문하지 않았다. 헛다리짚은 나의 추궁으로 아이를 더 아프게 괴롭힌 엄마로서 아이의 말이 비록 거짓일지라도 아이는 지금 그 어떤 문제로든 힘든 날을 버티고 있다는 걸 잊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중학생이 된 이후로 수학, 과학은 무슨 말인지 이해할 수 없고, 다른 과목은 그나마 이해가 된다는 아이다. 시간을 때우듯 앉아 있는 아이는 수학 선생님의 제안으로 종이접기를 했다. 많은 중 2의 눈에 비친 이 아이는 부족한 문제아였으며, 무언의 감각으로 느꼈을 본인 또한 종이접기가 잘 되었을 리 없다. 몇 차례 도전했던 영어, 수학 학원 실패로, 비록 내가 매일 확인하지 않으면 건드리지도 않는 문제집이지만, 아이 수준에 맞는 문제집을 따로 준비했었다. 아이가 집에서 풀던 문제집을 학교에 가져와 수업 시간에 풀면 좋겠다고 신경 쓰신 담임선생님의 의견에 처음으로 동의하며 감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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