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은 의미다 - 177
‘辛(매울 신)’은 ‘손잡이가 달린 큰 바늘’ 모양에서 따온 글자로, 사람의 몸에 글자나 그림의 문신을 새길 때 쓰는 물건이다. 사람의 몸에 바늘로 찔러 먹물을 입히는 문신의 과정에서 그 감각을 상상해 보면 ‘괴롭다’, ‘고생하다’의 뜻이 나온다. 온갖 어려운 고비를 겪으며 심한 고생을 하는 것을 나타내는 “천신만고(千辛萬苦)”가 바로 그것이다. 작은 바늘(辛)이 우리의 혀나 피부를 찌르는 통증이 바로 매운맛이다. 현대 과학은 매운맛은 미각이 아니라 통각이라는 사실을 밝혀냈는데 옛사람은 매운맛이 맛이 아니라 통증이라는 사실을 이미 알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신체에서 맛을 감지하는 미각은 혀에 집중되어 있다. 혀에서 감지하는 맛에 대한 기본 감각에는 단맛·짠맛·신맛·쓴맛의 4가지다. 우리가 느끼는 매운맛은 혀의 온점과 냉점에서 전달하는 열감과 통점에서 전달하는 고통이다. 쉽게 말하면 일반적으로 혀에서 느끼는 미각과 달리 촉각의 일종(통증)으로 실재하는 맛이 아니다. 다만 매운 식재료의 성분이 다른 맛까지 함께 가지고 있어 매운맛이 따로 존재하는 것처럼 인식하는 것이다. 매운맛이 촉각에 의한 통증이라는 사실은 맛을 감지하는 혀 말고도 입술이 얼얼하고 입안이 화끈거린다든지, 연약한 피부에 닿으면 따끔거리는 현상으로 일반인도 쉽게 알 수 있다.
매운맛의 종류는 통각의 온점에 작용하는 휘발성 매운맛과 비휘발성 매운맛, 냉점에 작용하는 차가운 매운맛으로 나눈다. 휘발성 매운맛은 알싸하다고 느끼는 맛으로 오래 지속되지 않는다. 대표적으로 마늘과 양파, 고추냉이와 겨자가 있다. 비휘발성 매운맛은 매운맛 하면 대표적으로 떠오르는 얼큰하다고 여기는 맛이다. 매운 물질이 혀에서 사라져도 매운맛이 혀에 남아 상당히 오래 지속되는 게 특징이다. 대표적으로 고추, 후추, 산초, 생강 등이 있다. 차가운 매운맛은 ‘화하다’라고 하는 맛으로 우리는 매운맛이 아니라고 느끼는 맛이다. 대표적으로 박하, 쑥, 녹나무 등이 있는데 박하 향 입욕제를 넣은 욕조에 들어가면 뜨거워도 차갑게 느껴지는 것은 매운맛은 피부로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캡사이신 등에 의한 매운맛은 열감에 의한 통각(痛覺)으로 계속 접하면 감각기관이 둔해지게 된다. 처음에 맵게 느껴지는 음식도 계속 먹다 보면 덜 맵게 느껴지는 이유다. 또한 매운맛은 통증이기 때문에 여러 음식이 있을 때 처음부터 매운 음식을 먹으면 다음 음식의 맛을 온전히 느끼기 어렵다. 입이나 혀에 상처가 났을 때 매운 것을 먹으면 상처 부위가 굉장히 고통스러운 것은 상처가 나서 아픈 곳을 매운맛으로 통각을 더 자극하기 때문이다. 혀뿐만 아니라 점막이 있는 곳, 연약한 피부 대부분에서 느낄 수 있다. 따라서 고춧가루나 매운 국물이 코나 눈에 들어간다든지, 상처에 닿으면 매우 큰 통증이 온다. 음식을 먹다가 사레가 들려 음식물이 기도로 들어가면 통증을 느끼고 기침하는 이유도 마찬가지다. 통각의 예민한 정도에 따라 매운맛을 거의 못 느끼는 사람이 있지만, 매운 음식을 먹고 위경련을 일으켜 병원에 실려 가는 매운맛에 매우 민감한 사람도 있다. 한편 선천성 무통각증 및 무한증 환자는 매운맛을 전혀 느끼지 못한다고 한다.
매운맛에 대한 일반적인 오해가 매운맛이 위를 자극해 위암과 같은 병을 일으킨다는 것이다. 사실 매운맛은 위장 점막과 소장 벽을 자극해 음식을 빨리 내려가게 해서 수분이 덜 흡수되어 설사하는 이유가 되기도 한다. 지나치게 매운 음식을 과도하게 먹으면 위염, 장염 등 염증을 유발할 수 있으므로 장이 약한 사람은 피하는 게 좋다. 하지만 위암은 매운맛보다 짠맛이 훨씬 큰 원인이다. 실제 매운맛에 가려 짠맛을 덜 느끼게 되어 더 짜게 먹는 것이 문제다.
외국인이 한국 음식을 떠올릴 때 제일 먼저 생각나는 것 또한 매운맛의 김치와 고추장, 마늘이다. 가히 한국을 상징하는 맛이 매운맛이다. 유튜브를 통한 매운맛 챌린지, 불닭볶음면 먹방 등으로 세계인에게 한국인들이 얼마나 매운맛에 열광하는지 보여주고, 이를 넘어서 일부분 K-푸드의 세계화에 앞장서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이렇게 우리뿐만이 아니라 세계인이 매운맛에 중독될 정도로 열광하는 이유는 캡사이신이 우리 몸의 교감신경을 활성화함으로써 엔도르핀 분비를 촉진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매운맛 중독은 일종의 엔도르핀 중독이라는 주장도 있다. 엔도르핀은 통증을 줄여주며 약간의 쾌감을 느끼게 한다. 매운맛은 아드레날린의 분비를 촉진하여 땀을 나게 하면서 개운한 느낌을 들게 해 스트레스 완화에 도움이 되기도 한다. 마라톤 같은 운동에서 느끼는 ‘러너스 하이’와 같은 원리다. 그래서 매운맛을 좋아하면 마조히스트로 오해받기도 한다. 일부 학자들도 이렇게 매운 음식에 열광하는 이유가 정치적․경제적 불안정으로 인한 스트레스를 유발하는 환경이 매운맛을 찾게 하는 원인이란 분석을 하며 실제 스트레스를 받을 때 매운 음식을 먹는 사람이 많다. IMF 사태 이후 한국인의 매운맛 열풍이 더욱 강해졌다는 사실도 같은 이유이다. 흔히 화가 나면 매운 음식이 당기는데 열받을 때 열이 나는 매운 음식으로 달래는 이열치열 효과라 할 수 있다.
매운맛의 척도를 나타내는 ‘스코빌 지수(Scoville scale)’는 미국의 약사 윌버 스코빌(Wilbur Scoville, 1865~1942)이 만들었기에 이름을 딴 것이다. 측정 대상을 설탕물로 얼마나 희석해야 매운맛을 느끼지 못하기 시작하는가를 측정했다. 청양고추는 최대 12,000스코빌인데 청양고추 기름을 12,000배의 설탕물로 희석해야 비로소 매운맛이 느껴지지 않는다는 뜻이다. 순수 캡사이신이 1,500만 스코빌인데 시중에서 판매하는 캡사이신 소스는 약 3만 스코빌로 희석해 가공한 제품이다. 세계에서 가장 매운 고추는 미국의 ‘캐롤라이나 리퍼’라는 고추로 평균 160만 스코빌 정도이다. 우리나라 청양고추의 130배 정도 맵다. 점점 매운맛에 열광하는 대중의 취향에 맞추기 위해 식품회사들은 더 맵게 만드는 추세여서 스코빌 지수를 표기해야 한다는 주장도 있다. 우리 매운맛의 대표 격인 고추장은 2009년부터 5단계로 나눈 지표가 개발되어 사용하고 있다. ‘GHU(Gochujang Hot taste Unit)’를 표준 단위로 하고, 1단계 순한맛(GHU 30 미만)-2단계 덜 매운맛(GHU 30~45 미만)-3단계 보통 매운맛(GHU 45~75 미만)-4단계 매운맛(GHU 75~100 미만)-5단계 매우 매운맛(GHU 100 이상)'으로 표시한다.
비휘발성 매운맛은 매우 오래 지속되므로 이를 빨리 해소하기 위해선 우유나 달걀노른자를 먹으면 좀 쉽게 매운맛이 가신다. 우유나 노른자의 단백질이 매운맛을 녹여서 넘어가기 때문이다. 흰 식빵이나 밥을 오래 씹어도 의외로 매운맛이 쉽게 가라앉는다. 매운맛을 한방에 가라앉히는 최고 좋은 방법은 아이스크림 샌드위치를 이용하는 것이다. 찬 음식이므로 혀의 화끈거림을 감소시켜 주고, 설탕은 매운맛을 희석해 주며, 크림이 캡사이신을 녹이고 빵이 그걸 닦아내 준다. 혹시 매운맛이 눈이나 코를 들어가 자극할 때도 우유로 씻으면 된다. 많은 사람이 물이나 얼음을 찾는데 혀의 열기를 잠깐 가라앉힐 수 있지만 매운맛을 없애주지는 않는다. 캡사이신은 물에 잘 녹지 않기 때문에 일시적인 진정 효과만 줄 뿐 다시 매운맛이 올라온다. 매운 음식을 먹기 전에 우유를 미리 한 잔 마시고 먹으면 위장을 단백질로 코팅해 구토 유발을 막을 수 있다.
매운맛 채소의 원조인 고추는 멕시코가 원산지로 17세기 초에 우리나라에 들어왔다. 여름에 흰색의 꽃이 피고 열매가 익으면 붉은색이 된다. 고추에는 비타민C, 비타민A, 비타민 B6, 비타민E 등의 비타민과 염소, 칼슘, 칼륨, 철 등의 미네랄이 풍부한 영양소가 들어 있고, 다이어트, 항산화 작용, 항암효과, 식욕 증진, 스트레스 해소, 감기 예방, 비만 예방, 시력 보호 등의 효능이 있다. 특히 다수의 연구에 의하면 면역력 강화, 혈관 건강, 치매 예방을 통한 노화 방지 효과도 있는 것으로 밝혀지고 있다. 매운맛으로 살균 효과와 오래 보존할 수 있지만, 매운맛의 자극으로 인해 상태가 조금 나쁜 식재료들의 나쁜 맛도 덮어줄 수 있다. 너무 매운맛의 음식은 재료의 신선도를 감지하기 어렵다는 말이다. 사실 매운맛이 심하면 음식에 들어가는 재료 특유의 맛을 가리고, 조미료 등을 첨가하여 음식의 허접함을 숨길 수 있다.
중국 매운 음식의 대표 격인 마라탕은 한자로 ‘麻辣燙’이라 쓰는데 가운데 辣(매울 랄)을 쓴다. 글자 왼쪽에 辛이 있다. 또한 맵다라는 말을 중복하여 강조한 ‘신랄(辛辣)’은 글자의 뜻은 ‘맛이 아주 맵다’라는 뜻이지만, ‘신랄하게 비판하다.’와 같이 ‘사물의 분석이나 비평 따위가 아주 날카롭고 예리하다’라는 뜻으로 더 많이 쓰인다. 특정 분야에서 기존 인물보다 더욱 강경한 인물 또는 독설이나 다름없는 비평을 빗대어 ‘매운맛’이라고 비유한다. ‘인생은 매운맛’이라고 표현하면 ‘인생의 어려움 높다’라는 뜻이다.
진짜 매운맛보다 인생의 매운맛이 더 견디기 어려운 게 사실이다. ‘작은 고추가 맵다.’라는 말은 고추에 해당하는 말이지만 우리에게 더 필요한 말이다. 세상을 좀 더 맵싸하게 사시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