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193. ‘비밀(秘密)’의 의미

삶은 의미다 - 193

by 오석연

양복 깃을 올려 목과 얼굴을 살짝 가린 여자는 아름답다/머리카락을 늘어뜨려 이마와 두 뺨을 가린 여자도 아름답다/나는 엿보이고 싶다/나는 엿보고도 싶다/비밀은 언제나 아름답다/ - 詩 『비밀』 중 -


‘비밀(祕密)’‘어떠한 일을 남에게 공개하지 않는 것’으로 남에게는 알려서는 안 되거나 드러내지 않아야 할 일, 밝혀지지 않았거나 알려지지 않은 속내 등을 말한다. ‘祕密’의 한자 속에는 두 글자 모두에 ‘必(반드시 필)’자가 있다는 것인데, 이는 ‘반드시(꼭) 지켜져야 한다’라는 의미가 담겨 있겠으나 이 세상에 영원히 지켜지는 비밀이 있기는 한 건가?

비밀과 함께 자주 쓰이는 말로 ‘기밀(機密)’이 있는데, 기밀은 공적(公的)일 때에 비밀은 사적(私的)일 때에 사용된다. 또 ‘공공연한 비밀(Open Secret)’이란 말도 있는데, 이는 비밀의 주체들은 철석같이 비밀이라고 생각하고 있지만 사실 주변의 많은 사람이 언급하지 않을 뿐 대체로 알고 있는 경우를 말한다. 혼자만 비밀이라고 생각하여 꼭꼭 숨기고 있는 형국이다.

일반적으로 비밀의 목적은 남들이 몰랐으면 하는 것이다. 다만 비밀의 기준이 설정하는 개인의 마음이기 때문에 남들이 이해하지 못하는 비밀도 종종 있다. 특히 개인들은 대체로 자신의 치부가 밝혀지면 남에게 안 좋은 이미지를 살 수 있어 비밀로 삼곤 한다. 상대가 알면 자신에게 손해가 될 수 있어 비밀로 해 두는 것이기에 자신의 이익을 위해 비밀이 존재하는 셈이다. 우리가 자주 금융 거래 또는 온라인을 활용하기 위해서 아이디를 만들고 ‘비밀번호’를 만들어 혼자만 알고 있는 것도 사소해 보이지만 매우 중요한 정보이며 철저하게 숨기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오히려 다른 사람의 개인정보 비밀을 알아내려고 가족으로 속여 말(詐稱)하거나 해킹하는 것은 중대한 범죄행위이다.

시쳇말 농담으로 남자들이 가장 좋아하는 여자는 ‘새 여자’라는 말이 있다. 유머로 하는 이야기지만 ‘새 여자’라는 말 속에 숨어 있는 깊은 뜻은 베일에 싸여 있는 ‘비밀의 여자’라는 말이다. 시몬 드 보부아르도 『제2의 성』에서 ‘여자를 손이 닿지 않는 먼 곳에 있는 공주처럼 열렬히 사랑하기 위해서는, 여자가 비밀에 싸인 체 미지의 상태로 있어야 한다.’라고 했다. 그렇기에 남자들은 여자가 자기만의 것이기를 원하면서도 한편으론 낯선 여인으로 있기를 바라는 이중의 요구를 하는 것이다. 하지만 늘 비밀의 낯선 여인이면서도 나만의 여인이 될 수 있는 여자는 세상에 없다는 것이 남자들이 극복할 수 없는 비극이 아닐까.

비밀은 당연히 사람들이 모르고 있어야 하는 것이지만, 비밀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누군가에게 알리고 싶어 하는 욕구가 동시에 꿈틀거린다. ‘남들이 모르는 걸 특별히 너한테만 가르쳐준다’라는 욕구가 강하기 때문에 늘 소문으로 퍼져나가곤 한다. 친한 사람에게 말할 때 “이건 비밀이고 너한테만 말하는 거야”라며 은밀하게 말을 건네지만, 이미 ‘세상은 다 아는데 너만 모르기 때문에 말해주는 거야’라는 말과 같다. 누군가의 입을 통해 들은 은밀한 말들은 이미 비밀이라는 영역에서 벗어난 것이라 이해하면 편할 것이다.

비밀은 사람과 사람 사이, 혹은 사람과 세상 사이에 강력한 힘을 발휘하기도 한다. 비밀은 사람들의 호기심을 자극해 알려지지 않은 무언가는 상상력을 불러일으키고, 그걸 알아내고 싶은 욕망을 부추기는 힘을 가지고 있다. 쉽게 말해 잘 간직된 비밀은 이야기나 관계에 신비로움을 더해 사람들을 끌어당긴다. 또한 비밀을 가진 사람이 권력을 쥐는 경우도 흔하다. 특정 정보를 공유하거나 숨김으로써 상황을 주도적으로 조종할 수 있어 정치, 경제 및 비즈니스, 심지어 개인 관계에서도 비밀은 전략적 도구로 사용된다.

이 외에도 사람들의 마음을 여는 마법에 가까운 비밀의 말을 이용해 뭇사람들을 현혹하기도 한다. 특히 사기꾼들이 많이 사용하는 말이지만, 일반인들도 심심찮게 상대의 마음을 얻기 위해 십분 활용한다. 상인들이 고객의 귀를 잡기 위해 ‘이건 사실 말하면 안 되는데~’로 시작해서, ‘몇 분만 아시는 건데~’라고 독점과 특권의식을 자극하는 말, 친구 사이에 ‘너한테만 말하지만~’, 차별화를 각인시키기 위해 ‘다른 곳에서는 절대~’, 진정성을 망설임으로 표현하는 ‘말해야 할지 모르겠지만~’ 등의 표현이 대표적이다. 이런 말들이 사실 진짜 이야기라면 좋겠지만, 대부분 가짜 이야기일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 문제다. 하지만 무작정 믿었다가 속고 난 후에 가짜 이야기는 들통나고 상대의 신뢰를 잃게 된다. 세상을 살아가면서 한 번쯤 의심해 보는 습관도 도움이 될 듯.

일반적으로 비밀을 공유한다는 것은 끈끈한 유대관계를 유지한다고 생각한다. 비밀을 공유하면 사람들 사이에 특별한 유대가 생겨. ‘너만 아는 거야’라는 말 한마디가 신뢰와 친밀감을 깊게 만든다. 학창 시절 ‘우린 친구니까 너한테만 말하는 거야. 진짜 우리끼리만 알아야 해’라면서 별것도 아닌 이야기를 거창한 비밀처럼 친구와 공유했던 경험이 누구나 있을 것이다. 돌이켜보면 시시콜콜하고 대수롭지 않았던 것들이었고 귀여운 비밀이랄까. 비밀을 앞세운 친근함의 과시랄까. 다시 올 수 없는 귀여운 시절이 그립다. 하여튼 사회에 나와서도 사소한 비밀을 공유거나 특별한 정보라도 주는 직장 동료가 있다면 특별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이렇게 별것도 아닌 것이, 아주 사소한 것도 비밀이 되는 순간 특별하고 신비한 것으로 바뀐다. 비밀 자체가 신비롭게 만들고 놀랄 만하게 해주는 비법이기 때문이다. 그래 사람들은 숨기기만 하면 가장 평범한 것도 아주 멋있는 것으로 변한다고 믿기도 한다. 하지만 비밀이 배신으로 이어지면 관계를 망가뜨리는 독이 될 수도 있으니, 인간관계에서 비밀을 다루는데 주의해야 한다. 비밀은 칼과 같아서, 잘 쓰면 유용하지만 잘못 다루면 위험해진다는 말이다.

세상에 사랑만큼 비밀이 많은 것도 없다. 그 이유는 사랑의 기본적 속성이 상대를 만나고 친밀감을 만들기 위해서는 타인이 배제된 둘만의 공간에서 일어나는 사건이기 때문일 것이다. 사랑의 행위가 이루어지는 둘만의 공간은 외부 사람의 시선이 용납될 수 없다. 외부 사람의 시전이 접근하는 순간 사랑이 꽃필 수 있는 조건 자체가 사라진다. 사랑의 공간 안에서 이루어지는 둘만의 어떤 이상하고 경망한 짓도 허용되는 것은 그들만의 비밀의 성이기 때문에 가능하다. 이렇게 사랑의 은밀함 속에서 이루어지는 언행은 외부에 전달되어서도 안 되고 공개될 수도 없다. 이불 속 사랑은 절대 사생활의 영역인 것이다.

가끔 자신의 사랑 이야기를 늘어놓거나 공개하는 사람이 있는데, 이는 사랑할 능력이 없다는 것은 고백하는 것과 같다. 거침없이 자신의 침실 이야기를 털어놓는 사람이 어떻게 비밀로 만들어져야 할 사랑의 공간을 유지할 수 있을까. 은밀한 포옹과 달콤한 속삭임이 갑자기 대중에 노출되어 무방비 상태가 되어 낯선 사람들 앞에 알몸이 드러나는 것과 같다. 사랑은 어떠한 공개도 배제되어야 할 두 사람만의 공간이어야 보장된다. 사랑은 노출되는 순간 그 사랑은 사라진다. 모든 비밀이 없어지면 상대의 신비로움도 사라진다. 모든 사적 영역이 공개되는 결혼과 비밀의 공간에서만 이루어져야 할 사랑이 양립할 수 없는 이유이기도 하다. 지금, 이 순간에도 수많은 비밀의 사랑이 모든 남성과 여성의 몸과 마음을 사로잡고 있지 않은가.

이렇게 비밀을 많이 감추고 있는 것이 사랑이지만, ‘비밀’을 알게 해주는 또 하나의 길이 사랑인 것도 맞다. 사랑을 통해 상대에게 속속들이 침투하여 상대의 비밀은 모두 알게 되기 때문이다. 상대의 비밀을 알게 하는 동시에 내 비밀도 내어주는 행위이기도 하다. 비밀에 가려있던 상대를 찾아내고 나 자신의 비밀을 내어주며 두 사람을 새롭게 발견하고 공유하는 일이 사랑이다. 비밀을 보여주면 달아날 거란 생각에 두려움을 갖곤 하지만, 사실은 비밀이 없는 알몸을 서로에게 내어줄 때 더욱 깊고 큰 사랑을 느끼게 되므로 이것이야말로 사랑의 반전이다. 단, 조건은 사랑하는 두 사람 사이에서만 그렇다는 말이다.

세상에 없는 세 가지가 ‘공짜’, ‘비밀’, ‘정답’이라 한다. 비밀을 지키는 유일한 방법은 비밀을 갖지 않는 것이라고도 한다. 하지만 비밀을 간직하지 않은 채 살아가는 사람은 없다. 비밀이란 건 이상한 방식으로 인생을 풍요롭게 만들기도 한다. 적당히 감추고 포장하는 기술을 습득하는 것이 개인 행복의 비법이 될 수 있다. 사생활의 안전하고도 확실한 보장은 마음의 평화와 긴밀한 관련이 있다. 또한 공개되지 않는다는 느낌은 사람을 자유롭게 하는 원천이다. 이런 의미에서 사람들이 생각하는 돈이나 건강, 권력 등과 같은 행복의 세속적 조건보다 먼저 배려되어야 할 중요한 가치가 비밀이다. 온라인의 SNS와 같이 화려한 자랑질이 보편화된 시대에 삶을 예쁘게 포장하여 공개하는 일이 당연할 수도 있지만, 삶은 감추는 데 신비와 묘미가 숨어 있다. 역시 삶에 정답이 없듯이 비밀에도 정담은 없다.


적당한 자랑질로 존재 가치를 나타내고 적당히 감추며 자신만의 신비의 삶을 살아가시길~!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192. ‘차별(差別)’의 의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