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원정 Jan 01. 2024

지루해져 보기

방황하는 30대의 핀란드 표류기 - 01. 어디까지 지루해질 수 있나 

최근 몇 년간은 잠시도 지루함이라는 감정 자체를 느껴본 경험이 없다. 아주 잠깐의 시간이라도 있다면 나는 항상 그 시간을 유튜브, 인스타, 인터넷 뉴스 등등 결코 내 인생에 중요했다고 할 수 없는 것들에 기꺼이 내주었다. 열심히 일해서 과부하 된 머리를 쉬게 해 준다는 핑계일 때도 있었고, 사람들 틈에서 지친 나를 그저 편한 곳으로 데려가 준다는 핑계일 때도 있었다. 핑계가 있는 적도 있고, 사실 그냥 없는 적도 많았다. 최근 1-2년간은 정말 심각한 스마트폰 중독이 아닐까 염려될 정도로, 병적으로 알고리즘을 리프레쉬하면서 내 인생을 소비해왔다. 


그래서 지루할 틈이 없었다. 아니, 지루함이라는 감정을 단 1분, 1초도 느끼지 않을 수 있도록 외면했다. 


문득 나는 최근에 아이의 창의성을 위해서 아이에게 너무 많은 장난감을 주어서는 안 된다는 얘기가 불현듯이 떠올랐다. 계속되는 외부의 자극을 통해 지루할 틈이 없어지면, 오히려 아이의 창의력에 해가 된다는 것이다. 보통 우리는 다양한 자극을 통해서 창의력을 키울 수 있다고 생각하지만 역설적으로 지루함을 느끼는, 그 순간에 생긴다고 한다. 


“일상의 지루함, 오히려 사람을 창조적으로 만든다”

출처: https://nownews.seoul.co.kr/news/newsView.php?id=20150325601013

내 어린 시절을 생각해 보면 동의하지 않을 수 없다. 핸드폰이 없었던 어린 시절엔 티브이를 보는 것 말고는 일방적으로 몰두할 수 있는 매체가 없었다. 그래서 장난감을 가지고 놀다가 지루하면 혼자서 상상의 친구와 함께 놀이를 만들어내곤 했다. 또는 놀이터에 가서 흙, 모래, 자갈로 식당 놀이를 했다. 결국 아이에게 무언가를 상상하면 만들어낼 수 있는 여지를 주는 것의 시작이 '지루함'이란 감정인 것 같다. 


그런데 왜 어른이 된 우리는, 그리고 나는 지루함이란 감정을 이토록 부정하며 살고 있을까? 나는 마치 지루함을 1분, 1초라도 느끼게 되면 내 삶이 정말 별 볼 일 없는 삶이 된 것 같았다. 그래서 열심히 외면해왔다. 하지만 그 공허한 시간을 의미 없는 콘텐츠로 채워 넣는다고 삶이 더 의미있어지진 않더라. 그렇게 외면하며 깨진 물독을 열심히 채우면 채울수록 더 공허해져 갔다. 


그래서 최근, 나는 그냥 내 삶이 지루하고 별 볼이 없다는 사실을 인정하려고 노력 중이다. 별 볼일 없는 삶의 날것에서 오는 지루함과 정면 승부를 하고 있다고나 할까. 


아직도 많은 순간 유튜브에 지고, 인스타그램에 지면서 콘텐츠로 채워지는 달콤하며 무의미한 시간을 보낸다. 하지만 예전처럼 무자비하게 모든 1분, 1초를 콘텐츠로 채우거나, 무언가를 해봐야지 하면서 관심도 없는 공부 또는 남들이 했다는 돈 버는 법을 들여다본다거나 하지 않는다. 꼭 이렇게 남들이 다 하는 것 같아서 시작한 일은 잘 완성되지 못하고 자책감만을 남기며 끝난다.  


천천히 일상의 지루함과 보잘 것 없음을 반갑게 맞이하며, 그 안에서 일어나는 감정을 살펴보려고 노력 중이다. 연락할 친구도, 열정 넘치게 하고 싶은 일도, 그렇다 할 커리어도 없는 삶이 지금 내가 처한 삶의 정면의 모습이다. 이 낯부끄러운 모습을 피하지 않고 느끼고 느끼고 느끼다 보면 언젠간 정말 진정으로 나를 인정하고, 지루함 속에서 진정으로 내가 하고 싶은 일이 피어오르지 않을까? 



2024년 1월 1일 

지루함을 느끼기에는 참 최적의 날인 새해의 시작에서

작가의 이전글 인생 처음 매니저되기 - 일주일차 2편.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