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황하는 30대의 핀란드 표류기 - 02.시간이 멈추는 핀란드의 겨울
내가 사는 핀란드는 겨울이 참 길다. 거의 10월부터 날이 급속도로 어두워지기 시작해서 11월이면 온전한 겨울 날씨에 접어든다. 12월, 1월은 눈이 와야 밝은 햇빛을 볼 수 있을 정도로 해가 드는 시간이 짧다. (핀란드의 북쪽에는 아예 해가 안뜨기도 한다) 그러다 2월이 되면 이제 참을 수 없는 권태감이 몰려온다. 도대체 언제, 언제 여름이 오는 거지? 인내심의 한계에 다다른다. 3월이 되면 체감할 수 있을 만큼 해가 길어지면서 약간의 희망이 생긴다. 그러나 핀란드의 날씨는 아직 매섭다. 4월이 되면 여름이 가까워지고 있다는 약간의 희망과 흥분감이 공기 속에 섞인 완연한 봄이 된다. (봄날씨도 한국의 봄날씨를 생각하면 안 된다. 0에서 10도 안팎의, 한국이라면 아직 쌀쌀하다고 할 그 날씨가 바로 핀란드의 봄이다.) 그렇게 지내다 보면 5월이 된다. 5월이 되면 약간의 림보 상태에 빠진다. 무슨 소리냐고? 분명 내 맘은 봄인데, 아니 조금 더 달려 나가서 여름을 맞이하고 있는데 가끔씩 하늘에서 꿈 깨라는 듯이 눈을 내려준다. 그럼, 갑자기 어디 한 대 맞은 것처럼 정신이 확 든다. '아 맞아, 나 지금 여기 핀란드에 있었지?' 그리고 다시 한번 정신을 가다듬는다. 너무 들뜨지 말자, 아직 5월이다.
겨울이 시작되었다는 우울 - 눈을 보며 약간의 희망 - 끝나지 않는 겨울에 대한 좌절 - 봄이 오나? 의 기대 - 차가운 공기를 맞으며 다시 좌절 - 이제 드디어 봄인가? 다시 한번 기대 - 눈을 맞으며 다시 현타 등등 몇 번의 정신 수양 과정을 거쳐야 비로소 핀란드에서 가장 아름다운 계절인 여름을 약 3개월 동안 맞이할 수 있다.
그래서 핀란드의 겨울은 길다. 일찍 시작해서 늦게 끝나서 길기도 하고, 하루하루의 어둠이 너무 길기도 하다. 종종 생각한다. 이런 날씨에서 평생을 살아가는 건 어떤 종류의 정신력을 필요로 하는 걸까? 핀란드에 오기 전까지 난 날씨가 사람들에게 이렇게 영향을 많이 끼친다고 생각하지 못했다. 그런데 이제는 환경이 인간을 지배한다는 사실에 완전히 동의하는 편이다. 환경은 우리의 사고를 만들고, 기분을 결정한다. 그래서 이런 핀란드의 겨울을 몇 번 지내다 보니 도대체 이런 날씨 환경이 이 사람들의 사고에 어떤 영향을 주었을지 궁금해졌다.
(그렇다고 핀란드 사람들이 우리보다 추위를 덜 타는 것도 아니다. 핀란드인 남편은 한국의 겨울이 더 춥다고 종종 불평했다. 그러나 추위를 맞이하는 핀란드 사람들에게는 한국에서 가볍게 '아 추워, 아 추워'를 외치고 다니는 우리와는 다른 어떤 일종의 깊은 결기가 느껴진다.)
이 질문에 대해서 혼자 내린 답으로 핀란드의 국민 정서라 불리는 'Sisu'(시수)가 떠올랐다. 번역하자면 성공할 것 같지 않는 상황이나 역경의 상황에도 굴하지 않는 단단한 의지나 끈기 같은 의미를 가진다고 한다. 예를 들어 우리나라의 국민 정서가 '한'이나 '정'이라면 핀란드 인들에게는 '시수'가 있는 것이다. 아마 이 정도의 정신력이 있어야 핀란드의 끝나지 않을 것 같은 겨울 날씨를 견디고 살아갈 수 있지 않았을까? 또 역사적으로 스웨덴과 러시아와 같은 강대국 사이에서 약소국으로 살아남기 위해서도 굴하지 않고 계속해서 도전하는 정신이 필요했을 것 같다. 왠지 이런 부분은 우리나라와 비슷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핀란드의 날씨를 얘기하다가 멀리 돌아와 버렸다. 솔직히 얘기하면 이런 환경에서 어떤 생각으로 살아가는지 아직도 잘 모르겠다. 아마 별 생각을 안 하고 살 수도 있다. 또는 그냥 주어진 환경에서 최대한으로 즐기며 살아가는 방법을 터득한 것일 수도 있다. 겨울에는 사우나를 하고 눈 위에서 구르면서 눈을 즐기고, 어두운 겨울 저녁에는 예쁘게 꾸민 집 안에서 뜨개질을 하고 책을 읽는다. 별다른 수가 없으니 그냥 받아들여야지 뭐. 아마 그런 핀란드 사람들이 이런 악조건 속에서도 계속해서 가장 행복한 나라를 만들어가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 체감기온 영하 27도를 찍어버린 헬싱키의 한 평일 저녁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