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황하는 30대의 핀란드 표류기 - 03. 불안 추가주문 금지
요즘 나를 가장 불안하게 하는 것이 뭘까 생각해 봤다. 아무래도 바닥을 보이는 통장잔고이다. 2월에 여행 갈 비행기표를 결제하고 나니 평소에 비상금처럼 남겨두던 몫이 똑 사라졌다. 거기다가 12월 월급은 내가 세금 계산을 잘못해서 평소보다 1000유로나 적게 받게 되었다. 이렇게 되니 집세와 관리비를 내고 통장에 남은 돈이 정말 없다. 1월은 그냥 숨만 쉬면서 살아야겠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30대가 되면 이런 상황이 없을 줄 알았는데 돈 모으기에 잼병인 나는 30대가 들어서도 이런 상황을 맞는다. 누구를 탓할일도 아니다. 그래도 좀 정신적으로 피폐해지기는 한다. 원체 세금을 많이 떼는 나라에 살아서 그런지 평소에 저축을 잘 못하고 있는 것에 대해서 나름대로 정신승리를 하며 살아왔는데, 이렇게 생활비가 궁핍해지는 달에 들어서면 그래도 여전히 현타가 온다. 아니 내가 그래도 이 회사에서 몇 년을 일했는데 이렇게 모은 돈이 없다고!? 하면서 말이다.
창피해서 어디 나가서 대놓고 얘기도 못하겠다. 그래서 이렇게 글로라도 풀어본다. 유튜브를 켜면 '20대에 1억을 모았어요.' '30대에 2억 찍은 이야기.' 등등 나에게는 저세상 이야기들을 어렵지 않게 본다. 그걸 볼 때마다 나는 한편으로는 외면하고 한편으로는 뜨끔해하면서 뭔가 기분이 찝찝해진다. 나 지금 제대로 살고 있는 것 맞나? 하는 의문이 들기 때문이다. 30대가 되면 이 정도의 자산을 가지고, 이 정도의 안정성으로 살아갈 거라고 생각했던 내 상상과 현실의 나는 너무 다르다. 거기서 나에 대한 자괴감이 오는 것 같다. 그런데 이 자괴감은 정당한 자괴감일까? 아니면 그냥 허상의 불안일까?
물론 돈을 모으고 저축하고 안정성을 가지는 건 너무 찬성이다. 그렇게 모으는 것도 능력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나는 좀 돈을 모으긴 해야 한다. 그런데 내가 지금 이 나이에 1억이 없다고 나를 미워하지는 말아야지 싶다. 몇 살에 얼마를 모아야 하는 것 - 결국 이것도 우리 사회에 뿌리 깊게 내려앉은 정형화되고 재단된 성공의 모습 중 하나라고 생각한다. 너는 몇 살에 결혼을 해야 하고, 몇 살이면 이 정도의 돈이 있어야 하고, 몇 살이면 이렇게 살아야 해. 어렸을 때부터 알게 모르게 무의식적으로 나 스스로를 세뇌하며 살아왔다. 누구를 위한 세뇌였나 싶다.
현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면 그렇게 나쁘지 않을 수 있는데, 나는 여기까지 와서 자꾸 한국사회의 기준으로 내 삶을 재단한다. 나 스스로 현실에서 고통과 불안함을 만들어낸다. 있는 그대로만 불안함을 느끼되 추가적으로 내가 더 재생산해내지는 말자는 다짐을 한다. 앞으로 불안 추가주문 금지이다. (물론 생각하면 이런 불안에서 오는 바지런함이 그동안 한국 사회의 성장에 일조한 부분이 있는 것 같지만, 지금의 우리 사회는 과잉 불안에 빠져서 사람들을 오도 가도 못 가게 묶어놓는 지경에 이른 것 같다)
6년 연속 제일 행복한 나라 핀란드에 와서 살면 행복하냐고? 그건 이 나라 사람들의 행복도이지 아직까지 내 행복도에는 반영된 바 없음이다. 나는 언제쯤 내 안에 있는 한국사회의 기준에서 조금 자유로워질 수 있을까? 그게 애초부터 가능한 일이었긴 한 건지 의문이 드는 저녁이다.
- 날씨가 많이 따뜻해진 1월 9일 화요일 저녁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