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모님을 머리로 이해하거나 마음으로 용서하거나
오랜 시간 동안 부모님에 대한 미움, 특히 아버지에 대한 미움은 내 마음을 떠나지 않았다. 아니, 떠나지 못했다는 것이 더 맞는 표현일지도. 어렸을 때부터 엄했고 술을 마시고 오면 큰 소리가 났다. 아직도 어렸을 적 아버지가 방문을 두들기던 그 소리와 함께 쿵쿵대던 심장박동은 기억 속에 꽤나 선명하게 남아있다. 또 나는 어렸을 적 좀 통통한 편이었는데, 늘 아버지는 나에게 밥상머리에서 '적당히 먹어라'라는 소리를 하셨다. 이제 막 자라나는 7, 8살 어린이에게 '적당히'란 도대체 얼마의 정량을 말하는 걸까. 그 소리를 들으면 밥을 먹다가도 나는 밥맛이 뚝 떨어져서 분한 마음으로 눈물을 머금으며 밥상을 떠났다. 신체적인 학대는 없었지만 정서적인 학대는 분명했던 것 같다. 늘 집안 분위기는 큰 비가 오기 전처럼 무거운 기압 속에 있었다. 나에게 가장 조마조마했던 순간은 주말이었다. 모든 집안 어른들이 집에 모여있을 때는 도저히 무슨 일이 터질지 모르니 말이다. 분명 아버지에게서 어떤 식으로든 큰소리가 나거나 할머니의 구시렁거리는 혼잣말에 어머니가 잔잔히 화가 날 것만 같았고, 그 예상은 대충 맞았다. 중, 고등학교 때는 집에 들어가기 전에 늘 엄마에게 전화를 하면서 '집에 아빠 있어?'하고 물어봤던 기억이 난다. 아빠가 있다고 하면, 그 무거운 분위기 때문에 어찌나 집에 들어가기 싫던지...
최근 5년간은 나 자신을 다시 되돌아보는 작업에 집중하는 시간이었다. 나는 왜 지금의 모습의 내가 되었는지 궁금했다. (예를 들면, 왜 나는 일대일이 아닌 다대다로 사람을 만나는 것을 이토록 죽을 만큼 힘들어하는지, 왜 다른 사람만 만나고 오면 기가 쭉쭉 빨리는지, 왜 욕심이 많으면서도 이렇게나 게으르고 무기력한 지 와 같은 내가 싫어하는 나의 모습들이 중점이었다.) 다행히도 좋은 상담 선생님을 만나서 1년 반이 조금 넘는 시간 동안 꾸준히 상담을 받았다. 결국 지금 나의 모습을 만든 것들의 근원은 나의 가족이었으며 나의 가족의 역사를 이해하지 않으면 그 안의 나를 이해할 수 없었다. 그래서 다시 마주하기 힘든 흙탕물들을 상담을 통해 열심히 휘저었다.
흙탕물을 대처하는 가장 쉬운 방법은 가라앉은 그대로 두는 것이다. 흙은 저기 저 깊은 곳 어딘가에 가라앉아 있으니 나만 바쁘게 일상생활을 살아내면 맑은 물이라고 속이며 충분히 무시하며 살 수 있다. 하지만 핀란드에서의 생활은 나에게 충분한 바쁨을 주지 않았고, 나는 그동안 애써 무시해 오던 그 어두운 흙을 마주할 수밖에 없었다.
어떤 사람은 굳이 이런 작업을 하지 않아도 될 것이다. 그런데 나의 경우에는 나를 찾기 위해서 이 작업이 필수적이었다. 어린 시절 나에게 왜 그래야만 했었는지, 왜 그런 상황을 만들 수밖에 없었는지, 이것들을 이해하거나 용서하지 못하면 결국 나 스스로의 과거에 묶여서 지금의 나도 앞으로 한 발짝도 뗄 수 없는 기분이 들었다.
30대가 된 나에게 누군가의 딸이 된다는 것은 부모님을 머리로 이해하거나 마음으로 용서하는 것이다. 나의 부모를 부모라는 역할에 가두지 않고, 그들이 엄마, 아빠가 되기 전, 그 뒤편의 역사까지 이해하는 것이다.
과연 나는 그들을 머리로는 이해할 수 있을까? 더 나아가 마음으로도 용서할 수 있을까? 끝이 보이지 않는 긴 터널 같은 이 과정에서 나는 어디까지 온 걸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