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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판 130쇄의 위엄

눈이 붓도록 울게 한 책 <소년이 온다>

초판 130쇄. 대단한 책을 골랐다 싶었다. 그래, 노벨문학상인데. 우리나라에서 제일 잘난 것도 아닌, 세계적인 작가의 작품인데 말 다했지.


사실 지난 10일 수상자로 선정되고 바로 온라인 서점에 들어가 책을 장바구니에 담았었다. 하루 일과를 마친 저녁, 장바구니에 들어가 결제를 하려는데 책들이 모두 '예약판매' 상태로 되어 있는 게 아닌가. '에이 뭐야, 바로 못 받잖아. 나중에 바로 배송 상태가 되면 그때 사야겠다.'라고 생각하며 방금 결제한 주문을 취소해 버렸다.


그리고 다음 날. 종일 포털을 장식하는 뉴스들이 심상치 않았다. 한강 책 품절, 30만 부 동나, 등등. 자국민의 두 번째 노벨상 수상에 기쁜 국민들이 너 나 할 것 없이 책을 사들이고 있는 거였다. '나도 그중 한 명일 뻔했네. 그냥 취소하지 말걸. 지금 사면 더더 오래 기다려야 하잖아.' 갑자기 힘이 쭉 빠졌다.


일주일쯤 뒤, 5학년 큰아이가 책을 사달라고 했다. 집에 더 이상 읽을만한 재미있는 책이 없다고. 김동식 작가님 책을 읽고 싶단다. 쿨하게 주니어 시리즈 중 한 권을 결제하려니 무료배송 금액이 조금 모자란다. 에라 모르겠다 내 책도 한 권 같이 골라보자. 전에 결제하려다 취소한 <소년이 온다>를 다시 담았다. 예약판매 수령일이 또 뒤로 밀려있다. 그때 그냥 주문했으면 벌써 받아서 읽었을 텐데.


사실 첫날 주문 취소를 했던 이유는 한 가지 더 있었다. 바로 배송이 되지 않아서기도 하지만 한강 작가의 수상 소식에 한국인으로서 냄비처럼 반응하는 느낌이 싫기도 했다. 받아놓고 읽지는 않고 모셔둘까 봐 스스로 걱정되기도 했다. 책이 워낙 난해하다는 소문도 있었다. 하지만 취소 후 일주일, 계속된 언론의 영향일까 아니면 나의 순수한 관심일까 아직도 잘 모르겠지만 한강 작가의 책이 점점 읽고 싶어 졌고, 세계가 주목하는 그녀의 작품이 너무너무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채식주의자는 친정 부모님이 갖고 있으시다고 해서(맨부커상 수상 때 이미 들이셨다고 한다) 소년이 온다를 결국 구입했다.




꼬박 일주일은 기다린 것 같다. 함께 주문한 아이의 책이 먼저 오고, 잊을만하니 내 책이 왔다. 요즘 책 값도 비싼데, 이 책은 생각보다 값이 저렴했다. 초판 그대로 쭉쭉 팔려 벌써 130쇄다. 안개꽃 속 주황빛 상자에 쓰인 제목. 약간 촌스런 디자인이지만 호기심이 일었다.


저녁때쯤 받아 든 책을 짬짬이 읽었다. 아이와 공부하며 채점하는 사이사이 읽어 내려갔다. 채식주의자 같은 경우는 읽고 이해하기가 많이 난해하다던데, 이 책은 괜찮네. 하며 쭉쭉 읽었다.


1980년 5월 광주의 이야기. 솔직히 큰 관심이 있던 이야기는 아니었다. 관심이 없었던 것도 아니다. 그리 큰 생각이 없었다. 역사를 배울 때도 늘 삼국시대-조선시대 등에 밀려 근대사는 소홀했었고, 내가 태어나기 불과 몇 년 전의 일인데도 오히려 가까운 역사라 그런가 마치 등잔 밑이 어두운 격이었다.


화자의 시선이 독특했다. 뭔가 주변에 영혼처럼 맴돌며 인물들을 관찰하는 기분이었다. 주인공 격인 만 15세의 동호를 중심으로 여러 등장인물들의 이야기를 장마다 나누어 담았다. 어떤 건 그들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증언으로, 어떤 건 혼의 생각으로, 어떤 건 작가의 입으로 전했다.


이런 것이 한강 작가의 책이 난해한 이유 중 하나라고, 서사 구조가 일반적이지 않는 특징이 있다고 들었는데 그게 오히려 난 좋았다. 작가의 시선과 의도대로 휘둘리는 게 좋았다. 온전히 몰입해 그녀의 책 안에서 허우적거렸다.




읽으며 이렇게 많이 운 책은 처음이었다. 책을 3분의 1 지점부터인가, 아무튼 내내 울었다. 영화든 소설이든 보통은 클라이맥스에서, 주인공의 감정에 이입하며 잠깐 울고 마는데 이 소설은 달랐다.


동호, 정대, 정미, 은숙, 선주, 진수... 이외 인물들의 이야기가 모두 아팠다. 아프고 폭력적인 모든 것을 담아내려면 최대한 그대로, 폭력적으로 담는 것이 최선이었다고 작가는 말한다. 그래서인지 읽는 나 역시 작가의 시선을 오롯이 따라가며 마치 현장에 있는 것 같은 잔인함을 생생히 느낄 수 있었다.


동호의 이야기에선 점점 눈물이 많아졌다. 제목에 나오는 소년이 바로 동호. 만 15세의 중3 학생이다. 함께 길을 나섰다 죽은 친구를 생각하며 자연스레 시신 수습하는 일을 돕게 되고, 결국 그날 새벽 마지막까지 도청에 남는 이들 중 한 사람이 되고 만다. 그 어린아이가 뭘 알고 그랬을까.. 그 어린아이가 죽음을 알까, 민주주의를 알까, 군부독재를 알까 싶었다. 그런 착하디 착한 아이들을 향해 미친 광기로 총을 난사한 이는 지금 살아있을까. 보는 내내 치가 떨려서 오열을 멈출 수가 없었다.


온전한 정신으로 살 수 없던 동호 어머니의 대사가 책의 여러 장을 채운다. 삼 형제 중 막내를 잃은 엄마의 후회, 절망, 슬픔. 모든 일을 후회하고 자책하는 심정이 너무도 마음을 저며왔다. 중간중간 내뱉는 말 중 동호의 어린 시절을 묘사하는 부분에선 더 울음이 터져 나왔다. 나의 아이들이 떠올라서 더 참을 수가 없었다. 80년 5월의 광주에선, 동호 같은 아이들이 여럿 있었으리라.. 얼마나 많은 가족이 지금까지 아플까 싶다.




쉽지 않은 책이었지만 집중해 읽을 수 있어 감사했다. 눈을 떼면 다시 돌아오지 못할까 두려워 계속 읽어 내려갔다. 하룻밤 자고 나머지 3분의 2 분량을 읽을 때 그랬다. 읽는 내내 그날의 광주와 살아남은 자들의 마음속 머릿속에 들어갔다 나왔다 했다.


힘겹고 생생한 글을 써준 작가에게 감사를 전한다. 마지막 부분에서 동호의 형이 작가에게 당부한 말처럼, 아무도 동호를 모독할 수 없도록 이렇게 잘 써준 작가에게 감사를 표한다.


그리고,


그날 그곳에 있던 모든 이들과 지금도 아픔을 간직한 모두가 지금부터는 더 이상 아무도 힘들지 않길.. 내 진심과 우주의 모든 기운을 끌어모아 기도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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