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날 옛날깊은 산골짜기에부용이란 여인이 살고 있었어요. 부용이 사는 마을은 밤마다 도깨비가기승을 부리는무섭고기이한 곳이었습니다.
해가 지고마을에어둠이 깔리기 시작하면 놈들의 무대가펼쳐졌습니다. 온갖못된 짓을 일삼는도깨비들의 장난에 부용은 거의 매일밤을 시달려야 했습니다.돼지들의찢어질 듯 한 울음소리에밤을 하얗게 지새우다 날이 밝아 나가보면 우리 안은언제 그런 일이 있었냐는 듯 평화로웠고잠자리에누우면방문 창호지에 부딪히며뿌려지는모래소리가단잠을방해하기도했습니다. 그런 날에는 오들오들 떨며 이불을 뒤집어쓰고 두문불출 날이 밝기를기다려야 했답니다. 저모래를 언제 다 치우나걱정은 태산같이 밀려오고밤은 길었습니다.
밤새 시달려 수척해진 얼굴로 비를 들고 문 앞으로 나가보면아니 글쎄, 그 앞은 먼지하나 없이 깨끗한 거예요. 부용은 비를 집어던지며 오늘밤엔 절대 당하지 않으리라 이를 악물어보지만 역시나 도깨비를 당할 재간은 없었습니다.
부용의 마을에서 읍내까지는 30십리가 넘었습니다. 질그릇을 사러 그 먼 길을 떠났던 어느 날,오랜만에 간 장터에서 노리개며 가락지 구경에푹 빠졌던부용은 그만 때를 놓치고 말았어요.어스름이짙게깔리고 그때 비로소 집으로향한 부용은 스산하고아득한 길을 걷고 또 걸었습니다.갈길은아직도 멀었는데 이미 칠흑 같은 어둠이 찾아들었고설상가상으로 배까지고팠습니다.뒤적뒤적 호주머니에 손을 넣어보니 야속하게도주머니 안은 텅 비어있었고 손에 잡히는 거라고는 피우다 남은 담배꽁초 한 개비였어요. 이거라도태워야겠다싶어 성냥에 불을 붙이고 숨을몰아쉬었습니다. 그리고는 연기로 배를 채워보자는 양담배를한 모금 깊숙이빨아들였습니다. 그런데 순간부용의 머리는핑 돌았고그만 자리에서철퍼덕 쓰러지고 말았어요.
얼마나 지났을까, 차디찬 흙바닥에서 정신을 차려보니 '휙 휙 '눈앞에서도깨비불이조롱하듯 춤을추고 있는 거예요.
"이 여자야, 사람이 지혜가 있어야지. 지혜가 있어야지." 알 수 없는 말만반복하며 불은 사방으로 흩어졌대요.
어릴 적 들었던 할머니의 도깨비얘기는 신기하고 흥미로워 지금까지도 잊히지가 않는다. 성인이 되어 아빠랑켜켜이 쌓인 할머니의 고리짝 이야기를 하다가도깨비얘기를 물은 적이있었다. 당연히 할머니가 헛것을 보고 들었다는 전제하에 물었는데아빠의 대답은 의외였다.
"그거할머니가 꾸며내거나 헛것을 본 게 아니라는 아니라는 증거가 있어."
"증거가있다고요? 그게 뭔데요?"
아빠의눈에는 힘이 들어갔고 분위기는 진지해졌다. 마치 아주 긴요한 얘기를 하려는 듯.
"그게 뭔가 하면, 할머니는 지혜라는 말을 모르거든. 할머니가그 얘길 하면서 묻더라. 지혜가뭐냐고......"
천만 개의 도깨비불이 눈앞에 아른 아른 춤을 추는 것 같았다. 어디까지가 진짜고 어디까지가 허상이란 말인가, 믿기지 않지만 믿어야 할 것 같은, 과학을 들이밀 수도 없고 앞뒤가 뒤틀리기도 했던 어릴 적 할머니의 옛날이야기. 그래서 그렇게 혼이 쏙 빠질 만큼 재미졌던 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