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사람의 그녀

by 김선희

사전에선 센세이션을 이렇게 정의한다. 많은 사람을 순식간에 흥분시키거나 물의를 일으키는 것.


아침부터 부천 여자중학교 3학년 3반 교실이 이글거렸다. 옥닥복닥 작은 교실 안에서 우린 각기 다른 입으로 같은 얘기를 하고 있었다.

"봤어? 어제 강변가요제."

그야말로 센세이션이 일어난 것이다.

올림픽을 한 달 남짓 앞두고 전 국민이 붕, 날아오르던 역동의 1988년, 그리고 8월, 전국 중, 고등학생들의 심장을 사정없이 붙잡고 흔드는 가수가 강변가요제에서 탄생했다. 기존엔 볼 수 없었던 자유분방함, 선머슴 같은 외모에 봇물처럼 터지는 매력. 우리는 순식간에 달아올랐고 상은언니 앓이가 시작되었다.


여학교에선 보이시한 학생이 우상이 되는 경우가 종종 있다. 남학생이 없어서라기보단 나는 그런 현상을 이쯤으로 해석한다. 끓어 넘치는 열정과 치기를 받아줄 그릇은 반드시 필요하다, 고로 좋아할 대상은 그릇 중에 하나, 혈기 방장함을 분출하기 위한 수단이라고.


중3 소풍날 장기자랑에서 이상은의 담다디를 열창하던 소녀가 있었다. 짧게 치켜 깎은 머리, 박시한 옷차림, 차돌처럼 단단한 인상, 영락없는 이상은이었다. 그녀를 처음 본 그날부로 나는 요동치기 시작했다. 그녀의 실루엣이 멀리서 아른거리기만 해도, 뒤꼭지만 보여도 심장이 널을 뛰다 못해 공중제비까지 돌았다. 그녀의 교실 앞을 지나갈 때는 손발이 흠씬 젖을 정도로 바짝 긴장이 되었고 사위는 후끈거렸다. 이게 무슨 감정일까, 어린 나는 혼란스러웠다. 지금 나는 누구를 좋아하고 있는 걸까, 이상은일까, 이상은을 닮은 그녀일까. 동성친구를 이런 마음으로 좋아해도 되는 걸까, 혹시 불경스러운 건 아닐까,

들켜서는 안 될 것 같았다. 나는 온마음을 바닥까지 긁어모아 봉다리 속에 꾹꾹 눌러 담았다. 아무도 알아차릴 수 없게 주둥이를 고무줄로 친친 감고 봉인했다. 그러고 나서 몹시 앓았다.


초등학교 때 단짝친구, 타 여학교에 다니는 은영이의 전화를 받았다. 이 얘기, 저 얘기 잉여 없는 수다로 삼십 분 이상을 뜸 들이던 은영이는 내게 이런 고민을 털어놓았다. 학교에 좋아하는 친구가 있는데 감정이 너무 꽉 차 있어서 감당이 안될 정도라고, 가수 이승철을 닮아 별명이 여자이승철인 그녀는 인기가 상당해서 자기뿐만이 아니라 주변의 친구들도 가슴앓이를 많이 한다고 했다. 그 애를 좋아해도 괜찮은 거냐는 나의 질문에 은영이는 태연스럽게 대답했다. 누구에게나 있을 수 있는 자연스러운 감정 일 뿐이라고. 나는 그제야 안도했다. 그리곤 그 후로 마음껏 우리 학교 이상은을 좋아했다. 시쳇말로 덕질이 시작된 것이다. 대략 편지를 팔십 여통 보냈던 것 같다. 답장이 오면 품에 끼고 진저리를 치며 날뛰었고 편지지에 숭숭 구멍이 뚫릴 정도로 읽고 또 읽었다. 그렇게 중3 때 누군가를 좋아한다는 감정을 처음 알게 되었다. 마음이 뜨거웠던 것도 처음이었다.


고등학교 3학년 땐가, 나는 남사친 K와 첫사랑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다. 남사친의 첫사랑은 초등학교 6학년 때 이선희 노래를 똑같이 부르던 같은 반 여학생이었고. 나는 중3 때 담다디를 부르며 꺽다리 춤을 추던 그녀를 얘기했다. 그러고 나서 알게 되었다. 우리 둘이서 한 사람을 얘기하고 있다는 것을.

우리는 오래도록 그녀를, 추억을 얘기했다. K는 그녀를 여리고 작은 소녀였다고, 나는 이쁘장한 선머슴이었다고 기억했다. 두 사람의 기억 속에 완연히 다른 얼굴로 남은 그녀, 하지만 항상 형형하게 빛이 났다는 점에서, 그리고 그녀 앞에서 우린 예의 반짝거렸다는 부분에선 이견이 없었다.

"그럼 너랑 나랑 첫사랑이 같은 거야?"

K가 얼굴이 빨개지도록 웃었다. 따라 웃던 내 표정은 어느새 그윽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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