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소보- 프리슈티나
여행에서 돌아온 지 한참이 지난 지금도 남편은 소고기가 먹고 싶을 때면 말한다.
"코소보 소고기가 맛있었지.. 한 번씩 먹고 싶다니까."
소고기라 하면 세계적으로 맛있기로 소문난 우리나라의 한우나 일본의 와규 아니면 맛과 양을 모두 잡은 아르헨티나를 떠올리는 것이 보통일 것이다. 그런데 코소보라니 조금 뜬금없을 수 있겠다.
솔직히 가성비로 치면 코소보의 소고기 요리를 따라갈 나라가 몇 없지 않을까 생각한다. 프리슈티나에 도착하여 처음으로 먹은 음식이었던 소고기 타버(tavë)는 큼직이 썬 고기와 야채를 도자기 용기에 익힌 발칸식 캐서롤이었다. 배가 고팠던 걸 감안하더라도 타버의 맛이 아주 좋았던 기억이 난다. 모로코의 소고기 타진이나 우리나라의 갈비찜을 떠올리게 하면서도 양념이 너무 튀지 않으면서 소고기 고유의 진득한 향이 입에 착 감기는 맛이었다. 같이 주문한 소스는 상큼한 치즈와 매콤달큰한 피망의 조합이었다. 빵을 작게 뜯어 타버와 치즈소스와 함께 먹으니 눈이 절로 스르륵 감겼다. 놀라운 건 이 모든 게 10유로 남짓이었다는 것.
둘째 날엔 스테이크도 시켜 먹었는데 그땐 사진을 찍을 새가 없었다. 가격이 5유로 남짓이었으니 별 기대 없었는데 고기가 부드러워 놀랐다.
국민의 90% 이상이 무슬림인 코소보는 이슬람 국가라 불러도 무방해 보이지만 놀라울만치 개방적이다. 어둑하게 해가 저물고 광장에 조명이 켜지면 너도나도 야외 테이블에 자리를 잡고 술을 마신다. 히잡을 쓴 여성은 '본 적이 있었나?' 싶고 다들 몸매가 드러나거나 기장이 짧은 옷도 아무렇지 않게 입는다. 그리고 또 하나. 담배를 엄청 피워댄다. 이 나라의 미세먼지 농도는 어쩌면 흡연율에 좌지우지되는 것은 아닐까 싶게끔 거의 모든 이가 담배를 입에 물고 있다. 금연구역이란 애초에 존재하지 않는 것 같고, 실내외 할 것 없이, 또한 남녀 할 것 없이 어딜 가든 애연가들이 보인다. 이는 코소보만의 특징은 아니고 우리가 다닌 발칸의 5개국 모두의 공통점이다. 단지 이슬람교의 비율이 월등히 높은 코소보에서도 이런 풍경을 볼 수 있다는 게 흥미로울 뿐이다.
개방적 이슬람국가에 속하는 모로코에도 길에서 술을 대놓고 팔거나 밖에서 술을 마시는 현지인들은 없다 (숨어서는 마신다). 그런데 코소보는 다르다. 저녁 예배를 알리는 아단이 광장에 울려 퍼지지만 않았다면 상기된 얼굴로 잔을 부딪히며 대화에 열을 띠는 이들 중 대다수가 무슬림이라는 사실을 아무도 믿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이들이 나쁘다고 말하고 싶은 건 아니다. 종교적으로 독실한 것과 선한 것이 항상 일치하지는 않는다. 하람(haram, 이슬람 율법상의 금기)이라고 해서 무조건 하지 말아야 한다는 법은 없다고 생각한다. 음주와 흡연은 대표적 하람이지만, 사실 남을 해하는 결과를 낳지만 않는다면 상관없다는 의견이다. 나의 맘을 대변하듯 프리슈티나 광장의 식당들에는 술에 관한 재미있는 문구들이 아래처럼 걸려있다.
발칸의 흡연문화에 대해 좀 더 얘기하자면, 그들은 정말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는다. 사방이 트인 야외에서도 어딘가에서 솔솔 피워지는 담배냄새를 맡을 수 있다. 인적 드문 곳에서 홀로 피운다면 괜찮겠지만 여긴 그런 것을 미덕으로 치지 않는 것 같아 간접흡연을 피할 수 없다. 어린아이가 있는 곳에서도 흡연은 계속된다. 남의 건강을 해칠 수 있다는 점에서 이것은 내 기준으로도 명백한 하람이다. 비흡연자라면 발칸을 여행할 때 이 점이 힘들 수도 있다. 현지인들끼리는 전혀 문제가 없어 보이는 것이 다행이라면 다행이다. 우리는 처음엔 담배연기에 눈살을 찌푸리기도 했지만 나중이 되자 어차피 피할 수 없는 거 그냥 향기라고 생각하자며 스스로 최면을 걸면서 다니다 보니 익숙해져 괜찮았다.
긴 광장의 한쪽 끝에는 성 마더 테레사 대성당이 있다. 대성당이지만 소박한 외양의 이 성당은 순백의 건물과 값비싼 장식 없는 내부가 일평생을 빈민가에 바쳤던 마더 테레사의 삶을 닮은 듯하다. 마더 테레사의 고향은 얼마 전 우리가 거쳐온 북마케도니아의 수도 스코피예이다. 그런 그녀의 이름을 딴 성당이 이곳 프리슈티나에 세워진 이유는 코소보인들(인구의 90% 이상이 알바니아계)이 그들과 같은 알바니아계인 마더 테레사를 같은 민족으로서 자랑스럽게 여기기 때문이다. 성당 앞에는 코소보-세르비아 전쟁 당시 비폭력 평화운동을 이끌었던 독립투사이자 코소보의 초대 대통령이기도 했던 이브라힘 루고바의 동상이 광장을 마주 보며 서 있다.
프리슈티나에는 유고연방으로부터의 독립을 기념하는 동상들이 몇 개 있는데 재미있는 건 빌 클린턴의 동상이 껴 있다는 것이다. 미국이 코소보의 독립에 힘을 실어주었다는 이유에서다. 그렇다 해도 타국 대통령의 동상이 손을 흔들며 수도 한복판에 서 있는 건 개인적으로 좀 기괴했다. 표면적으론 독립을 도와준 미국이지만, 세르비아의 무자비한 탄압으로부터 스러져가는 알바니아계 코소보인들의 생명을 구제하려는 순수한 의도의 지원은 당연히 아니었다. 수면 아래의 진짜 목적은 발칸을 영향권 아래 두려는 러시아를 견제하기 위함이라는 걸 모르는 사람은 없다. 두 나라가 정치적 동맹으로 친분을 다지는 건 당연한 일이겠지만 굳이 자발적으로 상대국의 대통령을 자국 위인들의 동상 사이에 같이 세웠어야 했을까 의문이 들었다.
광장에 독특한 제작 방식으로 단연 눈에 띄는 조형물이 있었다. 이 커다란 얼굴에는 'heroinat'라는 이름이 붙었다. 알바니아어로 여성 영웅들이라는 뜻이다. 약 2만 개의 금속핀을 이용해 여성의 얼굴을 입체적으로 표현한 이 작품은 코소보 전쟁 때 세르비아군에 의해 성폭력을 당했던 2만 명의 코소보 여성들을 기리기 위한 것이다. 가까이서 보면 핀 하나하나에도 여성의 얼굴이 새겨져 있다. 이를 보며 세르비아에 대한 코소보의 반감이 어떤 것일지 상상해 볼 수 있었다.
이곳저곳 돌아다니다 큰 경기장이 있어 기웃거렸다. 문이 잠겨 들어갈 순 없어 보였고 입구에는 어느 축구 선수의 동상이 서 있었다. 코소보 축구의 전설로 불리는 파딜 보크리다. 알고 보니 경기장의 이름도 파딜 보크리 스타디움이었다. 어슬렁거리는 우리를 본 경기장 관계자가 우리에게 말을 걸어왔다. 코소보를 여행 중이라고 하니 반겨주며 특별히 경기장의 문을 열어주었다. 경기장을 본 것 보다도 그분의 친절에 기분이 좋아졌다.
"이것도 가져가세요. 선물이에요."
나가는 길에 그분은 시원한 물병 두 개를 우리 손에 쥐어주었다. 손바닥만큼 작은 물병이었지만 이 사소해 보이는 호의는 마음을 가득 채우기에 충분했다.
다시 광장의 반대편으로 걸어가면 제국의 모스크가 나온다. 오스만 제국의 술탄 마흐메드 2세의 명으로 지어진 역사 깊은 곳이다. 모스크 앞 잔디밭에는 특이하게도 어느 카페가 자리하고 있다. 야외 테이블에 앉아 해질녘의 모스크를 감상하며 남편은 커피를, 나는 레몬에이드를 마셨다. 예배시간을 알리는 아단이 울리자 남편은 모스크 안도 구경할 겸 손발을 씻고 기도를 하러 들어갔다.
이슬람의 예배는 특별한 날을 제외하곤 그리 길지 않다. 혼자 음료를 몇 번 홀짝일 동안 짧은 예배가 벌써 끝났다. 남편이 이것 좀 보라며 안에서 찍은 사진을 보여줬다. 기도하는 신자 옆 부드러운 카펫 위에 고양이 한 마리가 등을 쭉 펴고 모로 누워 잠을 청하고 있다. 고양이를 쫓지 않고 조용히 눈을 감은 채 신과의 대화를 이어가는 신자와 평화로운 잠에 빠진 고양이가 그려내는 장면이 사랑스럽다.
모스크에서 가까운 곳에는 코소보 박물관이 있다. 박물관의 층계를 오르면 벽면에 마더 테레사의 벽화가 걸려 있다. 물감이 아니라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철심들이 모여 그녀의 입가와 눈가의 주름까지 섬세하게 그려낸 작품이다. 그리 크지 않은 박물관의 내부에는 코소보의 전통 의상, 과거 전쟁에서 쓰인 군복과 무기들, 코소보 해방군의 군사문서, 통신기기 등이 전시되어 있다. 맨 안쪽에는 여러 나라의 국기들이 모여 있는데, 코소보를 독립국으로 인정한 100여 개 나라들의 국기이다. 그리고 코소보의 국기도 서 있다. 파란 바탕의 한가운데 노란색으로 코소보의 땅덩어리가, 그 위에는 여섯 개의 하얀 별이 그려졌다. 유럽 연합의 일원이 되고자 하는 포부를 담은 파란 바탕, 코소보의 독립된 영토를 강조하는 노란지도, 알바니아인과 세르비아인을 비롯하여 코소보를 구성하는 여섯 민족들의 화합을 의미하는 여섯 별들. 이 국기에 담은 코소보의 염원이 평화 속에 이루어지길.